우리고장 우리마을 -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34] 풍기 금계 금양정사(錦陽精舍)

금양정사(錦陽精舍)
금양정사(錦陽精舍)

황준량은 풍기 사람이다. 1517년 현 풍기읍 서부3리에서 태어났다
금계를 좋아했던 황준량은 정사(서당)를 지어 강학처로 삼으려 했다

승려 행사가 1563년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역사를 완공하고 관리했다
퇴계는 풍기군수 조완벽에게 부탁해 이 정사에 면역 혜택을 당부했다

금양정사(錦陽精舍) 가는 길

‘금양(錦陽)’이란 말만 들어도 아름다운 풍광이 떠오르고, 따사로운 바람이 이마를 스치는 듯하다. 영주에 살면서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선생의 사색 공간으로 알려진 금선정(錦仙亭)은 알면서도 경북도유형문화재 제388호로 지정된 금양정사는 잘 알지 못하는 이들이 많다.

금양정사는 금선정 서편 산 중턱에 있다. 금선정에서 금계 선생 추모비 방향으로 조금 올라가서 180도 휘어진 길을 따라 100여m 가다 보면 「금양정사·욱양단소」 표석이 보인다.

밭길 따라 숲속으로 난 길로 접어들어 급경사 之자 길을 굽이돌아 올라가면 소담한 연못과 금양정사를 만나게 된다. 이곳은 도시의 시끄러움과 티끌이 이르지 못하는 곳으로 비바람에는 아늑하고 눈부신 햇살은 가득한 곳이다.

금계 선생은 이곳을 유난히도 좋아했다. 그는 만년에 한적하고 아름다운 이곳에서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을 할 곳으로 마음에 두었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이루어지지 못했다.

금양정사 전경
금양정사 전경
금양정사 옆 욱양단(郁陽壇)
금양정사 옆 욱양단(郁陽壇)

금양정사의 건물 구성

정사 마당에 섰다. 가까이에는 연못이 보이고, 우거진 숲속 틈새 멀리로는 금선계곡이 보인다. 정사 누마루에 올랐다. 10여 편의 편액과 시판이 걸려있다. 그중에는 중수기, 상량문, 금계정사 완문 등이 눈에 띈다.

또 정사 기둥에는 십여 편의 주련(柱聯)이 걸려있어 운치를 더한다. 정사 서편으로 눈을 돌리면 5칸 규모의 관리사가 있다. 예전에는 중이 거처하면서 정사를 관리했다고 한다. 안채는 관리동과 붙어있는데 전체적으로 ‘ㅁ’자 형을 이룬다. 영월헌(迎月軒) 현판이 있는 대청을 가운데 두고 우 1칸, 좌 3칸의 방이 있다.

정사 마당에서 만난 황재선(변호사) 후손은 “본래 정사와 관리사는 담으로 분리되어 있었는데 최근 중수 과정에서 담이 없어진 것 같다”며 “정사는 강학 영역이고, 안채는 기숙 영역인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정사 서편 언덕에는 퇴계 선생과 금계 선생을 모신 욱양단(郁陽壇)이 있다. 정사 한 단 아래 있는 샘 성천(聖泉)은 바위틈에서 끊임없이 성수(聖水)가 솟구친다. 고려 초 왕건이 남행(936년) 시 풍기(등항성)에 왔을 때 이 성수를 마셨다는 전설이 전하기도 한다. 또 풍기 관아 아전이 이 물을 길러다 군수에게 바쳤다는 이야기도 있다.

금양정사 천장(天障) 구조
금양정사 천장(天障) 구조

금양정사 주인은 누구?

금양정사 주인은 황준량이다. 본관은 평해(平海)이고 호는 금계(錦溪)다. 1517년(중종12) 7월 지금의 풍기읍 서부3리(풍기인삼농협 서편)에서 태어났다. 재질이 남다르게 뛰어나 일찍 스스로 문자를 해독하였으며, 말을 하면 곧 사람들을 놀라게 하여 기이한 신동(神童)이란 칭찬을 들었다.

24세 때인 1540년 문과에 을과(乙科) 2인으로 급제하여 성균관 학유에 임용되면서 벼슬길에 올랐다. 1557년 단양군수 때는 이른바 ‘민폐십조소(民弊十條疏)’라 불리는 ‘단양진폐소(丹陽陳弊疏)’를 올려 20여 종의 공물을 10년간 감해 주는 특별한 은전을 받게 했다.

1560년 성주 목사(牧使) 때는 영봉서원과 문묘를 중수했다. 이즈음 금계는 고향 풍기에 금양정사를 지어 만년의 강학처로 삼으려 마음먹었다. 1563년 성주 목사 재임 중 병을 얻어 사직하고 귀향하던 도중 병이 더해져 3월 11일 예천(醴泉)에서 졸(卒)하니 향년 47세였다.

성천(聖泉)
성천(聖泉)

금양정사 창건 이야기

황준량의 생애 편에 보면 「1560년 성주 목사로 재임 시, 이즈음 고향인 죽령에 정사를 지어 만년의 강학처로 삼으려 했다」는 대목이 나오는 것으로 봐서 이때부터 공사가 진행된 것으로 추정된다.

퇴계와 금계는 사제지간으로 매우 돈독한 사이였다. 이 무렵 어느 날 경목(京木,궁궐木手)이 도산에 왔을 때 퇴계와 금계 그리고 경목은 도산서당 터를 함께 둘러보았다고 한다.

이때 금계가 경목을 보고 “이 사람아 여기 도산서당을 짓고 나중에 내 서당도 지어주게”라는 말을 했다는 일화가 전해지기도 한다. 금양정사는 금계 선생 사후 승려 행사(行思)가 선생의 유지를 받들어 역사를 완공하고 관리도 했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정사가 세워지기 전에는 성천암(聖泉庵)이란 암자가 있었고, 초막 띠집이 한 채 있었다는 구전이 전하고 있으나 기록은 없다. 이상의 기록과 구전을 종합해보면 금양정사의 완공(창건)은 1563년 어느 봄날일 것으로 추정된다.

금양정사 연못
금양정사 연못

1701년 홍경렴의 중수기

창건으로부터 1백수 십 년이 지난 후 1701년(숙종27) 풍기군수 홍경렴(洪景濂)이 지은 금양정사 중수기에 보면 「금계 황 선생은 이 고을 서부에서 나서 어려서부터 출중한 자질이 알려졌고, 자라서 퇴계 선생의 문하에서 빛나는 문장, 높은 도덕으로 퇴계 선생의 기대와 후생의 우러름이 두터웠다.

정사는 병자호란(1636) 때 화재로 소실되어 60여 년 뒤 금계 사손 성(垶, 금계의 7세손)이 나에게 와서 중건의 뜻을 밝혔다. 그 자리에 가서 본즉 골짜기가 깊고 조용하며 냇물을 안고 돌아 외지고도 산수가 아름다우니 실로 덕 있는 이가 거처할 만한 자리여서 금계라는 지명이 과연 헛되지 않음을 실감했다.

다만 옛터는 시원스럽고 전망은 좋으나 너무 가파르므로 오래 거처하기에는 마땅치 못할 듯 여겨져 그 곁에 아늑한 자리를 권했더니, 황생(黃生)이 그러기로 했다. 몇 달 뒤에 황생이 와서 ‘우선 옛 자리에 정사를 짓고, 또 물자를 마련하여 곁에도 짓겠노라’고 했다. -이하생략-)”고 적었다.

영월헌(迎月軒) 안채
영월헌(迎月軒) 안채

1791년 김약련의 상량문

2012년 금양정사 수리 과정에서 대들보 위 들보(서까래)에 쓰인 긴 상량문이 발견됐다.

1791년(정조15) 선성(예안) 두암 김약련(金若鍊)이 쓴 상량문에 보면 「선생께서 돌아가신 지 수 백 년이 되었지만 이름난 이곳의 풍광은 옛날과 같은데 후손들이 중수를 너 다섯 번 했으니 정사의 제도가 한결같이 새로워졌도다.

금계 선생께서 처음으로 이 몇 칸의 집을 지으셨으니 연원은 퇴계로부터이다. 좋은 경치는 명승지 풍기 땅에서 으뜸으로 차지했으니 이는 완연히 주자의 서재 고정(考亭)과 같도다.

지난 정묘년 가을에 옛날 제도를 넓혔지만, 집이 어둡고 답답함을 면치 못하여 계축년에 이르러서 증축했으니 지세가 기울었던 것을 바로잡은 것이다. 드디어 금년 봄에 다시 중건하는 역사를 시작했도다.

새로운 제도로 확장하여 변경하여 짓는 것은 정사가 주방과 이어진 것을 혐오해서이네. 옛날 네 칸을 지금 여섯 칸으로 하여 조금 변통을 두고 방을 우편으로 하고 청은 좌편에 두었으니 각기 여름과 겨울에 알맞게 하기 위함일세.

기와를 굽고 재목을 모으는 것이 뜻과 같이 아니 되는 것이 없었으니 신이 그것을 도운 것과 같았고, 기둥을 올리고 지붕을 얹은 것이 모두 다 새로워 소나무가 무성함같이 아름답게 되었도다.-이하생략-」라고 적었다.

2012년 정사를 보수한 ㈜양백의 김진식 대표는 “상량문이 쓰인 목재(서까래 모양)는 다시 제자리에 위치시켰다”고 말했다.

황재천 금계 종손은 “상량문 원문은 정조 때 문신 두암 김약련 선생이 적었으며, 대들보의 상량문 글씨는 당시의 종손(黃潤九)께서 쓰셨고, 번역은 강원대 황재국 교수가 했다”고 말했다.

근세에 이르러 1993년 금양정사 옆 욱양단소를 복원할 때 황병욱 종회장과 황천섭(도감) 종중의 주도로 중수했고. 2012-2020년 황한섭 종회장 주선으로 금양정사를 비롯한 관리사·안채 등 중수가 이루어졌다.

금계정사완문(錦溪精舍完文)

정사 벽면에 걸린 여러 편의 편액 중 가장 눈여겨봐야 할 편액이 ‘금계정사완문’이다.

이 완문은 금계 황준량(1517-1563)이 정사를 세우려 했던 일과 후에 짓게 된 경위에 대해 서술하고 있는데, 정사가 다 지어지기 전에 황준량은 세상을 떠나버렸고, 그 일을 함께하던 승려 행사(行思)가 유지를 받들어 정사의 건물을 완성하고 지켜왔다.

어느덧 세월이 흘러 속세의 관아에서 이 정사의 내력을 모르고 승려에게 온갖 잡일을 시켜 정사를 돌볼 틈을 주지 않았다. 이를 안타까이 여긴 퇴계 이황이 1566년(명종21)에 글을 지어 이 정사를 지은 본래의 뜻과 유래를 밝혀 고을 사람들에게 ‘잘 지킬 수 있도록 배려하라’고 당부하니, 그 후로는 승려는 정사 관리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고 한다.

퇴계는 완문 끝부분에 「나는 정사의 주인과 교분이 있는지라, 그 벗 마을을 지나는 길에 서글픈 심회를 견딜 길 없어, 정사가 길이 보전되기를 바라는 뜻에서 옛 일을 생각하는 정을 곁들여 감히 이렇게 부탁하노니, 이황은 두려운 마음이 든다.

가정(嘉靖) 병인(1566년) 2월 이황」이라고 적었다. 퇴계 이황은 당시 풍기군수 조완벽(趙完璧)에게 부탁해 이 정자에 대해 면역의 혜택을 주고, 이곳을 후학들이 공부할 수 있도록 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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