죽령 바람으로 넘어온 풍기 근대화, 골목마다 시름으로 울렸던 베틀소리

풍기로. 회색빛 지붕과 공터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주차장은 거의 인견 공장이었다
풍기로. 회색빛 지붕과 공터 그리고 새로 만들어진 주차장은 거의 인견 공장이었다
봉현 인견단지 ①봉현로타리 ②인견홍보전시관 ③인견판매단지 ④인견생산단지 ⑤풍기IC
봉현 인견단지 ①봉현로타리 ②인견홍보전시관 ③인견판매단지 ④인견생산단지 ⑤풍기IC

다시 한 번 바꿔야 한다. 변화의 주도권을 잡으려면 시장과 기술의 한계를 돌파해야 한다. - 이건희(2014년 1월 신년사)

풍기로는 봉현사거리에서 읍내 중심 오거리까지이다. 남원천교를 지나, 십자로에서 기주로와 만나고, 오거리에서 동성로와 동양대로를 만난다. 성내리 중앙을 지나는 이 길은 풍기 변화의 중심에 있었다.

인견 짜는 여공들
인견 짜는 여공들

살기 위해 시작한 베짜기

풍기로와 이웃한 골목길에 들어서면 어느 골목에서나 들리는 소리가 철꺼덕철꺼덕하는 기계음들이었다.

돌담 사이를 또 돌담 너머로 쉼 없이 나는 그 소리는 방직기가 돌아가는 소리였다. 돌담을 지날 때면, 세찬 풍기 바람이 흙을 다 날려버렸을까? 하며, 늘 그렇게 돌과 함께 바람을 생각했었다.

이 소리가 나기 시작한 것은 일제 때부터였다. 풍기에 온 사람들은 김소월 의 고향으로 잘 알려진 영변에서 온 사람들이 많았다. 오세창은 이들의 풍기로의 전입을 「풍기읍 정감록촌 형성과 이식 산업에 관한 연구」에서 이렇게 정리했다.

이들의 전입은 한일합방 이전에 9.9%, 일제 시에 19.2%, 해방 후에 70.9%가 이루어졌는데, 그것은 양반토족의 압정(壓政)과 주구(誅求)에 시달리던 구한말, 3.1운동·6.10만세사건이 있었던 1920년대, 만주사변과 중일전쟁이 한창이던 1930년대, 2차세계대전의 1940년대 그리고 6.25동란 시기 등 역사적 사건과 연결시켰다.

살아남기 위해 풍기를 찾아온 사람들은 가족들의 생계를 위해 베틀에 올랐다. 그들은 고향에서 항라(亢羅)를 짜던 기술을 토대로 성내동 일대에서 수직기(手織機)로 명사(明絲)를 짜기 시작했다.

족답기(足踏機)
족답기(足踏機)

방직은 풍기 근대화의 출발

풍기의 근대화는 이 소리로 시작했다.

“처음엔 쪽딱기였어, 여자들이 베짜는 기계에 앉아서 명주를 짰지.”

쪽딱기가 무언가 생각을 했었다. 그것은 발로 디디는 힘을 동력으로 하여 돌리는 족답기(足踏機)를 얘기하는 것이었다. 금계리 용천동에 사는 양재적 옹은 1944년에 왔다고 했다.

그래도 그때는 중앙선이 놓여서 오기에 좋았지만, 그 이전에는 소 구루마(수레)를 끌고 왔다고 했다. 평안도에서 황해도를 지나, 한강을 따라 충청도까지 오는 길은 그나마 괜찮았지만, 죽령을 넘는 일은 끔찍했다고 한다.

“아버님은 영변에서 학교 교장을 하셨는데, 동경에서 대학을 나온 분이셨어요. 그래서 독립투사들과 교분이 있어서 일제의 탄압에 늘 힘들기도 했지만, 미래에 대한 고민도 많으셨던 것 같았어요.”

아버님의 함자는 양원빈이라고 했다. 부친은 풍기에 와서도 이웃을 위해 많은 일을 하셨다고 한다.

용천동에 터를 마련하고, 집 뒤에 방직공장을 만들었고, 같은 일을 하는 사람들과 직물조합도 결성했는데, 그 일을 추진할 수 있었던 것은 당시 미군정청에서 물자행정처장을 지냈던 정일형의 도움도 컸다고 한다. 정일형은 정대철(전 국회의원)의 아버지인데, 동향(同鄕)이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 일은 학교 설립이었다. 풍기향교 터, 현 항공고등학교 운동장에 가건물을 짓고 중학교와 고등학교를 시작하였는데, 이는 풍기중학교와 풍기고등학교의 전신이다.

풍덕방직 앞 거리(1960년)
풍덕방직 앞 거리(1960년)

방직 기술의 변화

족답기(足踏機)를 돌리던 방직은 60년 즈음에 동력기를 사용하게 된다. 처음 시작한 분은 전구칠이었다고 한다.

도정공장처럼 발동기에 벨트를 걸고 기계를 돌리는 방식이었다. 이러한 변화에 큰 힘이 된 것은 1960년대 일본과의 외교가 시작되면서 일본의 기술과 자본이 투입되면서부터이다. 이때 인견이 시작되었다.

아직 족답 베틀기 두어 대를 가진 작은 가내(家內) 공장들도 있었지만, 수백 대의 기계들을 갖춘 큰 공장들도 생기면서, 멀고 가까운 지역에서 일터를 찾아온 직공들로 풍기를 붐비게 했다. 직공은 거의 소녀들이었다. 한창때는 2000여 명이나 되었다고 한다.

그래서 풍기가 ‘뭍의 삼다도(三多島)’가 된다. 제주도처럼 바람, 돌, 여자가 많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었다.

최대봉은 계간 『영주문화』에서 ‘그해 겨울’이란 제목으로 그 때의 상황을 이렇게 묘사한다.

“작업 교대시간이 되면 크고 작은 직물공장들에서 쏟아져 나오는 울긋불긋한 옷차림의 처녀들로 거리들은 갑자기 활기를 띄기 시작했다. -중략- 그 많은 청춘들이 읍내에 방을 얻어 자취를 하고 있었지만, 얇디얇은 월급봉투에 양장점이나 미장원에 갈 엄두를 내기도 쉽지 않았고 호사스럽게 외식을 하거나 유흥을 즐길 여유는 더더욱 없었다. 지금은 다 없어졌지만, 작은 읍내 시장 안에 하나, 남원다리 옆에 하나, 그렇게 극장이 두 개씩이나 있었던 건 그 때문이었다. 극장은 고달픈 공장 일과 시골에 있는 부모와 동생들 걱정에서 잠시나마 벗어나볼 수 있는 거의 유일한 공간이었던 것이다.”

소녀들의 고향집에는 늙고 병든 부모와 학비를 필요로 하는 동생들이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가족을 위해 희생을 하던 이들에게 큰 일이 생기게 된다. 그것은 실직이었다.

1969년 매일경제신문
1969년 매일경제신문

인견직물의 시련과 극복

“700여 종업원 실직”

1969년 10월 9일, 매일경제신문 기사의 제목이다. 30여개 공장이 경영난으로 휴업을 하고, 종업원 700여명이 실직을 했다는 내용이다. 당시 풍기직물조합 속의 90여개 공장에서 매일 45만여 마의 인견을 생산하였지만, 생산 단가가 올라 수지타산이 맞지 않기 때문이라고 밝히고 있었다.

1970년대 초까지만 해도 면 단위 1개 이상 양복점이 있던 시절이었다. 그 양복점에서 사용하는 안감을 80% 충당하고 있었기에 그 충격은 더 컸을 것이다.

그 직공도 직공이지만, 지역 산업은 더 문제였다. 그래서 대형화를 고민하게 되고, 그 타개책은 봉현에 인견생산단지를 만들어 새로운 활로를 모색하는 것이었다.

허물어진 인견공장
허물어진 인견공장

 

여공들이 자취하던 공간(성내리 185번지)
여공들이 자취하던 공간(성내리 185번지)

웰빙인견에서 예술 인견으로

그저 양복 안감으로 생산하였던 인견을 ‘차가운 냉감성, 부드러운 촉감, 친 인체적 섬유’라는 광고를 하며 속옷을 만들어 낸다. 그리고 더 나아가 여성들의 외출복을 만들면서 ‘휘둘옷’이란 용어를 사용하게 된다. 휘둘옷이란 ‘휘몰아치는 시원한 바람 같은 옷’이란 뜻이다.

그리고 ‘풍기인견 예술로 입히다.’란 기획으로 패션세계에 도전을 하면서, 축제에서 패션쇼를 연다. 또 2010년에 프랑스 파리에서 풍기인견패션쇼까지 열게 된다. 프레타포르테 친환경 패션박람회에 참가하며 이루어진 이 일은 풍기인견과 최복호 패션디자이너의 만남이었다. 여기서 인견의 고급화를 이루었다는 평가를 받으며, 좋은 반응을 얻었다.

인견 가게
인견 가게
천연염색 페스티벌
천연염색 페스티벌
천연염색 페스티벌
천연염색 페스티벌

 

하지만 아직도 어려운 상황이라고 한다. 대기업과 경쟁은 불가피한 일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나무에서 추출한 친환경 웰빙섬유인 ‘풍기인견’은 최근 웰빙트랜드와 폭염으로 국내에서 폭발적 인기를 구가하고 있다.

이 바람을 타고, 원단제직에서부터 디자인, 패턴, 염색, 봉제, 마케팅기법에 이르기까지 다시 한 번 돌아보면서, 풍기인견을 세계적 명품브랜드로 육성해가는 일에 모두 힘을 보태야 한다고 입을 모은다.

봉현로터리와 봉현교차로 사이에는 인견가게들이 즐비하다. 풍기바람으로 이 가게들이 훨훨 날기를 기대해 본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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