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0년을 가꾼 정원 금선계곡, '삶과 꿈이 조화로운 금계로'

1 금선정, 2 사거리, 3 금계바위, 4 쇠바리마을, 5 구 향교터, 6 풍기향교, 7 인삼조합, 8 굴다리, 9 지하차도
1 금선정, 2 사거리, 3 금계바위, 4 쇠바리마을, 5 구 향교터, 6 풍기향교, 7 인삼조합, 8 굴다리, 9 지하차도

관(官)은 백성을 근본으로 삼아야 하는데 여러 폐단 때문에 우리 백성이 살아갈 수 없으니 어떻게 관아라 할 수 있겠느냐”-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

금계로는 동양대로와 중앙선이 만나는 삼거리에서 삼가로와 동양대로와 교차하는 사거리와 금선정 앞주차장을 지나 금계저수지(삼가지)에 이르는 길이다. 이 길은 1920년대 신작로로 만들어졌는데, 1979년 금계지가 착공하기 전까지 삼가리로 가는 주통로였다.

굴다리
굴다리
재미있는 벽화
재미있는 벽화

철길이 가른 마을

금계로의 끝지점인 삼거리쯤에 풍기읍성의 북문이 있었다. 이 문은 순흥부로 가는 사람들이 주로 드나들었을 것이다. 지금은 지하차도가 생겼지만, 예전엔 건널목이었다.

그리고 차를 몰고 통과할 때는 자기도 모르게 목을 움츠리곤 했던 굴다리는 북쪽 사람들이 가장 많이 다녔던 길이다. 그런데 허물고 있다. 새로난 철길에서는 길이 넓혀지는 모양이다.

철길이 나눈 밤과 북. 마을도 아래위로 나누었지만, 6,70년대쯤에는 북쪽이나 남쪽에 사는 아이들이 반대편 마을에 가면, 괜히 움츠러들게 했다. 그래서인지 학교도 남과 북에 따로 있어야 했다. 초등학교도, 중학교도 동서로 갈리지 않고 풍기에선 남북으로 갈랐다. 삶의 형태도 달랐다. 남쪽엔 시장이 있었지만, 북쪽엔 논과 밭이나 있을 따름이었다.

인삼 경작지
인삼 경작지
인삼가공 작업장(1950)
인삼가공 작업장(1950)

풍기인삼이 시작된 곳

굴다리를 지나면 가장 먼저 만나는 큰 건물이 풍기인삼농협이다. 넓은 주차장 한쪽에 두 개의 큰 기념비가 있다. 하나는 ‘문민공 주세붕선생 송덕비’이고, 또 하나는 ‘풍기인삼 협동조합 창립백주년 기념비’이다.

풍기 가삼재배는 500년 전 주세붕 군수로부터 비롯되었지만, 풍기 인삼재배는 100년전 이풍환에 의해 새로운 전기를 마련하게 된다. 그래서 풍기 사람들은 이풍환을 ‘풍기 근대사의 선구자’라고 말한다.

이풍환은 1900년대 초에 개성에 살다가 풍기 금계리로 이주해 온다. 그 이유는 어머니의 고향(욱금, 평해 황씨)이기도 했지만 인삼에 대한 특별한 관심 때문이었던 것으로 알려지고 있다.

그래서 금계리 사람들은 2011년 풍기인삼이 시작된 곳을 돌아볼 수 있는 ‘풍기인삼개삼터길’을 만들었다. 금계1리 마을회관에서 출발하여, 이풍환이 살았던 쇠바리와 황준량의 금선정, 금계지, 잔밭골, 용천동, 설맥이들을 거쳐 출발지로 돌아오는 7km거리이다.

쇠바리마을을 내려다 보며
쇠바리마을을 내려다 보며
풍기향교
풍기향교
풍기공민중학교 개교기념(1948년)
풍기공민중학교 개교기념(1948년)

예부터 배움터였던 교촌동

인삼조합에서 풍기북부초등학교를 지나면 경북항공고등학교가 있고, 그 뒤편이 풍기향교이다.

원래 금계1리 임실(任實)마을 뒤편 기생골에 있었는데, 중종 37년(1542년) 군수 주세붕이 지금의 자리로 옮겼다가 숙종 18년(1692년) 다시 옛 자리에로, 그리고 후 영조 11년(1735년) 또 다시 지금의 자리로 옮겨 오늘에 이르고 있다. 그리고 풍기의 근대 교육도 이 향교에서 시작되어 이채롭다.

풍기향교 주변에 큰 마을이 있는데, 향교 옆에 있다 하여 ‘향교마’라 불러오고 있다. 조선시대 향교는 선비들이 공부하는 곳이기도 하였는데, 인근 동양대학교 학생들이 이 마을에 기숙을 하고 있어 옛날이나 지금이나 학생들로 북적대고 있다. 교촌리 답다.

개삼각
개삼각
금선정
금선정

금계바위(金鷄巖)와 금선정(錦仙亭)

금계바위는 샘밭골 삼가교 다리에서 개울을 따라 약 300m쯤 가면 왼편으로 긴 골짜기가 있고, 그 골짜기 높은 곳에 커다란 바위 봉우리가 있는데, 마치 닭 형상과 같다 하여 ‘금계바위’ 라 불러오고 있다.

바위 닭의 눈에 빛나는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어떤 이가 보석이 탐나서 바위에 올랐다가 벼락이 떨어져 죽고 말았다는 전설이다. 과거나 현재나 욕심이 불행인 것은 같은 모양이다.

금선정은 금계2리 마을회관에서 상류 계곡 방향으로 약 400m쯤에 있는 높다란 반석[錦仙臺] 위에 세운 정자이다. 금계지가 만들어지기 전까지는 여기서부터 삼가리까지 솔숲과 바위로 이어진 10리 길은 자연과 하나가 되는 아름다운 계곡이었다고 한다.

금선계곡
금선계곡
계양정과 소나무
계양정과 소나무

그래서 ‘금선계곡’은 인근 학교마다 매년 소풍을 올 정도로 지역인들에게 사랑받는 계곡이었다. 이 뒷산 중턱엔 조선 명종 20년(1565년)에 황준량(黃俊良)이 세운 ‘금양정사(錦陽精舍)’가 있다.

현재 이곳을 지키고 있는 황재천(65세, 금계종손)씨는 “풀은 소에게 먹이고, 갈비는 땔감으로 쓰면서 자연스럽게 이 숲을 지켜오지 않았을까요?”라며 마을 사람들이 가꾼 500년이 된 정원이라고 강조한다. 그 이면엔 이제는 풀도 깎아줘야 하고, 갈비도 끌어줘야 하는 세월이 되었다는 안타까움이 묻어있다.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조선 정조 5년 군수 이한일(李漢一)이 금선정을 지었다.’고 하는 인터넷에 떠도는 내용이다. 박손경이 쓴 건립 기문인 ‘금선정기’에는 후손들에 의해 지어진 것으로 기록되어 있어 바로잡아야 할 듯하다.

금선정(1952)
금선정(1952)

금계들의 젖줄인 금계천

조선시대 금계천을 ‘북천(北川)’이라 하였다고 한다. 그러고 보니 풍기엔 북천과 남천이 있는 셈이다. 요즘 북천을 금계천으로 남천을 남원천이라 부른다. 예전 사람들에게 물길은 참 소중했다. 길도 하천 따라 나는 경우가 많았지만, 하천을 막아 보(洑)를 만들어 들에 물을 대는 것은 더 농촌에서 가장 필요한 일이었다.

금계천 주변엔 지금도 보가 많다. 그 중에 등두들 마을 뒤편 산 아래에 삼가리에서 내려오는 보를 ‘개보’라도 하는데 전설까지 있다. 이 들은 개울 보다 높은 곳에 위치하여 논에 물을 댈 수가 없었다고 한다.

그런데 눈이 오는 날, 개가 주인의 바짓가랑이를 물고, 꼬리에 물을 묻히면서 주인을 이끌어, 따라가 보니, 보를 만들면 쉽게 물을 댈 수가 있어 보였다 한다. 그 후 여기에 보를 만들고, 개의 안내를 받아 만든 보라 하여 그렇게 부른다는 것이다.

보는 들에 물도 댔지만, 보가 끝나는 곳에 물레방아가 있었다. 방앗간은 농촌에서 꼭 필요한 것이었다. 그리고 동네마다 이곳을 배경으로 많은 이야기를 만들어 내기도 하였다. 금계리에도 물레방아가 있었다. 금선정 입구사거리에서 금선정 사이에 있었는데, 아직도 그 흔적이 있다. 그래서 사거리에 물레방아를 만든어 논 모양이다.

보가 시작되는 곳, 금계지 아래
보가 시작되는 곳, 금계지 아래
옛 보의 흔적
옛 보의 흔적

금계로 뒷길

금계천을 따라 걷다가 동양대학교 앞에서 장호교 다리를 건넌다. 향교마을노인회관 앞을 지나, 원룸 사이를 걷다보면 길이 잘 나있다. 금계로 64번길과 10번길에서 망설이다가 10번길을 선택했다. 이 길이 더 오래된 것 같아서이다.

반쯤 허물어진 집도 있다. 이 집은 참 재미있다. 벽과 담이 하나다. 반쯤 무너진 담 속에 벽이 드러나서 알 수 있었다. 몇 걸음 더 가니 벽화가 더 재미있다. 수학기호도 있고, 세계지도도 있다.

그런데 허물어진 집이 머리를 떠나지 않는다. “이제 허물어지면 끝이야!”라는 소리가 뒤통수를 자꾸 치는 것 같다. “하˜.”

김덕우 작가

물레방아가 있던 자리
물레방아가 있던 자리
사거리 물레방아
사거리 물레방아
주세붕 송덕비
주세붕 송덕비
100주년 기념비
100주년 기념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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