송지향의 소백산탐승기(小白山探勝記) ③

소백산탐승기 풍기지국-송지향
소백산탐승기 풍기지국-송지향

깊은 산곡 울리며 쾅쾅 떨어지는 희방폭포 소리 온몸에 소름
폭포 옆 백인단애(백길 벼랑)를 등반(登攀)하여 희방사에 도달
희방사 소장 훈민정음, 월인천강곡 판본·경판은 이 절의 보물

유계일기(영주문화유산보존회, 2016) 서문(序文)을 쓴 금장태(琴章泰) 서울대 명예교수는 “1990년 가을 학생들을 인솔하여 경북지역 답사를 가는 길에 학생들에게 선생의 높은 인품과 식견을 직접 느낄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었다.

금계동 현장에서 학생들을 만난 선생은 학생들의 쏟아지는 질문에 물 흐르듯 설명하실 때 그 해박함과 자상함에 학생들은 깊은 인상을 받았었다”며 “선생께서 23살 때인 1940년 6월에 쓴 ‘소백산탐승기’가 그해 7월 조선일보에 일주일간 연재되었다는 사실은 문학청년으로서 그의 문재(文才)가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보여준다”고 적었다.

1940년 7월 희방폭포 모습(송지향 촬영)
1940년 7월 희방폭포 모습(송지향 촬영)

희방계곡-희방폭포

이어지는 탐승기는 1940년 6월 20일 죽령을 출발하여 최근(1939-40) 개척한 희방계곡 자동찻길을 구경하면서 편리함과 그에 따른 폐해에 대해 알아보고, 희방폭포 옆 절벽을 기어올라 희방사에 도달하는 이야기다.

「소로로 접어들어 조금 올라가니 조고마한 초막이 잇는데 처마밋테 석유상자 우에 ‘싸이다’며 ‘맥주’ 과자 등 속을 늘어노흔 것이 보아하니 탐승객을 상대로 장사하는 집인가보다. 집잇는데서 열걸음도 체못올라가서 길이 두갈래로 난흐엇는데 한갈래는 왼편 산림 속을 뚤코 영우로 오르는 길이요. 한갈래는 바른편 시내를 따라서 산모퉁이를 돌아서 골짜기로 들어갓다. 바로 분기점에서 ‘폭포는 우로, 사원은 좌로’라는 지로표가 서잇다.

여기서부터 삼림은 더욱 무성하고 게곡은 점점 가경(佳境)으로 들어선다. 갈수록 절묘해가는 게곡에 심취되어 가는줄 모르게 한참 올라가다가 조그마한 모퉁이를 돌아도니 넓즉한 동천(洞天)이 환하게 열리면서 전산체를 흔들 듯 우렁찬 소리가 들린다.」

희방폭포와 하늘다리(현재모습)
희방폭포와 하늘다리(현재모습)

장엄하고 신비로운 희방폭포

「몃걸음 더 들어가니 사방이 절벽으로 둘러잇고 겨우 한모퉁이에 적은길이 열렷는데 절벽에 창창한 수림이 더피고 그 서쪽에 백여척이나 되는 폭포가 하늘우에서 내려질린다.

기픈 산곡을 울리며 쾅쾅떨어지는 소리가 무섭게 급한형세로 떨어지는 그모양. 날리는 물안개의 찬가운 그 한업시 기쁜듯한 못의 파-란 물빗은 몸등에 소름을 끼치게 한다.

못의 검푸른 수면에는 폭포가 내려짓는통에 뽀얀 안개가 생겨서 수면이 보이지 안타가 얼마후에 일어나는 찬바람에 그안개가 거치어 전보다 더욱 무섭게 검푸른 수면이 들어나는때는 온몸에 소름이 쪽쪽 끼친다. 이 밋티안보이는 기픈소 영원히 거치지 안는 안개, 언제나 쉬지 안는 요란한 소리는 진실로 장엄과 신비의 극치라 안흘수 업다.

폭포의 양두던에는 치어다만 보아도 정신이 아득해지리만큼 현기가 나는 깍가질은 백인단애(백길벼랑길) 가물 아득한 깍긋듯한 벽끗테 신기하게 나선 노송나무의 줄기들이 청풍이 불어올 때마다 버더나간 가지를 너울너울 흔드는 형상은 마치 폭포소리의 음악을 들으며 제흥에 겨워서 활개춤을 추는 듯하다. 우리는 형언랄바업는 신비한 경게에 나를 이저버리고 서로 아모말도 업시 입이 버러질뿐이요 눈이 현랄할뿐이다. 계속 1940.7.7.토」

1940년 희방사 모습(송지향 촬영)
1940년 희방사 모습(송지향 촬영)

벼랑을 기어올라 희방사에

「우리는 숭엄하고도 신비스러운 절경에 취하여 정신을 일코 잇섯다. 파-란 수면에서 일어나는 물결이 요란스러히 부디치는 바위우 푸른벽에는 위태히선 노송이 쭉쭉 뻐더나간 가지에 선녀의 옷처럼 수업는 송락타레가 느리워저 바람을 따라 그네를 뛰고잇다.

이런 미관을 보고 잇슬지음에 폭포의 우편기슭 나는 새라도 발부치기 힘들 듯한 벼랑우를 살살 기어나려오는 십이삼세쯤 되어보이는 청의동자가 잇다. 올려만보아도 현기증이나고 가슴이 조마조마하여 숨이 박힐 지경이엇다. 동자는 무사히 내려와서 우리아페 합장하고 고개를 숙여 공손히 예를 한다. 우리도 일어나 답례를 하고 우리가 안즌 바위 한편 쪽에 안기를 권했다.

절벽을 내려온 재조를 칭찬했더니 동자는 천진한 얼굴에 귀염성 잇게 미소를 지으며 이러케 올려다보기보다는 실지로 올라가보면 그다지 위험친 안타고 하면서 우리에게 함께 올라가기를 권했다. 이것이 히방사에 가는 가까운 길이라 한다. 우리 일행도 젊은 피가 발라하게 흐르는 청년들이다.

모두들 일대 모험을 한다는 호기심에서 등산대를 지고 일어선다. 그 중에서도 가장 겁이만은 필자가 주저햇스나 십리나되는 밀림속을 돌아 들어가기도 실을뿐더러 K군이 구지 함께 올라가기를 간청함으로 업는 용기를 내어서 뒤를 딸어섯다.

동자를 압세운 우리 일행은 바위ㅅ 벽을 혹은 안고 혹은 지고 오루다가 어떤 데서는 바위 새에 나선 나무뿌리에 매달려 오루고 이리하여 절정에 거의 다달앗슬 무렵 문득 발아래를 굽어보니 급한 형세로 떨어지는 물기둥이 까마득하게 내려다보이는 심녹색 수면을 간단업시 내려씨울 때 거기에서 일어나는 거센 파문과 끌어오루는 듯한 물거품 뽀하얀 안개… 신경이 아찔해지며 몸둥이 조차 물줄기를 따라 아득한 벼랑아레로 떨어지는 듯하다.

정상에는 넓즉한 반석이 깔려잇는데 길이가 대략 칠십미터 넓이 삼십미터 가량이며 양언덕에 도리운 절벽까지도 폭포를 일운 단층면과 한덩이 바위로 되어잇고 양안에는 뭉트러진 나무가 엉성하게 서잇서서 실로 절승한 경게를 일우엇다.

웃옷을 활활벗고 깨끄치 씻고 그늘진 반석우에 사지를 뻣고누어 하늘을 찌를 듯 아득히 소슨 연화봉에서 여러 가지 모양을 그리며 탐스럽게 피어오르는 구름을 바라보니 몸을 머물은 곳이 영경이요 눈이 비치우는 것이 신선나라인 듯 귀에 들리는 새 소리도 신선의 음악이었다.

반석이 다하는 곳에서부터 울창한 잡목나무가 나선다. 잡목림 우거진속을 뚤코 흘으는 시내를 따라 돌길을 올라가노라니 안골자기에서 범종이 울어 은은히 들려오는 것이 무량대법(無量大法)을 말하는 듯하다.」

현재 희방사 모습
현재 희방사 모습

고색 창연한 희방사

「수풀을 지나서 조그마한 언덕을 오루니 연화봉남쪽을 등지고 동량(棟樑)에 장식햇던 단청퇴색한 고색창연한 히방사원(喜方寺院)이 즐비하게 나타난다.

서쪽에는 연화봉과 노피를 다토는 듯 하늘에 다은 신선봉(神仙峰)이 엄연히 소삿고 신선봉에서 남쪽으로 뻐더내려가던 산맥이 히방사아페 이르러서는 휘우듬이 동쪽으로 굽어서 히방사 아페 놉즉이 성을 둘으고는 폭포서안에서 머저버렷다.

연화봉에서 버서나린 남쪽맥은 절동쪽을 둘러싸혀 퍽도 안윽하게 생겻다. 뜰압 돌층대를 올라서니 회색장삼을 입은 운암화상(雲庵和尙)이 합장하고 마저준다. 짐을벗고 마루에 오르니 오후 세시이다. 사적도 뒤저볼겸 피로에 지친몸도 좀 쉬기 위해 오늘 밤은 히방사에서 지나기로 했다.

히방사는 지금으로부터 일천이백구십칠년전 신라선덕여왕 게묘(癸卯西紀六四三)에 두운조사(杜雲祖師)가 창건한 사찰로서 사적에 의해 보면 이절 창건의 동기에 대해 매우 신비스러운 신화적 유서(由緖)가 적혀 잇스나 너-무 호빈하여 쓰기를 피하게 되는 적지안흔 유감이다.

월인석보와 훈민정음 경판

「그런데 다른 곳에서 차저볼수업는 이절 특유의 지보적 존재 두가지가 잇스니 그것은 순 조선문학의 시작이라헐 훈민정음 원본판과 월인천강곡 석보판본 상하권 한질이 잇는 것이다.

이것은 전 조선내에서 히방사 유일의 종보라고하는데 다못 일절에 그 유래를 참고할만한 문헌이 업고 사적기라고 잇대야 내용이 매우 불충분하여 이 경판은 누구의 제작인지도 알수업고 제작된 연대도 미상인데 둘다 세종때 일러진것이라고 전한다. 극락전 중앙 아미타불좌상을 모신 탁자뒤에 그 감아케 올려보이는 드노픈 천정에 닷토록 치싸혀잇는 경판더미가 잇다.

보야케 내려안즌 몬지를 조심스레 쓸고 채루싸하노흔 경판을 뒤저보니 모두가 법화경(法華經)등 순한문 경판이요 좌측에 두열이 월인석보(月印釋譜)와 훈민정음(訓民正音)판인데 매우 조각한 기교가 묘하다. 우리하여금 정못내 통한케하는 것은 훈민정음판이 십사매가 겨우 보존되고 그 외는 전부 유실된 것과 월인석보판이 이매가 유실된 것이다. 게속 1940.7.8.」

희방사에서 연화봉으로

탐승대는 희방사에서 1박하고 연화봉을 향해 출발했다. 「산사의 하로밤 꿈을 평온히 맷고나니 역시 하늘은 쪽을 푼 듯이 파라케 개여잇다.

아침 해빗치 우리의 압길에 잇는 승경에서 바들 기쁨을 알려주는듯한 유월 이십일일 아침 여섯시 히방사 뒤 서편 골작으로 들어서니 잡초가 욱어진 속에 천혜에 고찰이 들어잇든 듯한 사지(寺址)가 잇고 석축을 싸흔 끗테 두 개의 부도가 가즈런히 서잇다. 여기서부터는 낙엽송(익갈나무)이 울창히 욱어진 속으로 흐르는 게류를 따라서 한오리 가량이나 들어가게 된다.

시내를 버리고 왼족으로 꺽거 비탈을 잡아드니 언덕은 그다지 급하지 안코 또한 순순한 토산으로 되어잇서서 오르기가 그리 고되지 안타.

밧가치 꽉 들어섯던 밀림이 차츰 엉성해지면서 연화(蓮花) 신선(神仙) 양봉 사이의 잘누막이를 지나 영우에 거의 올라서부터는 간간히 허리굽은 교목이 서잇고 잡초가 길이넘게 욱어진 즐펀한 초원이다. 영우에서 발아래를 굽어보니 끗업는 수해(樹海)로 멀리 북쪽으로 만학강(晩鶴江) 줄기가 마치 한폭 비단을 깔어 노흔듯하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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