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 큰 삶을 찾아가는 관문도시, 아직은 가슴 속에 남아있는 길

풍기 시가지
풍기 시가지

희망은 볼 수 없는 것을 보고, 만질 수 없는 것을 느끼고, 불가능한 것을 이룬다. - 헬렌 켈러

기주로의 기주(基州)는 고려 시대 풍기의 옛 지명에서 따온 이름이다. 이 길은 백리교차로에서 출발하여 풍기약초시장 앞에서 소백로와 만나는 풍기의 중심길이다.

그리고 동성로는 동부리와 성내리를 지나는 길이어서 붙여진 이름인데 풍기청년회의소 앞 인삼로에서 출발하여 동양대로와 풍기로와 만나는 오거리를 지나 성심요양병원 앞에서 소백로와 만난다.

풍기 관아터
풍기 관아터

 

유다리에서 본 옛길
유다리에서 본 옛길

관문도시(關門都市) 풍기

남원천교(1952년)​남원천교(1952년)
남원천교(1952년)​남원천교(1952년)

경상도는 죽령(竹嶺)과 조령(鳥嶺) 두 고개의 남쪽에 있으므로 영남(嶺南)이라 부른다.

길도. 좌도(左道) 길과 우도(右道)길이다.

그런데 두 길은 나름의 차이가 있었다. 남해, 진주, 대구, 문경 등 우도를 통과하는 길이 물류가 중심이 되었던 길이라면, 동래, 경주, 안동, 순흥을 통과하는 좌도는 정신이 중심이 되는 길이었다.

죽령을 통과하는 첫 번째 고을이 풍기였다.

풍기는 영남의 선비를 서울로 보내는 마지막 장소였고, 서울에서 오는 관리들을 맞이하는 첫 고을이었다. 아마도 옛날엔 죽령을 넘어 창락역에서 풍기를 지나 창보(창진, 영주)로 가거나, 죽동역(순흥)을 갔을 것이다.

하지만 이 길은 국권침탈 이후 많이 변하게 된다. 우마차(牛馬車)나 다닐 수 있을 정도의 길이 찻길로 바뀌게 된다. 신작로(新作路)였다. 영주 중심길인 국도 5호선의 경우 1920년에 시작하여 1926년에 개통한다. 이때 풍기의 길이 현재의 모습으로 거의 정착이 되었는데, 풍기는 영주에서 길의 중심이었다.

영주로 가는 길은 물론이고, 순흥과 부석으로 가는 길, 봉현에서 예천으로 가는 길이 풍기에서 갈라졌다. 더구나 1942년 중앙선이 개통하기 전 기차를 타기 위해서는 히티재를 넘어 예천으로 가서 기차를 타고, 김천을 거쳐 서울로 가야 했다.

풍기면사무소
풍기면사무소

영풍간 자동차 개통

“경북 자동차 주식회사에서는 동도(同道) 영주 읍내에서 동군(東郡) 풍기면까지 운전허가를 수(受)하야 거(去) 10일부터 개통 중인데, 임금은 80전이라더라.”-조선일보 1924. 1. 19. 『일제강점기 영주』 재인용

이 책에서 저자인 김인순은 80전을 당시 쌀로 환산하면 쌀 반 가마니였다고 밝히고 있다. 이 무렵부터 풍기에서 남원천교는 주요한 통로가 된다.

그리고 죽령에서 오는 길은 유다리 쪽으로 온다. 30년쯤 전에 송지향선생을 모시고 유다리를 살핀 적이 있었다는 김경진씨(66세)는 당시 안식일교회와 소방서의 중간쯤에 돌다리가 도랑에 비스듬히 걸쳐져 있었다고 회상을 한다.

풍기 주재소(1930년대)
풍기 주재소(1930년대)

현재의 자리는 거기서부터 5m쯤 위쪽에 다시 만든 셈이다. 아직도 옛길의 흔적은 있다. 안식일교회 옆으로 돌아 엘림건축 뒤로 가는 오솔길이 그 옛길이다.

그리고 재미난 장소는 서문거리이다. 서문거리는 풍기읍성의 서문 앞으로 난 길이란 의미이다. 김석진씨(74세, 전 풍기초등학교 교장)는 “이곳은 재인촌이었는데, 집들이 참 허술했어요.

1970년대였을 겁니다. 풍기로 들어오는 길목이어서 외관이라도 벗듯 하게 보이려고 길가에만 현재 모습으로 치장을 했어요.” 한다.

문득 1972년이 떠올랐다. 서울에서 남북적십자회담이 있던 해였다. 어느 날 청계천 판자촌 앞에 큰 벽을 만들기 시작했다. 북한 기자들에게 혹 보일까 가리기 위함이었을 것이다. 북한 대표들이 오던 날 종례시간이었다.

담임선생님을 오늘 밤엔 불을 환히 켜는 것이 애국하는 길이라고 했다. 그날 우리는 항상 깜깜했던 31빌딩을 구하려고 종로2가로 갔다. 31층까지 불을 밝혀주고 있었다. 참 살기 힘들었던 시절, 우리는 전기를 넉넉하게 쓸 정도로 잘 산다고 그렇게 과시를 했다.

풍기행정복지센터
풍기행정복지센터

풍기의 중심 성내리

성내리는 풍기읍성의 안, 그래서 성내(城內)이다. 풍기초등학교와 서쪽 담에서부터 동부교회 안쪽 담까지이다. 하지만 성의 흔적은 거의 없다.

동부교회 마당가에 쌓여 있는 돌무더기가 성벽을 쌓았던 유일한 흔적이다. 그리고 성은 언제 없어졌는지 잘 알 수가 없다. 성의 지휘소였을 관아의 자리는 작은 공원으로 조성되어있다.

콘크리트 기둥이라도 남겨 준 덕에 자리만 확인할 수 있다. 조선의 관아는 1914년 풍기면사무소가 되었다가 1973년 읍사무소가 되었고, 현재는 남원천 옆으로 옮겨지었다. 늙은 은행나무가 역사를 지키고 있는 셈이다.

길가만 번듯한 서무거리의 주택
길가만 번듯한 서무거리의 주택
동부교회 옆 성의 흔적
동부교회 옆 성의 흔적

새로 지은 풍기읍행정복지센터 뒤편에 의미 있는 누각이 지어졌다. 제운루(齊雲樓)이다. 700여 년 전인 고려 공민왕 때 지어진 것이었다고 한다.

하지만 일제가 1936년 매각한 것을 풍기읍민들의 마음으로 공원산에 다시 건립하고, 1957년 장마에 무너진 후, 두 개의 현판만 보관하다가 1919년 풍기읍사무소 옆에 다시 짓게 되었다고 한다. 참 기구한 운명이다.

옛터를 지키는 은행나무
옛터를 지키는 은행나무
은행나무 앞 신사참배
은행나무 앞 신사참배

풍기 사람들의 삶의 터전 중앙시장

관아터에서 기주로로 나선다. 이쯤 제운루가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오른쪽에 옥사(獄舍)가 있었을까? 풍기파출소가 거기에 있기에 한 번 생각해 본다. 왼쪽으로 신호등 사거리를 지나면 중앙시장이다. 예전에는 명동 같았다고 한다. 그만큼 붐볐다는 얘기일 거다.

순흥이나 부석 사람들에게 지금 영주로 바로 통하는 찻길이 생겼지만, 예전에 풍기를 통하지 않고는 영주가 아니라 어디로 갈 수가 없던 시절이었고, 풍기역은 대처로 나가는 또 하나의 관문이었다.

풍기극장
풍기극장
풍기극장 지붕 모습이 보이는 민속떡집
풍기극장 지붕 모습이 보이는 민속떡집

 

중앙시장을 돌아보다가 지난달 모 방송에 나와서 더 유명해진 떡집을 찾았다. 몇 사람이 분주하게 떡을 만들고 있었다. 보기만 해도 남달라 보인다. 여기 찹쌀떡은 빛깔이 곱고 당도가 높아서 단골손님들이 많다고 한다.

찹쌀떡을 사서 나오다가 떡집 간판 위로 둥그런지붕이 보인다. 풍기극장이었다. 아직 건물은 그대로 있는가 보다.

성내 사거리
성내 사거리
정도너츠
정도너츠

다시 동성로 쪽으로 간다. 여기서 풍기중학교 쪽으로 가는 동쪽 길은 소전거리였고, 순흥 통로로 가는 북쪽 길은 싸전이었다고 한다.

풍기중학교 너머에 우시장이 있었고, 순흥 통로 가는 맞은편 길에 쌀 파는 곳이 많았다는 것일 거다. 하지만 몇몇 집으로 싸전의 명색을 유지할 뿐이다.

다시 오거리 쪽으로 나선다. 풍기의 가장 중심이다. 정도너츠 가게가 보인다. 십여 년 전에 풍기에만 오면 저 집에 들러 도넛을 사곤 했었다.

이젠 전국 가맹점을 열고 있으니 대단하다. 중앙시장이 예전처럼 북적거리지는 않지만, 새롭게 도전하는 모습들이 참 좋아 보인다. 제2, 제3의 정도너츠와 민속떡집이 계속 만들어 지기를 기대해 본다.

김덕우 작가

제운루
제운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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