숨겨진 보물을 찾아서[31] 송지향의 소백산탐승기(小白山探勝記) ②

도솔봉에서 내려다 본 만학천봉(萬壑千峰 현재모습
도솔봉에서 내려다 본 만학천봉(萬壑千峰 현재모습

도솔정상 산신당에 안개자욱, 만학천봉 내려다보며 벤또 헤쳐 점심
불그레한 금빛노을 보며 죽령에 도착, 여사(旅舍)에 행장 풀고 1박
도솔정상-밀림지대-면양목장-죽령1박-신작로-수철리-차도-희방계곡

지난호에 나간 ‘송지향의 소백산탐승기’를 읽고, 시인이며 안동문화원향토사연구위원·문화원부원장인 정광영 선생이 짧은 글을 보내왔다. “송지향 선생은 영주 출신이지만 안동과의 인연도 각별하다. 늘 한복을 입고 머리를 기르고 자주색 가방을 들고 다니는 단정한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안동에는 조선 중기에 발간한 『영가지』와 『선성지』가 있지만 당시의 생활상을 아는 데는 늘 부족함을 느꼈는데, 1983년 송지향 선생의 역작인 『안동향토지』가 발간되었다. 안동지역 곳곳을 발로 누벼 써 지금도 『안동향토지』 만한 읍지를 찾아보기 힘들다.

소백신탐승기 풍기지국 송지향
소백신탐승기 풍기지국 송지향

안동의 역사와 현대사를 공부하는 사학자들은 『안동향토지』를 금과옥조로 참고하고 있다. 이번에 영주시민신문에서 연재하는 송지향 선생의 초기 활동의 하나인 ‘소백산 탐승기’를 재미있게 보고 있다. 그분의 또 다른 모습을 볼 수 있는 좋은 기회를 제공해 주심에 감사드린다”고 썼다.

또 한 분이 감사의 글을 보내왔다. 아동문학가이시고 영주시의원을 지내신 김희자(전 초등교장) 선생은 “송지향 선생의 ‘소백산 탐승기’를 읽고 잠깐 생각이 잠겼다”며 “수려한 필체와 섬세한 관찰력 오묘한 표현력 등 타고난 재능에 감탄하였다. 그 어려운 시기에 몸소 실천한 숭고한 정신에 숙연해짐을 느낀다.

23세의 젊은 나이에 소백산을 2박 3일 동안 답사하고 그 탐승기를 신문에 게재하여 전국에 영주 소백산의 이미지를 전하셨다. 또 우리 고장의 소중한 것들을 모두 모아 후손들에게 전하고자 하는 일념으로 ‘영주영풍향토지’를 발간하셨으니, 그 정성 오래오래 역사에 남을 것이다. 송지향 선생의 업적에 고개 숙여 감사드린다”고 썼다.

1920-40년 수철리에서 바라본 죽령
1920-40년 수철리에서 바라본 죽령

도솔봉 정상에 오르다

이어지는 탐승기는 1940년 7월 4일 도솔봉 정상에 올라 벤또를 먹고, 희방사를 향해 내려가다가 죽령에서 날이 저물어 1박하고, 다음날 희방계곡까지 가는 이야기다.

「이 길이란 일년가야 한두어번이나 산기슭에 사는 사람들이 봄에는 산채를 캐고 가을에는 꿀밤을 주으러 오르나릴 박게는 이따금 산도야지나 곰과 여호 등 산즘생박게는 단이지 안엇슬것이니 길이라고 말할것이 못된다.

으슥한 밀림 속 낙엽에 발목이 빠지는 층층다리를 노은듯한길을 천신만고하여 오르고 또 올라 한봉우리를 돌아서니 울창하게 욱어져 으슥하던 수풀이 탁터지는곳에 하늘이 환하게 열리며 도솔봉 절정이 불과 십여장우에 올려다보인다.

우리는 남은힘을 다하여 숨이 하늘에 닷도록 한달음에 뛰어오루니 몃그르의 교목이 산 아래에 돌로싸흔 계단이 있고 사간쯤 되어보이는 반성이 잇슬따름이요 봉머리 바위 아래 남향하여 조고만한 집이 있는데 집안에는 오색 비단으로 만든 장막을 둘은 가운데 향탁이 노여잇고 후벽에는 ‘太白山神之位’ ‘小白山神之位’의 두 위패가 가즈런히 서잇다.

차륜 맞물리듯 겹겹싸인 희방계곡
차륜 맞물리듯 겹겹싸인 희방계곡

도솔봉 절정! 이곳이 소백산에서 놉피로는 셋째로 해발 일천삼백십사메터이란 상당히 노픈 곳이다.

찬기운을 가득실은 말근 바람에 몸을 시키며 사방을 바라보니 여튼 안개가 자욱하여 멀리 바라볼수는 업으나 우리는 웅대(雄大) 숭엄(崇嚴)한 이곳에 올라 저 구름 아래로 만학천봉(萬壑千峰)을 내려다보니 영봉하늘은 바로 머리우에 잇서 영봉신기와 사람의 영혼은 한데 화합되어 나를 잇고 마음은 멀니달녀 홍진세게에 헤매고 싸우는 비참한 인생들이 고뇌를 버서난 권외에서 보는듯하여 필자는 표현할 수업는 감회와 무슨 큰영감을 엇은 것 갓헛다.

벤또를 헤처서 출출한 배를 채우고 나니 해가 약간 서쪽으로 기울어젓다. 오늘 여정대로의 코스를 밟어야겟스므로 봉암대(鳳岩臺)며 몃곳 볼만한 곳이 잇다고 하나 오늘해로 히방사(喜方寺)까지 도달하기 위하여 유감이지만 도솔봉 왼쪽 어깨를 타고 분주히 발길을 옴겨 노앗다. 도솔봉을 내려오면서 가장 마음에 걸리는 것은 월전에 풍기등산대가 처음 발견햇다는 도솔폭포를 찾지못하고 그냥 오게 된 것이다」

1940년 죽령 신작로
1940년 죽령 신작로

도솔봉에서 죽령까지

「우리가 타고 내려오는 도솔의 왼쪽 어깨는 봉의 북편 맥이며 서쪽 비탈과 동쪽비탈의 분수령이 되는 경상충청 양도의 도게이다. 도솔봉 정상에서 한십여분동안 내려오노라니 동행중 등산가로 이름잇는 K군이 걸름을 멈추며 막대를들어 옥녀봉 뒤ㅅ산골자기를 가르치며 폭포가 잇는 곳이라고한다.

수풀사이로 머리를 기우려 내려다보니 병풍가튼 절벽이 좌우로 갈라선 가운데 깁숙한 골안이 여러서잇는데 낙낙한 송백이 수를 노하서 매우 운치스러운 경개를 일우엇다. 도게를 타고 울창한 밀림 속을 미끄러지듯 기어나려 한봉오리 안고 비탈을 돌아서니 하늘을 가리울 듯 욱어젓든 밀림도 급작스러히 끗나고 골작이도 등성이도 없는 평탄한 산이 내닷는다.

이런 깊고 험한 산악지대에 잇업즉지안흔 별경지이다. 멀리 변두리는 삼림으로 병풍을 둘은 넓으나 넓은 초원에 이곳 말로 ‘안들미’며 ‘으악새’라는 가슴에까지 차는 풀들이 욱어저잇는데 그 사이를 헤치고 가노라면 앞서가는 사람이 머리 끗만 남실남실하는 광경은 실로 무엇이라 말할수업다.

시인과 화가가 한꺼번에 되지못햇슴을 못내 한햇다. 풀만 욱어저잇스면 심심타는 듯이 새새틈틈이 가지각색 꼿들! 그 만은 꼿중에서도 식물 방면에 눈이 어두운 필자로서 알만한 꼿은 오직 노란바탕에 감은 점이 다문히 백힌 나리(白合) 꼿 뿐이다. 백합꼿 쯤은 야산에서도 낫닉게 보든게지만 이것은 신역의 꼿이라 그런지 별로히 신성스럽고 청초해 보인다.

사진은 죽령상의 탐승대(1940.7.4 송지향 촬영)
사진은 죽령상의 탐승대(1940.7.4 송지향 촬영)

정신업이 이곳저곳을 둘러보며 풀숲을 걷노라니 발아페 풀떨기가 와수수 흔들리면서 송아지 가튼 한떼의 즘생이 동동걸음을 무언지 알아볼새도업이 풀밧에 파문을 그리며 사라저 버린다.

“저런! 저기두 또 저기두!” 아페 달아난 즘생의 떼가 흔들고 지나간 풀떨기가 채 자리도 잡기전에 또 여러 떼의 즘생이 먼젓거와 똑가튼 모양으로 달아나는 것을 본 우리는 눈이 휘둥글해서 약속이나한 듯이 일제히 이러케 부르지젓다.

익살꾼 K군은 우리의 당황해하는 꼴을 슬컷보고나서 여기가 충청북도 도립 면양목장(綿羊牧場)이라고 일러준다. 얼마동안을 풀속에서 것노라니 꽤 평탄한 길이 나선다. 길을 잡아들어서 만히 내려가지안해 나지막한 두던을 의지하여 10여채의 큼직큼직힌 함석건물이 즐비하게 들어섯다. 면양장이 이곳이다.

어느새 석양은 산허리에 걸처 붉으리한 금빗노을이 풀밧을 황홀하게 물들일즈음 수백두 씩 떼를 지은 양의 무리가 목자의 압뒤를 서서 사방으로 모여드는 광경은 실로 별유천지에나 온듯한 느낌을 준다.

죽령(竹嶺)에 다달으니 벌써 어둠에 회색빗 장막이 차저들기 시작한다. 아직도 히방사까지는 사십리나 되는지라 하는수업시 죽령에서 하루밤을 지나기로 하고 여사를 차저들어 행장을 끌으니 전신근육이 풀리는 듯 피뇌에 지이친 몸을 거누기 어렵다. 게속 1940.7.4.」

죽령-수철-임도-희방계곡

1940년 7월 5일 「일즉이 아침밥 먹고 죽령 여사를 나서니 아침해가 어느새 두발이나 올라왓다. 죽령에서 신선봉 남맥을 타고 올라 신선봉을 보고 히방사를 넘으려던 여정의 코스를 변경하여 죽령에서 풍기행 신작로로해서 수철동으로 내려가서 소백산 남문인 히방게곡으로 들어서게 되엇다.

그것은 금년 봄에 개척한 수철 히방간 임도(林道)도 볼겸 또 그러케 하는 것이 탐승의 순서도 된듯해서 연화봉 꼴작사이로부터 솟아나오는 말근 시내물에 가로걸친 히방교 우에서 북쪽을 향하여 올려다보면 창연히 소슨 연화봉을 중심으로하고 마치 차륜이 맛물리듯이 양편에서 내려 뻐든 산맥이 싸고 또싸서 겹겹이 물려잇는 깁숙한 골짜기가 히방게곡이다.

소백산 임도는 히방교를 조금지나 올라가서 양지편 비탈에서 시작되어 수업슨 갈지(之)자를 그리면서 산중턱을 돌아올라간다.

이 임도는 천고의 비경 히방폭포가 칠년전 영남팔경(嶺南八景) 선발에 우선의 광영을 어든이래 여러해동안 경상북도 도당국의 현안으로 되어잇던 것인데 작년의 혹심한 한해를 게기로 삼아 재민구제사업으로 드디어 실현을 보게된 것이다」

수철-희방 임도개척의 폐해

「나무뿌리를 부여잡고 바위등을 기어올라야하던 양의 밸가튼 험로이든 것을 바위를 깨트리고 나무숲을 베어서 이처럼 자동차가 통할만큼 탄탄대로를 만들어 만들어 노은데는 사람의 힘이 위대함을 찬탄치 안을수 업스며 따라서 탐승객에게 편리를 주게됨은 명승 히방사를 위하여 한 경사라고 볼수잇스나 그 반면에는 그만못하지 안흔 손실이 또한 잇슬 것도 부인할수업는 사실이다.

이처럼 홍진세게와는 놉고노픈 담을 싸어 세상외의 별천지가 그냥 계속하여야 할 성지신역이 임도를 개척하게 됨으로 말미암아 암벽을 깨트리고 천고의 처녀림을 찍어내어 천연의위관을 손상하고 자동차, 자전차가 탕자음녀를 실고 소음을 내고 진속의 가진 추태를 낸다는 것은 실로 임도개척이 초래한 페해이다.

성지영경을 모독하는 바 만흠은 일일이 말할 것도 업다. 임도는 전체가 워낙 큽커-브의 연속인 까닭에 길이 금방 양지 비탈로 돌아가는가 하면 어느새 음지면모퉁이를 돌아가고…

이리하여 감아케 발아래로 굽어보이는 골짝이 바닥으로 흐르는 한줄기 시내물을 이리건느고 저리건너서 열두번이나 넘게 건너가고 건너오기를 되푸리 하고나니 울창한 밀림이 뒤덥핀 하늘에 다은듯한 준령이 딱 압플 막아서는 곳에 넙즉하게 원형으로 닥거노흔 임도의 종점이 나타난다」

다음호에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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