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차 속도만큼 빠르게 사라질 풍경, 꿈과 한이 뒤섞였던 80년의 세월

남산육교에서 남쪽으로 내려다 본 철길. 맞은편이 중앙선이고, 오른쪽 첫번째가 경북선이다
남산육교에서 남쪽으로 내려다 본 철길. 맞은편이 중앙선이고, 오른쪽 첫번째가 경북선이다
문수역. 한달 전만 해도 태극기가 펄럭였지만 이제 모든것이 멈추었다.
문수역. 한달 전만 해도 태극기가 펄럭였지만 이제 모든것이 멈추었다.
문수역.
문수역.
문수역. 야적장엔 침목만 가득하다.
문수역. 야적장엔 침목만 가득하다.
탑돌이 마을 앞을 지나던 철길이 마을뒤로 돌려졌다.
탑돌이 마을 앞을 지나던 철길이 마을뒤로 돌려졌다.
2013년에 찍은 중앙선. 영주댐 물속으로 사라진 금광이마을 건널목
2013년에 찍은 중앙선. 영주댐 물속으로 사라진 금광이마을 건널목

오래 전의 역사란 세월의 경과로써 어두워졌으므로 진실을 알아내기란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그리고 그 시대의 명사에 대한 아첨으로 사실이 흐려졌기 때문이다. - 플루타르크 영웅전

한국철도는 1989년 9월 18일 경인선(노량진-인천)으로 시작한다. 그리고 경부선, 경의선, 평남선, 호남선, 경원선 등이 계속 부설된다. 영주의 철도는 1935년에 시작된다.

그해 양평, 원주, 제천, 영주, 영천을 지나는 경경선의 노선을 확정하고, 1936년 청량리 방면에서 착공한다. 1940년에는 양평〜원주와 안동〜우보 간이가 개통되었으며, 소백산맥의 죽령터널도 같은 해 5월에 준공되었다.

1942년 4월에 단양역〜안동역 구간 73.5㎞가 공사를 완료하면서 경경선은 완전 개통하게 된다. 1945년 10월에 노선명을 다시 중앙선으로 명명한다.

꿈의 열차, ‘KTX-이음’

지난 1월 5일, ‘KTX-이음’이 첫 운행에 들어갔다. 2011년에 시작한 중앙선 복선전철 건설공사가 10년 만 이다.

KTX-이음은 청량리~안동 구간(219.4km)을 평일은 하루 14회, 주말은 16회 오간다. 청량리역에서 서원주역까지는 기존 강릉선 KTX와 동일한 구간을 운행하고, 원주~제천 간 단선(58.2km)이 복선전철(44.1km)이 됨에 따라 서원주역부터 신설 노선으로 제천역, 영주역을 거쳐 안동역까지 운행한다.

그리고 KTX-이음 운행으로 중부내륙과 경북북부의 접근성이 크게 높아져 지역경제 활성화를 기대하기도 하고, 국내 최초 ‘동력분산식’ 저탄소·친환경 열차…에너지 효율 탁월하고, 편의성도 좋다고 하지만, 가장 큰 기대는 이동시간이 크게 단축된다. 최고 시속 250km로 달리는 KTX-이음은 청량리역에서 영주역까지는 최단 1시간 41분, 평균 1시간 45분이 걸리고, 전 구간 복선 운행이 되면 영주에서 청량리까지 1시간 10분 이내에 갈 수 있다고 한다.

막현마을 입구에서 보는 옛길과 새길. 새길은 여기서부터 영주까지 땅밑으로 간다.
막현마을 입구에서 보는 옛길과 새길. 새길은 여기서부터 영주까지 땅밑으로 간다.

중앙선의 기억

서울을 간다는 것은 생각 자체가 설레는 일이었다. 촌티가 나지 않도록 새 옷도 장만해야 했고, 하루 종일 열차여행을 위해 계란도 삶아야 했다. 아침 10시쯤 출발한 완행열차는 저녁 5시쯤 청량리에 도착을 했다. 그 후, 급행열차가 생겼다. 조그만 역은 그냥 통과하는 것이었다. 그래도 너덧 시간은 걸렸다. 저녁 9시 청량리에서 출발하는 밤차는 영주에 새벽 세 시가 넘어야 도착했다.

그리고 세월이 지나면서, ‘우등열차’니 ‘새마을호’니 이름을 바꾸면서 편의 시설을 개선하기도 하고, 시간을 단축하기도 하였다. 하지만 고속도로가 생기면서 서울까지의 시간을 더 단축해 주었다. 2시간 30분이란 시간은 철도가 따라잡을 수 없는 시간이었다. 거기에다 서울 시내 한 복판에 내려주는 버스는 우리를 버스로 갈아타게 만들었다.

문수로 가는 없어지는 철길
문수로 가는 없어지는 철길

경경선의 건설

“경북과 충북의 교통은 죽령이 막히면서 불편이 크든바 지난 25일에 경북도에서는 관하 영주에 중앙선철도 실측에 만흔 후원을 통첩하였으며, 뒤를 이어 철도국에서는 익강맹이(益岡猛二) 기사의 열두명이 당지에 출장하야 부지의 실축과 교통의 편의를 조사중이라는데 오는 십월 오일부터 풍기면에서 동부지의 실측에 착수하리라는데 이로서 중앙선은 단양 영주를 관통하기로 결정된 모양이라 한다.” -동아일보, 1935년 11월 23일

노선의 결정에 예천과의 갈등이 많았던 것으로 보인다. 그 후 예천과 영주에서의 유치운동이 신문에 계속 보도된다. “중앙선 유치코져 예천군민은 전력-동아일보 6월 4일” “중앙선 철도의 영주경유는 확실-동아일보 1936년 6월 19일”

그리고 건설에 대한 낙수(落穗)도 보도된다. “소백산 남록(南麓)에 진기한 도자기 발굴-천 수백년전 신라 고기인 듯”이란 조선일보 1938년 7월의 보도에는 개통기한을 맞추려고 매일 천여 명의 인부가 산과 들을 파서 메우는데, 백동마을 앞에서 도자기가 쏟아져 나왔다는 내용이다.

막현마을 입구에서 보는 옛길과 새길. 새길은 여기서부터 영주까지 땅밑으로 간다.
막현마을 입구에서 보는 옛길과 새길. 새길은 여기서부터 영주까지 땅밑으로 간다.

부역에 땀 흘리면 빌어먹어

매일 천여 명의 인부가 일을 했다고 한다. 그 천여 명은 어디서 왔을까?

송원갑(92세)옹은 자신도 그 건설현장에 있었다고 회고한다.

“벌써 80년이 되었네. 큰아버님과 아버님과 함께 부역을 나갔어요. 관사골 흙을 파내서 영주역 부지와 철둑을 만들었지요.”

그 때 열두 살이었다고 한다. 관사골에서 현장까지 레일을 만들고, 그 위로 수레를 밀며 흙을 날랐다고 하는데, 그 수레는 탄광에서 볼 수 있었던 탄차의 모양이었다고 한다.

“관사골에서 흙을 들어내고 거기에 철도관사를 지었지….”

수레가 내려올 때는 내리막이어서 브레이크를 잡아야 했고, 관사골로 갈 때에는 빈수레를 밀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때 들은 말이 아직도 생생하다고 한다. “부역에 땀 흘리면 빌어먹어”

부역(賦役)! 사전에는 ‘국가나 공공단체가 백성에게 공과시키는 노역’이라고 한다. 이젠 사라졌지만, 1970년대까지 있었던 일이다. 사방공사를 하거나 동네 길을 낼 때, 가구당 인원수를 지정하여 노동 현장을 지키도록 하였다.

그런데 일제치하(日帝治下)였으니 그 악랄함이 얼마나 심했을까? 아마도 영주사람들이 거의 동원되었을 것이다. 그리고 레일 아래에 깔았던 자갈은 구성산성 성벽을 깨서 만들었다고 한다.

탑돌이 마을 앞을 지나던 철길이 마을뒤로 돌려졌다.
탑돌이 마을 앞을 지나던 철길이 마을뒤로 돌려졌다.
2013년에 찍은 중앙선. 영주댐 물속으로 사라진 송리원 철교
2013년에 찍은 중앙선. 영주댐 물속으로 사라진 송리원 철교

새로 나는 길과 없어지는 길

2020년 1월 23일 옛 철로를 걷어낸다는 소식을 듣고 부랴부랴 나섰지만, 벌써 철로를 반쯤 걷어낸 후였다. 문수역에서 플랫홈으로 나서 본다. 아직 문수역에는 태극기가 펄럭이고 있었다. 걷어낸 철가치가 분위기를 더 을씨년스럽게 했다. 그리고 2월 21일, 다시 가 보았다. 다들어낸 철가치와 침목을 역 하적장에 산처럼 쌓아놓았다.

그럼 새 철길은 어디로 갔을까 아무리 살펴도 보이질 않는다. 이 일에 참여한 친구에게 전화를 걸었다. 지하철처럼 만들었다고 한다. ‘탑돌이 마을’ 뒤편에서 굴 속으로 들어가 ‘힛디재’ 아래를 통과하고, 문수초등학교 뒤편 ‘위수자골’에서 잠시 땅위로 나왔다가, 다시 땅 속으로 들어가 ‘막현마을’ 입구에서 밖으로 나온다고 한다. 땅 아래의 길이 한 4km쯤이란다. 막현마을로 가는 입구로 가 본다. 한 달 전에 왔을 때, 무심코 지나쳤던 터널 입구를 볼 수가 있었다.

80년만에 바뀌는 길, 그 옛길의 시간속엔 고향을 떠나 서울로 가던 청춘도 있었겠지만, 만주를 지나 멀리 남국까지 가던 ‘위안부 소녀’의 겁먹은 얼굴도 있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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