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의 미래를 위해 몸을 던진 선비 ​​​​​​​그 선인께 지도자의 길을 묻고 싶다

①귀학정 ②신암교차로 ③계서정 ④봉화정씨 문중단소 ⑤성이성 묘
①귀학정 ②신암교차로 ③계서정 ④봉화정씨 문중단소 ⑤성이성 묘
①이산우체국 ②이산서원 ③이산면보건지소 ④천운정 ⑤두암고택 ⑥만취당
①이산우체국 ②이산서원 ③이산면보건지소 ④천운정 ⑤두암고택 ⑥만취당
봉화정씨 추향제단
봉화정씨 추향제단
계서정
계서정
선비길 안내판과 이몽룡둘레길 이정표
선비길 안내판과 이몽룡둘레길 이정표
이몽룡인문학둘레길 안내지도
이몽룡인문학둘레길 안내지도
천운정
천운정
이산서원
이산서원
두암고택
두암고택
만취당
만취당

사람은 부끄러움이 없을 수 없으니 부끄러움이 없음을 부끄러워한다면 부끄러운 일이 없을 것이다 - 맹자 진심장(盡心章)’

이산면(伊山面)에는 세 개의 길이 있다. 이산로(伊山路)와 신암로(新庵路) 그리고 영봉로(榮奉路)이다.이산로는 청구아파트 앞, 영주로가 끝나는 용암교차로에서 출발하여 이산면사무소와 흑석사를 지나 봉화 황전(黃田) 봉화농공단지 앞에서 예봉로를 만난다. 신암로는 신암교차로에서 석포교 옆 이산로까지이고, 영봉로는 남간고개 너머 술바위지하차도에서 충혼탑 앞과 두월을 지나 봉화 상운면 구천삼거리까지의 길이다.

 

우국충정(憂國衷情) 삼봉길(三峰路)

2015년 조성한 영주선비길셋 중의 하나가 우국충정 삼봉길이다. 이 길은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평생을 살았던 삼봉(三峰) 정도전(鄭道傳)을 기리는 길이다. 남간고개 옆에 있는 이산서원(伊山書院) 창건지(創建地)에서 시작하여 정도전의 유적을 돌아볼 수 있다. 하지만 정도전의 유적은 그리 많지가 않다. 시묘살이를 한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鄭云敬)의 산소 정도이다. 그래서 정도전의 동생 도복(道復)이 형이 죽고, 그 화를 피해 내려와 살았던 한성골과 이몽룡의 실제 인물로 알려진 성이성(成以性)의 산소, 봉화정씨 문중단소, 나라를 위해 몸을 던진 김륵(金玏)의 천운정(天雲亭), 김우익(金友益)의 두암고택(斗巖古宅), 김개국(金蓋國)의 만취당(晩翠堂)을 연결시켜 길을 냈다.

길은 10km쯤 된다. 호젓한 산길도 있지만, 너른 평야 사이로 흐르는 물길도 있다. 그래서 김륵은 동포십육경(東浦十六景)’이란 제목으로 16수의 시를 지으며, 고운 모래 위로 흐르는 내성천을 노래했다.

좋구나! 맑은 강물 유유히 명주를 펼친 듯 넓은 벌 비껴 흐르는데, 오늘 아침 서산에 내린 비 모여들어, 저 바다 향한 마음을 재촉하누나.”

 

시묘(侍墓)살이 3년에 맺은 마음

봉화정씨 문중 단소(壇所)엔 정도전의 아버지 정운경의 묘소와 정도전 일가의 위패가 모셔져 있는 모현사(慕賢詞), 정도전이 3년간 시묘살이를 했던 자리에 만든 문천서당(文川書堂), 봉화정씨 추원제단(追遠祭壇)이 있다.

1366년 시묘살이는 정도전에게 의미 있는 기간이었다고 한다. 동생들을 가르치고 있는데, 주변의 학동들이 배움을 청하며 모여들었다고 한다. 하지만 책이 마련된 것도 아니고. 그 때 서로 서신왕래를 하고 있던 정몽주가 사서(四書)를 보내 왔다고 한다. 그 사서에는 맹자도 있었다. “백성이 가장 귀하고, 사직(社稷)은 다음이며, 군주는 가볍다.” “백성의 마음을 잃는 자는 천하를 잃는다.” 한 구절 한 구절 되새기며 큰 뜻을 세웠다고 한다. 정몽주가 보내온 책으로, 뒷날 서로 척()지게 될 줄 어떻게 알았을까?

이 단소에 오는 길목은 신암교차로이다. 교차로에서 바로 가면 단소인데, 오른쪽으로 계서정(溪西亭) 이정표가 보인다. ‘계서는 이몽룡의 실제 인물인 성이성(成以性)의 호이다.

 

이몽룡인문학둘레길

1999KBS 9시 뉴스에 설성경 교수의 논문의 충격적인 내용이 방영되었다. 이몽룡의 실제 인물이 성이성이란 사람이란 내용이었는데, 더 눈길을 끈 것이 그 인물이 영주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예전엔 성춘향의 아버지가 누구인가?’라는 것이 화두였고, ()’씨 성을 가진 아버지는 영남의 선비이다.’라는 정도였다. 그런데 암행어사 출두를 외치기 전에 등장하는 금동이의 아름다운 술은 일천 사람의 피요. 옥소반의 좋은 안주는 모든 백성의 기름이더라. 촛불눈물 떨어질때 백성의 눈물 떨어지고, 노래소리 높은 곳에 원망소리 높더라.’라는 시가 성이성의 문집에도 있다고 하였다.

성이성과 춘향의 만남은 아버지 성안이가 남원부사를 할 때였다고 한다. 성안이는 원래 창녕 사람이었는데, 임진왜란 때에 의병으로 참여했다가 경상안집사(慶尙安集使)를 하며 의병을 지원하던 김륵을 만나서 전쟁이 끝나고 영주까지 따라와서 김륵의 손서(孫壻)가 된다.

둘레길은 계서정에서 성이성의 산소까지 1.2km의 거리이다. 계서정 입구에서 능선으로 오르면서 시작하는데, 그 구간의 일부는 봉화정씨 단소를 가로지르고 있었다. 그래서 계속 능선을 따라 묘소까지 가기로 하였다. 겨울이라 충분히 잘 걸을 수 있는 길이었다. 설성경 교수가 논문발표를 한 몇 해 뒤에 영주시민들과 함께 산소 앞에서 판소리꾼을 모시고 쑥대머리를 들어보는 특별 이벤트를 가진 적이 있었다. 그 때, 이런 말을 했었다. ‘아마도 이 산소의 주인은 이 노래를 처음 들으실 것이고.’

 

천운정, 두암고택 드리고 만취당

천운정은 이산로에서 봉화방면으로 가다가 석포교를 지나 500m쯤 가면 있다. 김륵은 생전에 세 개의 정자를 지었다고 한다. 하나는 귀학정(龜鶴亭)이고, 또 하나는 서벽정(棲碧亭) 그리고 천운정(天雲亭)이다. 귀학정은 영주2동사무소 뒤에 있다가 1990년쯤 현재 계서정 앞 길 건너편으로 옮겨지었지만, 서벽정은 흔적을 찾을 수 없다. 천운정도 몇 번의 이건 끝에 이 자리에 터를 내렸다고 한다.

천운정에서 담장따라 산길로 오르면 이산들이 펼쳐진다. 멀리 소백산이 눈앞으로 확 밀려온다. 그리고 몇 해 전에 영주댐의 물을 피해 이건한 이산서원이 바로 앞에 보인다. 이산서원도 두 번이나 옮겨 지었다. 남간재 옆에서 내림리로, 그리고 여기로.

30년 전의 일이다. 이제 고인이 되신 김영하선생님과 이산서원 나들이를 한 적이 있었다. 아니 퇴계선생과 이산서원이란 말이 옳겠다. 퇴계의 영주와의 인연을 따라 하루를 다녔다. 영주의원, 선생의 첫날 밤과 그 부인의 산소, 성학십도 판각과 괴헌고택. ! 그 부인의 산소도 신암리에 있다. 부인의 외할아버지인 문경동(文敬仝)선생 뒤에.

두암고택은 여기서 북쪽으로 300m, 만취당은 거기에서 200m쯤에 있다. 모두가 비슷한 시기에 서로 존경하며, 나라와 백성을 위해 살았던 분들이다. 어느 때든 어렵지 않은 시기가 없었을까? 하지만 임진왜란이라는 어려운 시기를 살았던 분들이고, 의병 활동을 하며 지도자의 역할을 제대로 하신 분들이란 생각을 하니, 모실 수만 있다면 오늘 우리가 갈 길을 물어보고도 싶다.

 

삶의 터전을 내 준 이산 사람들

이산서원에서 내림리를 내려다본다. 이산서원도 옮겼고, 괴헌고택도 이건했다고 한다. 그 뿐이랴. 많은 사람들이 오랜 삶의 터전을 내주었다. 그게 우리의 의지였던가? 남쪽 사람들을 위해 양보했던 것이 아니었던가? 참 착한 사람들이다. 지금 문전옥답이었던 번개들이 잡초만 무성한 채 바람에 넘어지고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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