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특집] 소의 해 전설과 지명유래

소는 근면과 풍요로움, 희생, 의로움을 의미하는 동물로 상징되어왔다. 전통 농경 사회에서 농사일을 돕는 매우 중요한 가축으로 이용되었으며, 토목공사나 힘든 일을 할 때는 소의 힘에 크게 의존했다. 신축년(辛丑年) ()의 해를 맞이하여 우리 고장에서 전해오는 소에 대한 전설과 지명유래에 얽힌 이야기를 찾아봤다.

 

희방사 전경
희방사 전경
희방사-소의 부도
희방사-소의 부도
부석면 소천1리-우천 정옥의 묘
부석면 소천1리-우천 정옥의 묘

희방사(喜方寺)를 지은 소()

희방사는 861(경문왕 1)에 두운대사가 창건하고, 863(경문왕 3)에 계림호장(鷄林戶長) 유석()이 대대적으로 중창한 후 사찰 이름을 지질방사(池叱方寺)’라 했다고 전한다.

천년의 역사를 간직한 희방사는 창건 이후 여러 차례 소실과 중창을 반복했는데 이때마다 소가 절을 짓는 데 큰 공을 세운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

순흥의 역사를 기록한 재향지(梓鄕誌, 순흥지)에 소()의 공적을 이렇게 전하고 있다.

원문 戶長傾材募(호장경재모) 營造二塔於菴(영조이탑어암) 所運石駄 (소운석태)

至洞口(지동구) 顚仆 不能前(진부불능전) 遂以牛代之(수이우대지) 所過巖石上(소과암석상) 有牛跡(유우적) 後人因名牛跡巖(후인인명우적암)

역문 호장이 재물을 털어 장인을 모아 암자 아래에 두 개의 탑을 세우게 하였다. 그런데 석재를 실은 말이 동구에 이르러 거꾸러지고 나아가지를 못하자 소()로 교체하였다. 그 소가 지나간 바위 위에 소의 발자국이 생겼는데, 후세 사람들이 이를 우적암(牛跡巖)’이라 하였다.

 

순흥부사 조덕상(趙德常,1753-1757)의 시

우적암(牛迹巖) 앞에 해는 저물고 / 牛迹巖前日欲西(우적암전일욕서)

흰 구름 속 붉은 나무 길가에 늘어섰네 / 白雲紅樹路高低(백운홍수노고저)

산자락 돌아가는 곳에 용추(龍湫) 있어서 / 龍湫知在山回處(용추지재산회처)

온 골 찬 소나무에 이슬 기운 처연하네 / 萬壑寒松露氣凄(만학한송노기처)

 

()의 공을 기린 부도(浮屠)가 있다?

희방사는 한국전쟁 통에 모든 문화유산이 소실되어 남은 것이라곤 석조 부도 2기만 남았다. 절에서 서북쪽으로 100m 떨어진 곳에 석종형 부도 2기가 그것이다.

이들 부도의 배경은 알 수 없으나 희방사의 중건과 관련한 고승의 것으로 추정하면서도 2기 중 1기는 소의 부도라는 전설이 전해오고 있다.

희방사 설송스님은 “2기의 부도 중 중간에 테를 두른 부도는 ()의 부도라는 설이 전해진다면서 이곳은 워낙 지세가 험하고 절벽으로 둘러싸여 있어 물자 운반이 매우 어려웠다. 그래서 저 멀리 수철에서부터 능선길을 따라 절에 당도하는 소의 길이 있었을 것으로 추정된다. 소가 절을 짓는 물자를 다 운반하고 나서 죽었다고 한다. 그래서 사람들이 소의 노고와 공을 추모하기 위해 부도를 세웠다고 하니 그럴듯한 이야기다라고 말했다.

 

소 우()자 소천리의 유래

부석면소재지 주변 마을은 모두 소천리이다. 1리에서 6리까지 있으니 이주 큰 마을이다.

소천리라는 지명은 소 우()자에서 유래됐다고 전해온다.

홍종호(洪鍾鎬, 1929-2019) 전 부석면장이 쓴 지명유래에 보면 소천이란 지명은 조선 숙종-영조 때 황해도 관찰사를 지낸 소천 출신 정옥(鄭玉. 1694-1760) 선생의  우천(牛川)에서 유래됐다. 선생은 자신이 살던 마을(두들마)의 지형이 소를 닮았고, () 주변에 소들이 한가로이 풀을 뜯고 있는 모습이 보기 좋아 자신의 호를 소 우()자에 내 천()자를 써 우천(牛川)이라 했다. 당시 삼부석면 사람들은 우천(牛川) (소 우()자에서 ‘자를 따고, 내 천()자에서 ‘자를  마을 이름을 소천이라 칭하게 됐다. 한글과 한자를 조합한 특이한 지명이다. 이는 우천 선생의 높은 학식과 덕망을 오래오래 기리기 위해서였다. 세월이 흘러 1914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봉황은 풍류를 좋아한다 하여 한글 ‘ 대신 ‘풍류이름 소()’자로 바꾸어 소천(韶川)’이란 한자 지명으로 개칭됐다고 썼다.

정옥은 청주인으로 약포(藥圃) 정탁(鄭琢. 1526-1605)5대손이다. 1694년 순흥부 삼부석면 독유동(獨遊洞, 두둘마, 현 소천1)에서 태어났다. 34세 때 문과에 급제하여 승문원 부정자, 황해도사, 황해도관찰사를 지낸 영주가 낳은 큰선비로 한때 소수서원 동주(원장)를 지내기도 했다. 1760년 임소에서 졸하여 단양 선영에 장사지냈으나 충주댐 수몰로 1980년 고향마을이 내려다보이는 두들마 북편 산자락에 이장했다.
 

2020 해넘이
2020 해넘이

2020년 마지막 해가 순흥 비봉산 정상을 넘어 소백 능선으로 지고 있다.
-순흥 선비세상에서 촬영(12.31 오후 504)

 

2021 해맞이
2021 해맞이

2021(辛丑年) 새해 첫 해가 영주 시가지의
동쪽 멀리 이산면 신천리 방향에서 떠오르고 있다.
-영주시립도서관 뒷산에서 촬영(1.1 오전 0751)

 

토종 영주소
토종 영주소

영주 토종소 영주시 이산면 용상1리 용상골농장
-영주시 이산면 용상리에서 촬영(1.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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