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22] 철탄산 아래 안양원 「오백나한상」

영주 안양원에 가면 국보급 ‘5백나한상(五百羅漢像)’이 있다
청나라 고종황제 등극기념(1736) 국태민안 위해 조성한 것
불자들 신심 일깨우고 국가사회가 숭봉대상 선정할 날 올 것

안양원이 소장하고 있는 오백나한의 웅장한 모습
안양원이 소장하고 있는 오백나한의 웅장한 모습

안양원(安養院)의 위치

안양원 안경우 스님
안양원 안경우 스님

영주 철탄산 아래 영주향교(영주여고)가 있고 그 아래 ‘안양원’이 있다.

영주시 광복로 상망동행정복지센터 옆 도로로 진입하여 영주향교·영주여고 방향으로 올라가다가 침례교회 맞은편 골목으로 들어가면 안양원 정문이 나온다.

안양원은 1953년 안경우스님에 의해 창건됐다.

창건 연대가 짧음에도 불교사적으로 가치 있는 유물과 유적이 확인된 사찰이다. 안양원이 자리 잡은 곳은 통일신라시대의 정토사 터였다고 한다.

정토사는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나오는 조신(調信)이 꿈을 꾸고 난 뒤에 인간의 욕망이 덧없음을 깨닫고 사재를 털어 지은 절로 기록되어 있다. 옛날부터 ‘절골’로 불린 곳이며, 또 ‘사례(寺禮)’라는 지명을 가진 까닭도 정토사와 무관하지 않다.

통일신라시대 때 조신이 정토사(淨土寺)를 창건하였고, 그 정토사 터에 안양원이 자리 잡았다.

오백나한(羅漢)이란?

나한(羅漢)이란 범어 아라한(阿羅漢, Arhat)을 줄인 말이다. 아라한은 응공(應供)이라고도 하는데 공양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는 뜻이다.

부처님의 공덕을 설명하는 여래십호(如來十號) 가운데 응공이 있다. 나한도 최고의 진리를 성취했기에 세상으로부터 존경을 받아 마땅한 분이라는 의미를 담고 있다.

불가의 불제자 가운데 부처의 경지에 오른 16명의 뛰어난 제자를 ‘16나한’이라하며, 이들은 무량의 공덕과 신통력을 지니고 있어 열반에 들지 않고 세속에 거주하면서 불법을 수호하는 존자(尊者)이다. 부처가 열반(涅槃)한 뒤 제자 가섭(迦葉, kasyapa)이 부처의 설법을 정리하기 위해 회의를 소집했는데 이때 모인 제자 500명을 ‘오백나한’이라고 한다.

오백나한의 500가지 모습
오백나한의 500가지 모습

나한(羅漢) 신앙의 유래

나한 신앙은 통일신라시대 때 중국으로부터 유입되었으며, 고려 건국 직후인 923년 태조 왕건이 중국 양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한 윤질(尹瓆)이 오백나한을 가지고 귀국하여 해주(海州) 숭산사(崇山寺)에 처음 봉안하였다. 이후 고려왕실에서는 문종 때 신광사에 나한재(羅漢齋)를 베푼 것을 시작으로 무려 28회의 나한재를 시행하였으며, 이 시기에 나한신앙도 성숙하게 됐다.

삼국유사에 나한(羅漢)이란 말이 처음 등장하는데, 가락국의 김수로왕이 도읍을 정하고 나서 ‘여기는 16나한이 머무르기에 적합하다’고 했다는 기록이 있다. 또 나한은 불교설화의 주인공으로 많이 등장하고 있다. 진묵대사가 나한을 때려서 화가 난 나한이 진묵대사를 골탕 먹였다는 설화나, 함경도 나한사(羅漢寺)에는 ‘동짓달 불씨와 팥죽’에 대한 설화가 전해온다. 조선 왕조를 개창한 태조 이성계가 나한을 지극히 섬겼고, 오백나한을 업어 날랐다는 설화도 전해진다.

옥석에 조각한 오백나한의 각기 다른 모습
옥석에 조각한 오백나한의 각기 다른 모습

오백나한, 안양원 봉안내력

안양원에 봉안된 오백나한은 나한박물관 건립을 꿈꿔 온 서울 소천(小泉) 화백이 1989년 거금 8억 원을 들여서 중국의 한 폐사지에서 발굴된 오백나한을 한국으로 이운(移運)해 오게 된다. 그 후 나한박물관 건립이 난항에 부딪치게 되자 이 나한은 경기도 고양시에 사는 불상전문가 金모씨가 소장하여 비밀리 보존해 왔다. 이 내력을 알게 된 본원 안우경 부원장은 경우스님께 오백나한에 대한 내력을 알린다. 경우스님이 수차 친견한바 인연이 맞아 이운에 따른 수속을 마치고 2001년 안양원에 봉안하게 됐다.

안경우스님은 이 나한의 조성 내력을 알아보기 위해 여러 차례 중국을 방문하여 불교 관계자, 도서관 관계자들을 만나 역사적 근거를 찾아보는 등 자료를 수집하여 분석한 결과 이 ‘오백나한’은 중국 청나라 제6대 제왕인 고종(高宗, 乾隆純皇帝, 재위:1736-1775) 황제 등극기념으로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해 조성된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각 나한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
각 나한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

누가, 어디서 어떻게 조각했나?

안양원 오백나한은 중국 복건성에서 나는 수산옥(水山玉)을 캐어 당시 유명한 조각가 송경(宋耕)을 중심으로 석수장이 다수인이 황명(皇命)을 받들어 5년간에 걸쳐 조성하였다고 전한다.

전사(傳史)에 의하면 조성 기간 중 조각가 전원이 한번 외출도 없이 두문불출(杜門不出)하고, 매일 목욕재계(沐浴齋戒)하며, 일념의 발원과 청정한 심혼(心魂)으로 정해진 날까지 오백나한을 탄생시켰다고 한다.

[나한:높이 35-45cm, 가로폭30, 세로폭20, 무게20-35kg/좌대:높이10, 가로40, 세로30, 무게5kg]

오백나한이 깔고 앉은 좌대 또한 희귀(稀貴)한 것이다. 목질이 보통나무로 만들어진 것이 아니고 중국 보타산에서 나는 몇 백 년 묵은 향나무를 채취하여 500개의 대좌를 만들었다고 하니 보통 공력이 아닌 것으로 사료된다. 특이한 것은 각각 나한마다 이름이 새겨져 있다는 것이다. 1-아야고진여존자(阿若稿陳如尊者), 2-아니루존자(阿泥樓尊者) 등등 이다.

오백나한, 인작(人作)? 천작(天作)?

안양원에 봉안된 오백나한의 뛰어난 솜씨는 인작(人作)일까? 천작(天作)일까? 의심할 정도의 (사상최고) 걸작품으로 평가받고 있다. 오백나한 한 분 한 분의 모양새가 다 다른 소위 천태만상(千態萬象)으로 현상(現相)된 나한은 자비엄상(慈悲嚴相)으로 빛나며, 최상성인(最上聖人)들의 심혼(心魂) 영기(靈氣)가 도는 듯하다. 혹자는 코끼리를 타고, 혹자는 용, 범, 말, 소, 고래, 악어, 낙타, 봉, 학, 구름, 산을 타는 등등으로 표상된 초인간상은 가히 국보적 가치를 지닌 성보(聖寶)라 할 수 있다.

이 희귀하고 독특한 나한님들이 만리강산(중국)을 두어두고, 명산대찰도 마다하시고, 무슨 인연으로(어찌) 태소백 영주고을 그 중에도 외지고 비좁은 안양원으로 강림(降臨)하셨을까? 참으로 기이한 인연이오 불가사의한 일이다.

안경우스님은 “안양원은 유일하게 빛나고 자랑스러운 성보를 봉안하였기 때문에 앞으로 문화역사의 새 장이 펼쳐질 것”이라며, “원찰(院刹) 또한 면목이 새로워지고 전법도생(傳法度生, 부처님 말씀을 전하여 중생을 제도한다)이 활발히 정진될 것으로 기대한다”고 했다.

안양원 오백나한전 전경
안양원 오백나한전 전경

안경우 스님의 말씀

안경우스님은 “이 성보(聖寶)의 본원 소장은 본원의 경사는 물론 영주시와 국가적으로도 금상첨화(錦上添花)라 아니할 수 없다”며 “우리 영주에 국보급 문화재(500점)가 생겼다고 생각할 때 모든 불자와 영주시민들이 어찌 기뻐하며 축하할 경사가 아니리오. 그러나 만일 이 나한상이 일점의 하자(瑕疵)가 발견되었다면 저는 그냥 공짜로 모셔준다 할지라도 거절하고 말았을 것”이라고 했다.

스님은 이어 “이 성보는 앞으로 민족 만대의 보배로서 범부(凡夫)와 철인성자들의 구심점이 되어 중요한 보배로 영원히 애호해야할 것”이라며 “성보의 자랑과 애호심은 본원은 물론 영주시를 통해 전국으로 보급되어 불자들의 신심을 일깨우고, 나아가 국가 사회에서 반드시 애호 숭봉(崇奉)할 대상으로 선정될 날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말했다.

스님은 또 “본원이 봉안하고 있는 옥석을 조각한 ‘오백나한’이야말로 더 설명할 나위 없이 최고급 성보로 가히 국보적인 존재라고 중구동성(衆口同聲)으로 평가한다”며 “때문에 영원히 이 성보를 잘 보존하기 위해 2010년 나한전을 신축하여 나한님들을 봉안하였고, 한 분 한 분 원색사진과 연기내력을 우리말로 옮겨 누구나 쉽게 알 수 있도록 2011년 나한도록(羅漢圖錄)을 편찬했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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