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情) 많던 향교골·보름골 사람들 꿈으로 일구어낸 상전벽해(桑田碧海)

사람은 같은 강물 속에 두 번 몸을 담글 수 없다. 왜냐하면 다시 흘러온 강물은 이미 전혀 딴 것이 되었기 때문이다. -헤라클레이토스

향교골과 보름골(2020) ①영주초 ②영주여고 ③동산교회 ④재건주택 ⑤동서주택 ⑥동산아파트 ⑦방산아파트
향교골과 보름골(2020) ①영주초 ②영주여고 ③동산교회 ④재건주택 ⑤동서주택 ⑥동산아파트 ⑦방산아파트 (촬영 이영규 기자)
향교골과 보름골(1962) ①영주초 ②영주여고 ③동산교회 ④재건주택 ⑤동서주택 자리 ⑥동산아파트 자리 ⑦방산서원
향교골과 보름골(1962) ①영주초 ②영주여고 ③동산교회 ④재건주택 ⑤동서주택 자리 ⑥동산아파트 자리 ⑦방산서원
재건주택준공식(1962)
재건주택준공식(1962)
재건주택준공식 자리(2020)
재건주택준공식 자리(2020)
‘삭발의 모정’ 촬영현장(1965, 영주역전)
‘삭발의 모정’ 촬영현장(1965, 영주역전)
주인공이 살던 집 부근
주인공이 살던 집 부근
‘삭발의 모정’ 영화의 한 장면
‘삭발의 모정’ 영화의 한 장면

향교길은 동창산업 맞은 편, 동산교회 옆으로 난 길에서 출발하여 향교골을 지나, 방산(方山)을 넘어 원당로 223번길까지 가는 길이다. 이 길을 가다보면 영주여고도 만나고, 재건주택도 만난다. 하지만 예전에 있었던 방산서원명성방산아파트로 변하였다. 그리고 새로 아파트촌이 된 방산을 내려서면 보름골의 먹자골목원당로 223번길이 있다.

향교골의 역사
향교골은 영주향교로 가는 길목에 있다하여 부른 이름이다. 영주 사람들은 이 골짜기를 행지골이나 행주골에 퍽 익숙하다. 그것은 향교골>행교골>행기골>행지골>행주골로 음운변천이 이루어졌기 때문이 아닐까 싶다.

영주향교는 고려 공민왕(恭愍王17), 1368년에 지영주사(知榮州事)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세웠다고 한다. 하지만 정도전(鄭道傳)이 쓴 정운경(鄭云敬) 행장(行狀)’에는 정운경이 10여세에 영주향교를 출입한 것으로 기록하고 있어, 이보다 앞선 시기에 영주향교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는 이들도 있다.

그리고 이 골짜기 뒷산을 넘으면 방산서원이 있었다. 방산서원은 1633(인조 11) 전희철의 유덕을 추모하기 위해 세운 묘우(廟宇)에서 유래한다. 이 묘우를 바탕으로 1808(순조 8) 방산(方山)에 방산리사(方山里社)를 만들었지만, 1868(고종 5) 서원훼철령으로 철폐되고 만다. 그리고 1937년에 다시 중건하였다가, 1982년 지역 유림의 건의로 방산서원으로 승격하였다. 하지만 2001년 방산아파트가 준공되면서 이산면 용상리로 이건했다.

사진으로 보는 58년의 세월
옛 사진 향교골과 보름골196213일에 찍은 것으로 보인다. 1961717일에 시작한 영주수해 복구공사는 196213일 영주공설운동장에서 준공식을 하며 마감을 한다. 그리고 그날 서천에 새로 건설한 신영교(가흥교)’에서 테이프를 끊고, 하망동에 신축한 재건주택을 돌아보았다. 사진을 보면 재건주택 앞에 모여있는 사람들 모습이 보인다.

옛 사진의 현장을 확인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방산서원도 없었을뿐더러, 보름골로 뻗어있는 산줄기를 찾을 수가 없었기 때문이다. 재건주택 뒤로 난 길 따라 내려오기를 반복했다. 마침 예전에 이 산등성이에 살았다는 맹태호씨(66)를 만날 수 있었다. “재건주택이 들어서고 몇 해 뒤에 이 일이 시작되었는데, 산을 들어내는데, 2, 3년은 걸린 것 같아요. 불도저가 일하다가 쉬고. 처음엔 뭘 하나 싶었지요.” 하면서 산이 높은 산이 아니었다고 한다. 이제 그 산줄기에 영남동산아파트가 들어서 있다.

두 번째 옛 사진인 재건주택준공식을 보면 동창산업의 건물이 보인다. 골짜기 사이로 보이는 봉화통로 길 주변은 거의 논바닥이다. 동산교회 쪽으로 다닥다닥 붙은 초가들만 보일 뿐이다. 재건주택이 만들어지고, 봉화삼거리에 진흥합판상사가 들어서면서 그 주변의 논들이 대지로 바뀌고, 그 골짜기로 주택들이 들어서기 시작했다고 한다.

더 큰 변화는 1982년 원당천 물길이 원당로가 된 이후부터였다. 첫 번째 사진에 보이는 논바닥이었던 보름골 뿐만 아니라, 민둥산이었던 산등성이까지 집이 들어서기 시작한다. 그리고 아파트들이 들어선 것은 불과 20여 년 전부터였다.

향교골에서 있었던 삭발의 모정
그 무렵을 이야기하면 삭발(削髮)의 모정(母情)’을 빼놓을 수 없다. 1965년 영주에서 있었던 이야기로 만든 이 영화는 전국을 강타한다. ‘휴가 나온 아들에게 밥 한 끼 제대로 먹이기 위해 어머니가 머리칼을 잘라 팔아서, 따뜻한 밥과 소고기국을 먹이려다가.’ 하는 궁핍한 시절의 이야기였다. 처음엔 신문 기사가 나고, 그 보도를 접한 영화 제작자가 영화를 만들고, 또 음악가가 가요를 만들면서, 전국을 울음바다 속으로 몰아넣었다.

촬영도 영주에서 거의 이루어졌다. 영주역에서 촬영을 할 때, 그 장면을 보기 위한 인파가 많아 경찰이 질서유지를 위해 통제를 할 정도였다고 한다. 그리고 중앙초등학교 6학년 1반 교실에서도 촬영을 했는데, 아직도 내가 그 때 그 장면에 나갔었다.’며 자랑하는 이도 있다. 주인공의 동생이 중앙초등학교에 다녔다고 한다.

주인공이 살았던 집을 정확히 기억한다는 친구를 따라 나섰다. 하지만 길도 집도 깨끗하게 변해 있었다. 그 주변 어디에도 삭발의 모정을 찾을 수 없었다. 동창산업 벽에 삭발의 모정포스터가 벽화로 그려져 있지만, 정작 여긴 아무것도 없었다.

60, 망각의 세월
재건주택에 밤마다 귀신이 나타나 입주한 사람들을 공포에 떨게했다. 밤이 되면 귀신이 날아다닌다는 것이었다. 집을 지은 곳이 원래 공동묘지였다. 그래서 밤마다 날아다니는 도깨비불을 귀신으로 여겼던 것이다.

재건주택에서 준공식을 거행했던 자리로 가 본다. 2층짜리 조그만 아파트였지만, 영주의 최초라고 자랑했던 공무원아파트가 세워졌었다. 주차장으로 변해있었다. 60년이란 세월은 이 조그만 동네에서도 많은 것이 생기고 없어지게 하였다는 생각을 해본다.

친구가 문득 이 어디쯤에서 내가 밀어서 죽을뻔 했다고 한다. 여섯 살 때를 어떻게 기억하냐니까, 어머님의 말씀이란다. 난 이 언덕빼기에 살다가 여섯 살을 지나던 가을쯤에 숫골로 이사를 갔다는 기억만 어렴픗하다. 내가 살던 곳이 어딘지 한 번 돌아 본다. 언덕으로 오르는 이 어디쯤이었던 것 같다. 이사 간 곳도 역시 수해복구주택이었던 문화주택이었다. 문화주택이 재건주택보다 먼저 지어진 셈이다.

어릴 때 기억은 그렇다치고, 우리가 잊어버리고 있는 것은 얼마나 될까? 더 큰일이 생기면 그보다 적었던 기억은 망각하는 것이 보통인데, 60년이란 세월이 지났지만 아직 영주 사람들은 수해를 이야기 한다는 것은 그 사이에 수해보다 더 큰 일이 없었던 탓도 있겠지만, 수해가 우리에게 준 아픔이나 충격이 아직은 생생하기 때문일 것이다.

우리 아픔의 역사에 6.25와 일제치하가 있다. 6.25보다 일제치하를 기억하는 이는 훨씬 더 적을 것이다. 불과 5년이지만, 많은 이들이 저세상으로 갔기 때문이다. 6.25와 수해의 차이는 10년이다. 얼마 지나면 이 수해의 이야기도 사라질 것이다. 이런 생각을 하는 것은 걱정스러움이 아니라 안타까움때문이다. 참 없던 시절이었지만, 열심히 살았고, 그 시절은 정이 참 많았던 삶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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