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억을 세월에 밀어두고 아직 변화하고 있는 원당로

삶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변화를 외적 조건의 소산이 되게 하지 말고, ()의 소산이 되게 해야 한다. - 톨스토이/일기

①삼거리반점 ②하망동성당 ③스카이타운 ④성누가병원 ⑤JC회관 ⑥새마을회관 ⑦장애인종합복지관 ⑧노인복지관 ⑨영주석재 ⑩신영주교회
①삼거리반점 ②하망동성당 ③스카이타운 ④성누가병원 ⑤JC회관 ⑥새마을회관 ⑦장애인종합복지관 ⑧노인복지관 ⑨영주석재 ⑩신영주교회
(촬영 이영규 기자)
①중앙선 ②가흥교 ③영동선 ④영주극장 ⑤시외버스터미널 ⑥아카데미극장 ⑦하망교 ⑧시온교회 ⑨영보극장 ⑩영주흥업 ⑪국민은행 ⑫읍교회 ⑬성결교회 ⑭제일교회 ⑮중앙초등 ⑯중앙교회 ⑰영주초등 ⑱원당교 ⑲금붕어가두리양식장 ⑳영주여중고 ㉑동산교회 ㉒재건주택 ㉓동창산업
①중앙선 ②가흥교 ③영동선 ④영주극장 ⑤시외버스터미널 ⑥아카데미극장 ⑦하망교 ⑧시온교회 ⑨영보극장 ⑩영주흥업 ⑪국민은행 ⑫읍교회 ⑬성결교회 ⑭제일교회 ⑮중앙초등 ⑯중앙교회 ⑰영주초등 ⑱원당교 ⑲금붕어가두리양식장 ⑳영주여중고 ㉑동산교회 ㉒재건주택 ㉓동창산업
①신영주교회 ②노인복지관 ③장애인회관 ④새마을회관 ⑤영주청년회의소 ⑥성누가병원 ⑦영주여객 ⑧스카이타운 ⑨축협 하망지점 ⑩하망건널목 ⑪하망동성당 ⑫중앙초등 ⑬동산교회 ⑭코오롱아파트 ⑮진흥합판
①신영주교회 ②노인복지관 ③장애인회관 ④새마을회관 ⑤영주청년회의소 ⑥성누가병원 ⑦영주여객 ⑧스카이타운 ⑨축협 하망지점 ⑩하망건널목 ⑪하망동성당 ⑫중앙초등 ⑬동산교회 ⑭코오롱아파트 ⑮진흥합판
오일장
오일장
둑 아랫길이 만든 뒷골목
둑 아랫길이 만든 뒷골목

원당로는 광복로가 지나는 봉화통로 삼거리에서 시작하여, 원당건널목에서 영주로와, 광시당 앞에서 번영로와, 성누가병원 앞 사거리에서 구성로와, 영주석재 앞 사거리에서 선비로와 교차하면서 서천에 이르는 길이다.

원당천의 유래와 수로변경
지금의 원당로는 원당천(元塘川)이란 하천이었다. 그런데 이 하천의 원래 이름은 원당천이 아니라, 사계(沙川)였다고 한다. 사계는 철탄산 동쪽 기슭에서 흘러온 물과 삽재 부근에서 내려오는 물이 경찰서 동부지구대 앞쯤에서 합수하여 하망동과 휴천동 사이를 흘러가 서천과 합류하던 물길이었다. 사계가 언제부터 원당천이라 불렀는지는 확실하지가 않지만, ‘원댕이라는 마을 이름에서 유추할 수 있다. ‘원댕이란 이름은 예전에 마을 뒤편에 있던 큰 절 마당에 있던 연못의 이름이 원당지(元塘池)에서 유래하는데, ‘원댕이는 하망동행정복지센터가 있는 마을이다.

시가지 복판을 관통하던 원당천은 수해의 염려도 있었지만 도시를 두 동강이 내는 형국이었다. 그래서 1982, 경일미래타운과 덕산빌라 사이를 잇던 산허리를 끊고 4.26의 물길을 뚫어 산 너머 외곽으로 돌린다. 시 승격 후 첫 번째 대역사(大役事)였다. 이로 인해 수해에 대한 불안을 떨쳐버렸을 뿐만 아니라, 동서로 양분되었던 시가지를 바로 연결해 주었으며, 남북을 잇는 큰길은 원활한 소통과 함께 가로변 상가를 조성하여 새로운 상권을 형성하였다. 그리고 새로 낸 원당천 뚝 옆으로 외곽도로를 만들어 시내의 교통 혼잡을 해소하게 하는 등 일석사조(一石四鳥)의 효과를 올린다.

사진에서 추억읽기
원당천 주변에 살았던 한 작가는 마을 앞을 흐르던 원당천이 없었다면 내 어린 시절의 좋았던 기억의 팔 할은 원인무효가 될 것이라고 했다. 맑은 시냇물, 봄이면 무리지어 흐르던 송사리떼, 여름이면 반두질의 추억담엔 그러려니 했다. 그런데 검투장의 역할을 끄집어낸다. 검투장?! 같이 놀다가 주도권 다툼이 있을 때면 천방에 갈래?’하며 자리를 박차고 일어나기도 했다는 말에 고개를 끄덕이며, ‘맞짱이란 단어를 떠올렸다. 그리고 누구하고 원당천을 걸었다.’며 자랑하던 중고생들의 연애 장소가 되었던 원당천의 그 때 그 시절을 추억해 보았다.

중학교 등하교 때 늘 원대이다리를 건너, ‘하망건널목을 지났었다는 한 원로 배우는 동창산업 뒷길을 벗어나 원당천 둑을 오르면, 뚝방 아래로 보이던, 금붕어를 키우던 가두리양식장이 늘 생각난다면서, ‘원대이다리(원당교)’는 하망건널목 옆이 아니라, 하망동성당과 원마트 사이쯤이었다고 기억을 떠올린다. 다리를 건너 둑을 비스듬히 타고 내려와 논둑길을 걸어 하망건널목을 건넜다고 한다. 그리고 성당 뒤편 끝순네사이의 뒷길에서부터 계속 이어지는 골목길은 뚝방 아래로 이어지던 작고 좁았던 통로의 흔적이라고 한다. 그 세로(細路)를 따라 걸어가다 보면 현재 스카이타운 사우나 쯤에 그 당시 영주에서 유일했던 얼음공장이 있었다고 한다.

얼음공장을 지나면 구 안동통로를 만난다. 구 안동통로는 현재 번영로이다. 여기서 원당천을 건너기 위해서는 시온교회 앞 사거리부터 뚝방까지 비탈길을 올라야 한다. 시온교회 옆에는 우리에게 캐시미어란 단어를 알게해준 신앙촌상회가 있었다. 그런데 안동통로를 이어주던 이 다리의 이름은 무엇이었을까? ‘하망교?’ ‘휴천교?’ 이사람 저사람 만나는 사람마다 물어도 본다. ‘영주시사(榮州市史)’에서도 찾을 수 없다. 그래서 하망교라 적어 본다. 하망교 아래엔 우리에게 늘 공포의 대상이었던 넝마주이가 있었다. 이들을 가리키는 또 다른 말은 양아치였다. ‘동냥아치의 준말이라는 것을 안 것은 한참 뒤의 일이지만, 그들과 만날까 겁이나 혼자서는 언제나 그쪽으로 지나는 길을 피해 다녔다.

이 오르막길 옆의 가게는 길 아래에 있었는데, 가게의 문은 양쪽에 있었다. 그래서 길에서는 가게로 계단을 밟고 내려가야 했지만, 가게의 반대편은 평지로 나갔다. 양복점도 있었고, 철물점도 있었는데, 복권 팔던 영주우표사도 있었다. 1960년대엔 우표수집이 유행이었다. 그 우표사가 아직도 있었다. 하지만 광시당 옆에 있는 우표사는 간판만 있을 뿐 곡물상회였다. 그런데 광시당에서 로또를 판다.

원당로 그리고 50년의 세월
옛 사진을 보며 촬영 시기가 언제쯤일까를 생각해 본다. 사진 속의 모습이 없어진 뚜렷한 것은 영보극장, 영주흥업회사, 시온교회, 읍교회(1953년 영주리에서 시작한 읍교회는 1981년 시민교회로 개명하여 휴천동으로 이전 건립)이고, 사진 속에 없는 것은 농협은행과 농협은행 뒤로 지어진 상가시장(소백쇼핑몰)이다. 그런데 없어진 기록보다 새로 생겨난 것들의 기록이 더 확실하다. 영주시사에 상가시장이 1970년에 건립되었다고 기록되어 있다. 또 시기를 짐작할 수 있는 것이 영주극장이다. 하나의 사진 속에 분수대 옆 영주극장아카데미극장 앞 영주극장이 공존하고 있었다. 그래서 옛 사진을 50년 전, 60년대 후반의 것으로 추측해 본다.

50년이란 세월은 많은 것을 변하게 하였다. 수로를 돌리기 이전에도 물이 자주 말랐던 원당천의 둑은 저절로 허물어졌다. 그 무렵 중앙초등학교 동편에 있던 논은 공터로 변하였다. 그 공터에는 천막극장이 지어지기도 했고, 또 선거 유세장이 되기도 하였다. 그리고 원당천 수로가 이전하면서 둑이 있던 자리엔 상가들이 먼저 들어서기 시작하면서 영주의 새로운 먹거리 촌을 형성한다. 공공건물이 들어선 것은 그 몇 해 후였다. 1978년 신영주교회가 터를 잡은 것을 제외하면 거의 수로 이전 이후였다. 이를 선도한 것은 1987년 건립한 영주JC회관과 1988년 설립한 하망동성당이었다. 그리고 그 전후하여 영주시노인회관, 새마을회관, 그랜드컨벤션웨딩홀 등이 만들어진다.

원당로가 복잡해지기 시작한 것은 ‘5일장과 원대이마을에 아파트단지가 들어서면서부터이다. 1990년부터 입주하기 시작한 코오롱아파트와 벌래고개와 남간고개 사이에 청구하이츠빌라, 화성라온빌, 세영첼시빌은 계속 지어지며 영주에게 도시다운 스카이라인을 선물해주었다.

새로운 활력을 찾아가는 원당로
삶에 변화가 생기는 것은 당연하다. 그러나 그 변화를 어떻게 자리매김하는 것은 그 변화 속애 살아가는 사람들의 몫이 아닐까? 원당로에 찾아온 5일장은 이제 영주 사람들이 당연히 적응해야 하는 몫이 되었다. 아이들과 연인들의 장소였던 곳이 이젠 삶의 터전이 되었다. 이곳에 처음 자리를 잡았던 시골 할멈들은 뒷골목으로 밀려나고, 큰길은 어느새 외지 상인들이 차지하는 장터가 되었다. 언젠가 외지 상인들을 다른 곳으로 유도하려고 시도한 적도 있었다. 물리적인 힘은 먹혀들어가지 않았다고 한다.

밤이 되면 이 길은 불빛이 번뜩인다. 원당로와 영동선 철길 사이에 숲을 조성하고 원당로불빛거리를 만들었기 때문이다. 연인들의 길을 만든 것일까? 불빛 사이로 운동 시설만 보일 뿐이다. 그리고 굴다리라 부르는 두 개의 지하차도에 벽화가 눈에 띈다. 하나는 동화의 나라를 그렸고, 또 하나는 무섬마을을 형상화하였다. 의도적인 그림일까? 아니면 너무 쉽게 생각한 것일까? 예전 천변에서 놀던 아이들도, 빨래하는 아낙의 모습도 그 어디에서 찾을 수 없었다. 원당로엔 아직 우리의 영()은 담아 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그냥 변화 속에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김덕우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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