기억은 해가 지날수록 사라지고 기록은 세월이 지날수록 소홀해지고

①롯데시네마 ②중앙시장 ③기독병원 ④성누가병원 ⑤남산초등학교 ⑥철도 기관차사무소 ⑦남산고개(촬영 이영규 기자)
①롯데시네마 ②중앙시장 ③기독병원 ④성누가병원 ⑤남산초등학교 ⑥철도 기관차사무소 ⑦남산고개(촬영 이영규 기자)
영주역이 있던 자리 ①롯데시네마 ②중앙시장 ③기독병원 ④영주할인마트 ⑤구성새마을 금고 ⑥영주농협 중앙지점 ⑦현대프라자 ⑧우리은행(구 한신사옥)
영주역이 있던 자리 ①롯데시네마 ②중앙시장 ③기독병원 ④영주할인마트 ⑤구성새마을 금고 ⑥영주농협 중앙지점 ⑦현대프라자 ⑧우리은행(구 한신사옥)
(촬영 이영규 기자)
구 영주역사와 철로의 철거(불바위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함) ①영광중 ②영광여고 ③제일교회 ④경찰서 ⑤영주초등학교 ⑥영주여고 ⑦동산교회
구 영주역사와 철로의 철거(불바위에서 촬영한 것으로 추정함) ①영광중 ②영광여고 ③제일교회 ④경찰서 ⑤영주초등학교 ⑥영주여고 ⑦동산교회

사람이 살고 있는 사회적 기반은 한 순간도 가만히 있지 않고 여러 가지 변동에 의해서 끊임없이 변화하고 있다. - B. 아우에로바흐/미메시스

구성로는 서천교에서 시작하여, 기독병원 앞을 지나 구성오거리, 성누가병원, 남산초등학교, 철도기관차사무소, 서원로와 만나는 조암교차로, 영주농협 퍼머스마켓 그리고 노벨리스코리아로 들어가는 적서로가 시작하는 지점에서 끝이 난다. 외곽도로인 경북대로(자동차전용도로)가 만들어지기 이전까지 국도 5호선 역할을 했던 영주의 간선(幹線) 도로였다.

구성(龜城)은 영주의 별칭
구성은 구산산성(龜山山城)의 줄임말이다. 조선 후기에 제작된 경상도지리지홍무갑술년에 돌로 쌓았다.”는 기록이 있다. 홍무갑술년은 1393년으로 조선 태조가 즉위한 지 2년이 되는 해이다. 그런데 이 책에는 시축이라고 기록하였지만, 대대적인 개축(改築)이 아니었을까 싶다. 김효정(金孝貞: 1383˜?)의 시에 보면 한 줄기 물이 돌아 옛 성을 안아 흐르는데, 산의 형세로 인하여 거북의 이름을 얻었다.”라고 하였다. 이것은 이미 고려 말기에 성의 흔적이 남아 있음을 의미하는 내용이다. 그리고 구성에서 볼 수 있는 다양한 성벽의 모습은 이 성이 여러 시대에 걸쳐 개축하였음을 확인할 수 있다. 그래서 만들어진 시기가 삼국시대에 까지 거슬러 올라 갈 수 있을 것 같다. 그리고 영주의 역사도 이 성이 조성된 이후 성 아래 취락이 발달한 것과 때를 같이 한 것으로 보인다. 구산의 동쪽마을을 성밑마을로 부르고 있는데, 지리적으로 육로의 중심이었던 이 마을이 발달하기 시작하면서, 불바위에서 뒤새까지 제방을 조성하며 영주 시가지의 면모가 조금씩 갖추어졌을 것으로 보인다. 영주의 지명은 내이(奈已), 내령(奈靈), 강주(剛州), 순안(順安) 등 여러 이름으로 불리었는데, 대동지지에 고려 성종 때에 구성(龜城)으로 불렀다는 기록이 있는 걸 보면 구성은 영주의 또 다른 이름이었던 셈이다.

그리고 구성공원의 조성에 대한 이야기는 조선일보 19231027일자에 구성공원 건축(龜城公園建築)’이란 제목으로 전해진다. “경북 영주군에서는 예전부터 구성공원을 설치하고 일반 인사의 수양에 도움을 주게 하였던 바 금번 가을에 특히 설비를 완전히 갖추기 위하여 관민 협력으로 조선식 이층 누각 여섯간을 건축한 바 오랫동안 끊이지 않는 관람자가 연이어 찾더라.” 여기서 조선식 이층 누각은 영주관아 문루였다가 구성으로 옮겨지은 가학루(駕鶴樓)’로 추정할 수 있다.

구성로의 시작은 버스정류장
현재 구성로는 영주역이 1973년 휴천동으로 이전하기 전까지 영주역의 플랫폼이었고, 중앙선 철길이었다. 이 철길이 육로로 바뀌어 가는 상황은 신문기사에서 볼 수 있다. 197733, 조선일보는 시승격을 준비하는 15개읍()()가 되면이라는 제목의 시리즈로 보도하고 있는데, 그 여섯 번째로 영주를 다루고 있다.

지난해 영주군은 38천만원의 예산으로 3의 도로를 포장하고 5·8의 가로(街路)축조와 두 곳의 상수도공사를 했으며, 가장 문제가 되었던 휴천(休川)리 등 시내 중심가에서 보기 흉하던 불량건물 130동도 철거하여 1차 시가(市街) 환경을 매듭지었다. 1975년 말까지 영주중심가를 가로질렀던 2m의 철로와 구영주역사를 철거하여 12천여평의 부지를 확보하여 상가와 주택지를 만들어 철로로 인한, 영주읍의 남과 북은 하나로 되었다.”

1973년 역 이전 이후, 그 철로를 들어내고, 높은 철둑을 평지를 만드는 일이 2년에 걸쳐 이루어진다. 그리고 길 옆으로 건물들이 지어진다. 이 육로의 개척에 맨 앞장을 선 것은 버스정류장이었다. 1975년 아카데미극장(현 삼성생명 자리) 맞은편에 있던 영주시외버스터미널은 구성로에서 서천교와 가장 가까운 곳(현 롯데시네마)에 자리를 잡고, 시내버스정류장(영주여객)은 기독병원 옆인 현 영주할인마트자리에 터를 마련한다. 그 후, 시외버스터미널은 이 자리에서 42년간 운영하다가 2017년 가흥동 현재의 자리로 이전을 하고, 시내버스정류장은 이 자리에서 10년 가까이 운영을 하다가 1980년 이전을 한 현 영주여객 자리에 터를 넓혀 합류를 한다.

구성로의 본격적인 시작은 1978영주육교의 건설부터이다. 그 해 5월에 영주농협 중앙지점이 신축 준공되었고, 19804월과 5월에 영주기독병원과 성누가병원이 신축 이전할 즈음 이 거리는 새로운 건물로 하나씩 채워나간다. 거의 3, 4층이었다. 그리고 1981년 한신상호신용금고 사옥(현 우리은행)6층 높이로 건축되는데, 그 당시 영주에서 가장 높은 빌딩이었다. 그 해 필자가 입대(入隊)를 하는데, 친구들 중에 가장 늦게 가는 입영(入營)이라, 친구들이 거의 군대에 가 있었기에 여자동창들이 송별회를 해 주게 되었다. 그 때 불려간 곳이 구성로에 있는 이라는 레스토랑이었다. 소주나 막걸리로 해주었던 송별회를 맥주로 받게 되는 호사(好事)를 누리게 되었다. 하지만 그 곳에서 내가 생각한 호사는 촌놈이 호강한다는 것이었다. “이란 카페는 영주가 도시가 다 되었네!”하는 것을 느끼게 해 주었기 때문이었다. 그렇게 구성로는 영주를 도시로 만들어 갔다.

기억은 세대마다 다르다.
우리가 예전을 생각하는 것은 자기만의 기억이다. 1980년의 구성로를 떠 올릴 때, 그 당시 30대나 40대는 구성로와 인접한 골목길을 생각한다. 그 뒷길에 주점이 있었고, 시장이 있었기 때문이다. 지금은 없어진 영보극장 주변에서 혹은 순대골목에서 술을 마시다가, 포장도 안 된 구성로 공터에 있던 포장마차에서 입가심을 했다는 것이다. 순대골목에는 순대집도 있었지만, 건물마다 지하에 쌀롱이라 불리는 고급 술집도 많았다.

하지만 그 당시 10대를 지냈던 이들의 추억은 이 공터에서 봤던 서커스단의 모습이다. 영주여객이 떠난 뒤, 영주할인마트자리는 오랫동안 공터였다. 그런데 그 자리에 서커스단이 자주 왔었다고 한다. 옛이야기는 늘 코끼리나 원숭이로 시작하지만, 그 끝은 거의 몰래 들어가려다가 잡혀서 벌을 받은 친구들의 이야기이다. 그리고 아이들이 개구멍을 만들지 못하게 철조망을 둘레에 쳤었다는 기억까지 소상하게 떠올린다. 그리고 짙은 화장을 한 여배우들이 인상적이었던 여성국극단도 왔었다고 한다.

구성오거리를 지날 때, 예식장을 떠올리는 이도 있다. 그것은 지금은 모두 다른 용도로 바뀌었지만, 성누가병원 길 건너에 영주예식장궁전예식장이 나란히 있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1980년대와 1990년대의 이 길의 일요일은 늘 붐비는 곳이었다. 그리고 영주여객을 지나면 주택가이다. 1970년대 말부터 들어서기 시작한 집들은 1980년대엔 영주역 뒤편에서 남산고개까지 꽉 채우게 된다. 이곳에 들어서는 집들은 이전에 많이 봤던 목조건축이 아니었다. 슬라브 지붕의 집이었다. 집장사들이 지어준 이 비슷비슷한 집들과 3층짜리 연립주택은 예식장과 함께 구성로가 만들어 준 신혼(新婚)의 추억이었다.

기억과 기록, 어렴풋함과 아쉬움
구성오거리에서 구성로를 따라 서천교 쪽으로 향할 때면 소백산이 눈에 들어온다. 빌딩 사이로 눈 내린 소백산을 아침마다 감상할 수 있는 곳이 구성로이다.

해질녘 구성로를 거닐어 본다. 이 건물은 언제 때의 것일까 찾아본다. 하지만 어느 건물에서도 건물 준공연도를 밝힌 초석(礎石)을 발견할 수 없다. 한신사옥(1981), 구성새마을금고(1986), 현대프라자(1997) 정도이다. 문득 순대골목이 시작된 해를 동판에 새겨 골목길 바닥에 박아놓았다는 이야기를 들은 것 같아서 사진이나 찍을 요량으로 그 곳을 찾아보았다. ‘내가 잘못 들은 것일까?’ 몇 차례 왕복을 해 보지만 그 동판을 찾을 수가 없었다. 그것도 소중한 기록인데, 우리가 기록을 너무 등한시하는 것은 아닐까? 비판도 해 본다. 영문을 모르겠다. 내 기억을 탓할 수밖에.

김덕우 / 작가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