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람이 길을 만들지만, 사람은 그 길에서 더 많이 배운다.

빈곤과 희망은 어머니와 딸이다. 딸과 즐겁게 얘기하고 있으면, 어머니 쪽을 잊는다.- J. 파올로/아폴리즘

①영주역 ②홈플러스 ③남부육거리 ④ 학사골목 ⑤남부초등학교 ⑥148아트스퀘어 ⑦주차장 ⑧관수대 ⑨제2가흥교(촬영 이영규 기자)
①영주역 ②홈플러스 ③남부육거리 ④ 학사골목 ⑤남부초등학교 ⑥148아트스퀘어 ⑦주차장 ⑧관수대 ⑨제2가흥교(촬영 이영규 기자)
영주제조창과 영주시가지(1970년 11월) ①영광중 ②가학루 ③아카데미모텔 ④영주초등학교 ⑤아카데미극장 ⑥영주극장 ⑦휴천동성당 ⑧영주여고 ⑨동산교회 ⑩동산여중 ⑪동부초 ⑫영주중 ⑬영주역

대학로는 영주역에서 남부육거리, 남부초등학교, 제2가흥교, 시민운동장, 영주호텔, 영주종합터미널 앞을 지나 신재로(영주제일고 앞길)와 만나는 서부삼거리까지의 길이다. ‘대학로’란 이름은 ‘경북전문대학교를 지나는 이 길이 영주의 새로운 문화를 만들어 갈 것’이라는 바람이 담겨져 있다.

영주 새 구상

신영주의 탄생
1963년 영주남부초등학교 개교, 1964년 철도국 이전과 1974년 영주지방철도청 승격, 1970년 영주연초제조창 준공, 1971년 영주전문학교(경북전문대학교) 설립, 1973년 영주역 이전, 1980년 영주시 승격과 시청 준공 등은 새로운 영주를 알리는 역사(役事)였다. 이 새로운 영주의 시작이 모두 휴천2동에서 이루어졌다. 그리고 휴천2동은 신영주의 중심이 되었고, 영주동과 하망동은 영주의 중심에서 뒤안길로 밀려나게 된다.

이 구상은 1961년 영주대홍수의 복구사업이 진행되면서 이미 시작이 된 듯하다. 철도 이설과 영주역 이전도 이 때 결정되었다. 직강(直江) 공사로 만들어진 ‘옛 서천’ 하천부지에 공영주택과 공설운동장 건설을 하면서 세무서, 학교, 연초제조창 등 시설물을 유치할 계획도 세운 듯하다.

하지만 안타까움도 있었다. 당시 영주읍 지방의회 의장을 역임했던 송시익은 1978년 펴낸 『내가 걸어온 영주 반세기』에서 그의 심정을 이렇게 적었다. “영주건설의 조감도를 주야로 구상하였다. 철도의 이설 계획과 더불어 수해로 폐허가 된 영주를 이번 기회를 통해 전화위복이 될 수 있도록 해야 했다.” 하지만 송시익 등 영주사람들의 의견은 중앙 정부의 뜻을 이겨내지 못하였다고 한다. 지방민들은 ‘지도 영주의 새 구상’에서 붉은 점선으로표시한 장소로 철도이설을 희망하였으나 정부는 푸른색으로 그려진 현재의 노선을 선택하였다. 필자는 이산으로 새로운 철도를 놓아야 하는 경비에 대한 부담 때문에 그렇게 추진된 것 같지만, 철도로 인해 영주시가지를 삼분해 버리게 되었다며 안타까워했다.

경북전문대학교 입구에 있는 관수대
마애여래좌상

사라진 남산들
신영주는 서천이 돌아 흐르는 들이었다. 하지만 어디에서 꺾이고, 어디가 깊은 물이었는지 그 흐름을 기억하는 이가 없다. 옛 지도를 보면, ‘휴천동성당’ 쯤에서 ‘홈플러스’와 ‘남부초등학교’를 거쳐 ‘경북전문대학’ 앞으로 흘렀을 것이란 추측을 해 볼 정도이다. 2012년 조현두는 ‘죽계의 달빛은 안개를 씻고’에서 “김두석(金斗錫)의 초계구곡(草溪九曲)”을 발표한 적이 있었다. 김두석은 구한말 ‘영남만인소(1880년)’ 거사에 참가한 ‘지천(경북전문대학 앞마을)’에 살았던 선비였기에 ‘물의 흐름을 알아낼 수 있지 않을까?’하는 기대를 해 보았다. 하지만 이 시에서 알아낼 수 있는 것은 1곡이 동구대(東龜臺)와 서구대(西龜臺) 사이이고, 9곡이 옛날 ‘서대천(西大川)’ 위치인 ‘영주축협 한우프라자’ 쯤 일 것 같다는 것만 확인할 수 있었다.

현재 지리에서 그 흔적을 살필 수 있는 것은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504호로 지정된 마애여래좌상이었다. 경북전문대학교 정문 서쪽에 예전에 쇠전이 섰던 대형 주차장이 있다. 주차장 남쪽 산기슭에 ‘관수대(觀水臺)’라는 글씨가 새겨진 바위를 찾을 수 있는데, 마애불은 관수대에서 서쪽으로 약 10여m 떨어진 산 중턱에 있다. 마애여래좌상이 새겨진 바위 앞에 서면, 서천 건너편으로 ‘영주 가흥리 마애삼존불상(보물 제221호)’이 보인다. 옛 물길은 관수대 아래에서 삼존불 앞으로 흐르지 않았을까? 그리고 또 그 물은 물길을 꺾어 한정마을 쪽으로 흘렀을 것이고….

영주 발전의 역군들
신영주의 본격적인 변모는 1973년 영주역이 이전하면서부터인 것 같다. ‘연초제조창과 영주시가지’ 사진을 보면 아직 신영주는 듬성듬성하다. 꽃동산로터리도 보이질 않고, 역전(驛前)은 허허 벌판이다. 영주역이 생기면서 승객들을 위해 만들어진 상가들이 신영주의 변화를 주도했을 것이다. 그리고 제조창 앞에 조성된 상가와 역전에 조성된 상가가 이어지면서 대학로를 만들었을 것이다. 하지만 주 고객들은 역무원과 제조창 직원들이 아니었을까? 걸어서 출퇴근하는 그들에게, 빨리 귀가를 하고 싶은 그들에게 구영주까지의 거리는 멀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1980˜90년대 영주시 거주 학생들의 부모 직업을 조사하면 거의 대부분이 철도공무원과 연초제조창 직원이었다. 영주지방철도청이 생기면서, 그 산하(중앙선, 영동선, 경북선)에서 근무를 하는 역무원들은 그 거주지를 영주로 옮겨왔고, 제조창은 거의 영주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 영주에서 보금자리를 튼, 그들의 꿈은 무엇이었을까? 그들에게 가장 소중한 것은 가족이었고, 그들의 한(限)은 좀 더 배우지 못함이었다. 걔 중엔 집안 형편 때문에 월남전까지 참전한 사람도 많았다. 없어서 배우지 못한 그들의 꿈은 ‘내 자식은 남보란 듯이 가르치자.’는 것이 아니었을까? 주야(晝夜)를 넘나드는 근무를 하면서도 어금니를 물고, 선술집에서 막걸리 한 잔으로 자신을 달래며 오직 자식에게 미래에 걸지 않았을까? 그 무렵 영주의 또 다른 풍경은 피아노교습소였다. 골목마다 피아노 소리가 들렸다. 아마도 그 때 그 아버지들은 트로트 가사 한 구절을 외우듯, ‘소녀의 기도’ 한 소절쯤은 흥얼거렸을 지도 모른다. 그리고 가족들에게 보금자리를 만들어 주어야 했다. 신영주 공터를 채워간 집들은 그들이 만든 보금자리였을 것이다.

가난한 인재들의 배움터
1969년부터 대학입학예비고사가 실시됐다. 본고사보다 먼저 보는 시험이라고 해서 예비고사란 이름이 붙었는데, 이 시험에서 ‘커트라인’을 통과해야 대학에 지원해 본고사를 치를 수 있었다. 학교의 보충수업도 학원도 없던 영주에서 예비고사의 통과는 쉬운 일이 아니었다. 대학은 가정의 뒷받침이 없으면 여간해서 갈 수 있는 곳이 아니었다. 그래서 영주전문학교의 설립은 영주사람들에게 큰 선물이었다. 더구나 이 학교는 야간부까지 있어서 대학의 문턱을 넘지 못한 직장인들에게 설움을 달래주는 귀한 곳이었다. 그리고 시골에서 대학생의 낭만까지 생각한다는 것은 욕심이었다. 서천 둑을 걷거나, 제조창 앞길(대학로) 건너편 골목길에 형성된 학사골목에서 위안을 삼을 수밖에 없었다.

영주전문학교는 영주 학생들에게만 준 선물이 아니었다. 인근 지역은 물론 영주보다 더 작은 시골에 사는 학생들에게 배움의 갈증을 풀어 주는 곳이었다. 하지만 학교를 운영하는 입장에서 어려움이 많았는데, 그 첫 번째가 ‘벽촌(僻村)까지 교수님 모셔오기’였다고 한다. 그래서 그 여건을 조성하기 위해 교수님들의 숙소부터 만들었다. 그 숙소는 아직 학사골목 입구에 있다.

‘대학로’의 마침표! 제2가흥교
1980년, 영주시가 출발한다. 영주역과 남부육거리 사이의 큰 건물은 그 무렵 지어졌을 것이다. ‘언제 세워진 건물일까?’하면서 돌아보았지만, 초석(礎石)을 찾을 수 없다. 리치호텔 한 곳만 “2003년”이라고 새겨져 있다. 그런데 ‘남부6거리’ 너머, 남부초등학교 앞길은 1980년대에도 포장이 되지 않았던 것 같다는 얘기를 한다. 어쩌면 이 길이 끝이 전문대학 앞에서 막혔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을 하며 제2가흥교 건설연도를 인터넷에서 검색을 했지만 찾을 수 없다. 마음이 급해서 한밤중에 차를 몰고 나섰다. 장대비가 내린다. 1992년이었다. 2017년 ‘제2가흥교’의 평균 일일 교통량 21,300대였는데, 그 해 영주시의 교량 중 가장 많은 곳이었다고 한다. 다리의 건설은 이 길을 영주의 관문으로 만든 된 셈이다. 시청은 거리를 만들었지만, ‘대학로’의 완성은 ‘제2가흥교’ 건설이었는 생각이 문득 들었다.

이제 서천의 교량 중에서 어떤 다리가 교통량이 제일 많을까? 서천교? 영주교? 역사는 계속 변화한다. 새로운 택지가 만들어지고, ‘대학로’는 ‘영주종합터미널’까지 확장된다. 이제 기차역과 버스역을 연결하는 ‘대학로’가 되었다. 이 길에 서서 앞으로 변화할 영주의 새문화에 대한 기대를 해 본다.

김덕우 / 작가

저작권자 © 영주시민신문(www.yjinews.com) 무단전재 및 수집, 재배포금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