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월은 옛길을 추억 속에 묻어버리고 꿈은 새 길을 삶 속으로 드러내고

기억도 번식을 한다. 뚜렷하고도 섬세한 현상으로 시작하였다가 격렬히 동작하며 시동하면 필름처럼 앞뒤 자유자재로 움직일 수 있다. - J. 스타인벡

①영주시의회 ②동산정형외과 ③농협은행 ④구성오거리 ⑤아카데미여관 ⑥영주우체국 ⑦영주상공회의소
(촬영 이영규 기자)
①예천통로 ②우리치과 ③삼성생명 ④정도전 생가터 ⑤봉화통로 ⑥세중여행사
(촬영 이영규 기자)

중앙로는 영주시의회 앞에서 시작하여 구성오거리와 세무서사거리를 지나 영주세무서에 이르는 길이다. 구도심에서 중심 길이고, 신영주로 가는 가장 큰 길이다.

1915년 영주면 지도

언제부터 중앙통이었을까?
중앙통(中央通)이란 말은 왠지 일본인들이 지은 이름 같다. 충무로의 일제 때 이름인 본정통(本町通)이 떠오르기 때문이다. 그리고 1915년 지도를 보아도 중앙통이 없다. 일제 강점기에 하망리가 형성되면서 영주리와 경계가 되는 큰길이 된 것 같다. 예전의 중앙통은 구성오거리까지였다. 여기서 만나는 구성로(서천에서 남산고개까지의 길)는 예전에 철길이었고, 1961년 신작로(新作路)가 생기기 전까지 철길 너머는 영교(榮橋)로 이어지는 예천통로였다.

영교. 서천 물길을 돌리기 전의 모습
영교 잔여물 철거(2003년)

구성오거리 사진을 보면 옛길의 흔적이 있다. ‘세븐일레븐’과 ‘우리치과’ 사이의 골목길(구성로 337번길)이 예천통로이다. 삼성생명 뒤를 지나 아카데미여관까지 가면 영교로 이어진다. 큰 길이 생기고, 건물이 세워지면서 옛길은 좁아진 것 같다. 그리고 반대편에는 봉화통로가 있었다. 세중여행사 옆으로 난 골목길(중앙로 86번길)이다.

두 길은 모두 지금은 오거리의 다섯 갈래의 길에 포함되지도 않은 좁은 길이다. 하지만 예천통로, 봉화통로였다는 예전의 이력은 남아 있다. 왕족발, 숯불갈비, 아귀찜, 감자탕 등 맛집들이 즐비하다. 그리고 아카데미여관은 높은 굴뚝만큼 역사가 오래 되었다. 영주생사공장(현 강변아파트 1차)을 준비하던 사람들이 이곳에 묵었다고 하니 50년은 넘었다. 영주에 호텔이 없던 시절, 귀한 손님들은 거의 이곳에서 묵었다고 한다. 그리고 원래 이마을은 구산성(城舊山) 아래 성하(城下) 취락(聚落)으로 발달된 곳이었고, 영주수해 전까지 여관 옆엔 정도전 생가인 ‘삼판서고택’이 있었다.

1961년 수해이후 서천 직강(直江) 공사를 하고 물길을 돌린 후, 영주에서 가장 큰 다리였던 ‘영교’는 쓸모가 없게 된다. 그래서 다리는 도로를 만들면서 허물고, 일부만 자동차정비공장 지붕이 되었다가, 그 남은 부분도 2003년 영주상공회의소 회관을 신축하면서 뜯어낸다.

굴다리(현 구성오거리)

영주의 관문(關門) 중앙통
영주에 온 사람들이 가장 처음 만나게 되는 거리가 중앙통이다. 더 큰 도회지에서 온 사람에겐 정겨운 풍경이 될 수도 있겠지만, 영주여객을 이용하는 시골사람들에게 영주라는 도시를 만나게 하는 첫 공간이다. 요즘 영주여객을 이용한 대부분의 사람이 중앙통에서 내린다. 그들에게 이곳은 평소 경험하지 않았던 풍경일 것이다. 4차선 넓은 길, 덩치가 큰 건물, 어깨를 부딪치며 오가는 사람…. 모두가 그들에게 구경거리일 것이다. 그래서 “정신 차리고, 딱 붙어서 따라와야 한다.”며 어머니는 아이에게 주의를 주기도 한다.

1970년대까지 영주여객 정류장이 장춘당약국 건너편에 있었고, 시외버스터미널은 굴다리(현 구성오거리에 철교가 있었다)를 지나 영주극장(현 국민건강보험공단 자리) 옆에 있었다. 몇 개의 플랫 홈까지 갖춘 정류장이었다. 그 자리는 아직도 공터이다. 그 맞은편에 아카데미극장(현 삼성생명 자리)이 있었다. 이 두 극장은 영주에 온 외지인에겐 번듯한 도시의 모습을 보여 주었을 것 같다. 이 두 극장에 특별한 “쇼”를 한다거나 소문난 영화가 오면 인근 지역 사람들이 오기도 했다. “미워도 다시 한 번”이란 영화를 상영했을 때, 봉화에 살던 친척들이 떼를 지어 나와, 우리 집에서 한나절을 보내기도 했다.

한 달에 한 두 번은 학교에서 단체로 영화 관람을 했었다. 1970년 우리가 영주에서 누릴 수 있는 최고의 문화생활이었다. “벤허”나 “닥터 지바고” 등 지금 기억하는 명화는 그 때 거의 보았다. 우리는 이를 ‘문화교실’이라 했다. 중학생이었던 당시에는 이해도 잘 하지 못했던 내용이었지만, 차츰 영화의 매력에 빠지게 한 소중한 교육이었다. 문화교실을 갈 때는 학교 운동장에서부터 원당천 천방을 따라 줄을 지어 걸었다. 그리고 영화가 시작되기 전, 애국가가 나오면 모두가 차렷 자세로 제창(齊唱)을 했다. 이것이 몸에 배어 서울의 한 극장에서 애국가를 따라하다가 촌놈이 되어버린 적이 있었다. 아주 씩씩하게 “동해˜”하다가 나에게 쏟아지는 주변의 시선에 ….

시절마다의 최고 가치를 향유하던 길
친구들에게 중앙통의 추억을 물어 보았다. 초등학교 시절 ‘가설극장’을 얘기한다. 영사막을 설치 한 곳은 백마가구 앞쯤이었던 것 같다. 낡은 필름 탓에 화면엔 늘 비가 내렸고, 영화의 내용은 생각나지 않지만, 대한 뉴스에서 왼손잡이 권투선수 김기수가 세계챔피언이 되는 것은 기억이 난다. 그리고 포장은 되지 않았지만, 1970년대까지 영주에서 가장 넓은 길이었던 중앙통은 늘 장사꾼들로 넘치는 큰 시장이었다. 그래서 아이들은 골목길로 쫓겨나갈 수밖에 없었다.

중앙교회 앞마당은 좋은 놀이터였다. 지금은 좀 좁게 느껴지는 마당이지만, 그 때 아이들이 놀기에는 충분했다. 거기서 오징어를 그려 놀이를 했다. 오징어는 공격과 방어를 전략적으로 해야 하는 1960년대에 많이 했던 놀이였다. 중앙초등학교 후문에서 중앙로 사이에 있는 중앙교회는 1929년에 설립된 오래된 교회이다.

1950년대를 회상하는 선배들은 화교(華僑)들을 이야기 한다. 중앙로의 시작지점인 4층 병원건물 자리에 있던 중화요리집, 중앙식육식당쯤에 있었던 만두가게와 포목점이 그들의 공간이었다. 이야기에 나오는 “비단장수 왕서방”이 영주에도 있었던 셈이다. 그리고 20세기 말에는 가구점이 많았다. 지금은 동서가구와 백마가구 밖에 남지 않았지만, 그 땐 전국의 유명한 메이커는 이 길에 다 있었다. 하지만 21세기가 되면서 이 길은 병원과 약국의 거리로 변하였다. 이 거리는 한 시절 풍미했던 삶을 간직해 주었던 유행의 길인 셈이다.

영신당
장터 풍경

흔적만 남기고 사라진 도랑
동산정형외과 자리엔 예전에 ‘영신당’이란 안경점이 있었다. 그리고 영신당과 중앙분식 사이엔 물이 퐁퐁 솟아오르는 샘이 있었다. 그래서 이곳을 지날 때면 늘 발을 헹굴 수 있었다. 그런데 언제부터였던가? 길이 정비되면서 부터인가? 그 샘물을 본 기억도 가물가물하고, 길가에 조그만 도랑도 있었던 것 같고…. 중앙분식이 쫄면으로 유명세를 타던 21세기가 시작될 무렵엔 이미 그 도랑은 길 아래로 숨어버렸다.

영주시가지는 길마다 도랑이 있었다. 철탄산 아래의 골짜기마다 물길이 있었기 때문이다. 관사골에서 흘러내린 물은 영광중학교 옆으로, 숯골에서 흘러내린 물은 제일교회 옆을 지나 남서울예식장 뒤편으로, 신사골에서 내린 물은 영주초등학교 옆으로, 사례골을 지난 물은 중앙초등 옆으로 흐르면서 물길을 만들었다. 그 도랑에 흐르던 물은 시가지를 거치면서 검게 변하면서 철둑 앞에서 다 만났다. 그래서 현재 기독병원 뒷길에서 파리바게트 부근까지는 제법 큰 도랑을 이루었다.

그 도랑물은 굴다리(구성오거리 자리)를 지나 예천 통로 옆으로 흘렀는데, 도랑이 제법 넓었다고 한다. 지금 신영주 입구로 이사 간 ‘영주석재’가 1970년대 초까지 ‘1001안경점’ 자리에 있었다. 어린 시절 그곳에서 보낸 박철서(66세)씨는 석재 공장에 갈 때마다 현대광고사 골목길 앞에 있는 나무다리를 건너서 공장으로 갔었다고 회상을 한다. 도랑이 없어진 것은 신영주로 영주역이 옮겨지면서 도로가 포장이 될 때인 것 같다고 한다.

그런데 지금은 그 도랑을 볼 수가 없다. 거리엔 여러 가지의 맨홀 뚜껑만 보인다. 정화조, 우수, 오수, 통신 등 수없이 많다. 길이 도랑을 다 묻어 버린 것이다. 묻혀버린 것이 도랑이라는 물길뿐일까? 예천통로, 봉화통로 옛길도 새 길에 밀려 뒷길이 되어버렸다. 그리고 세월도, 추억도, 그 시절의 꿈도 옛길과 함께 묻혀버린 것 같다.

우리치과 옆 골목길로 들어선다. 족발집 앞, 지하에 ‘바바쌀롱’이 있었다. 이름이 쌀롱이지 노래주점 정도의 선술집이었다. 그 주점을 운영하던 친구도 벌써 고인이 되었다. 족발집을 지나 닭발구이가 맛있는 포장집 문을 민다. “어이, 요즘 왜 그리 못 봐!”하며, 친구가 불쑥 나올 것 같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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