의지와 노력으로 절망을 이겨낸 꿈과 희망의 길

길을 가다가 돌이 나타나면. 약자는 그것을 걸림돌이라 하고, 강자는 그것을 디딤돌이라고 말한다. - T. 카알라일

①시민회관 ② 구수산 ③구학봉 ④구성공원 ⑤휴천동성당 ⑥송광제제소(옛터) ⑦영주종합시장 ⑧번개시장 ⑨영주역(촬영 이영규 기자)
①시민회관 ② 구수산 ③구학봉 ④구성공원 ⑤휴천동성당 ⑥송광제제소(옛터) ⑦영주종합시장 ⑧번개시장 ⑨영주역(촬영 이영규 기자)

선비로는 서천교에서 시민회관, 영주역을 지나 남산육교에 이르는 길이다. 1961년 영주대홍수로 서천(西川) 물길이 신작로가 된 우리 지역에서 변화가 가장 많았던 길이다. 이 이름은 소수서원, 선비촌 등 선비의 고장 이미지를 높이고자 명명했다.

 

수해상황도(매일신문)
가학루로 피신한 주민(동아일보)

1961년 7월 11일 영주대홍수

영주현대사에서 가장 큰 사건은 1961년 7월 11일에 일어난 영주대홍수일 것이다. 매일신문은 7월 13일자 신문에 “수해상황도”와 함께 이렇게 보도하였다.

“11일 상오 5시 20분경 영주읍 서편을 흐르는 서천 제방 ①이터져 영주6리를 삼키고, 계속해서 6시 20분경엔 예천가도와 배수구 ②로 냇물이 역류 시가지로 흘러갔으며, 시가지에서 내려오는 빗물과 함께 읍의 3분지 2를 물바다로 만들었다. 이 물난리를 해결하기 위해 9시 30분경 경찰은 영주 동부를 흐르고 있는 하망천 제방 ③을 4-5미터 절개하여 위기를 면했으나, 이 물은 남천들 일대 논밭을 휘몰아 중앙선 철도 ④를 파괴하고 휴천리 일대의 전답을 휩쓸었다.”

이 기사에서 서천제방 ①은 불바위 북쪽(구성마을)을, 예천가도는 감리교회와 아카데미장 앞길을 말한다. 그리고 ③의 지점은 원당로변의 아모르예식장 쯤으로 여겨진다. 그렇게 갑자기 닥친 수마(水磨)에 철탄산과 구성공원 등지로 피신했던 사람들은 황톳물에 잠겨가는 마을을 그저 바라볼 수밖에 없었다. 물난리의 원인은 소백산 골짜기에서 흘러내린 물이 모두 서천으로 합수되는 것이 첫 번째 이유이고, 사행천(蛇行川)인 서천(西川)에 토사가 쌓여 천정천(天井川)이 되면서 제방이 폭우를 감당해내지 못한 것이 두 번째 이유였다.

수해는 영주를 폐허로 만들었다. 그 며칠 후, 영주를 방문한 박정희(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소장은 수해 현장을 돌아보다가 “저길 자르지.”하며, 가흥동 한절마 뒷산을 절개하는 직강공사를 지시 하게 된다. 그리고 육군 제133공병대대와 해병대 제1상륙사단 공병대 등 군인 700여명이 투입되어 1962년 3월까지 사업을 진행한다. 준공식은 이때 만든 공설운동장(현 영주동 주공아파트)에서 열렸다. 박정희 장군과 송요찬 내각수반, 주한 유엔군 사령관과 외교 사절단까지 참석했던 역사적 자리였다. 영주 주민들은 스탠드를 꽉 메우면서 그 감사의 마음을 전했다.

 

1974년 영주역 스탬프

공설운동장과 생사(生絲)공장

공설운동장은 1984년 시민운동장이 준공될 때까지 20여년동안 영주의 광장이었다. 박정희장군도 대통령이 되어 이곳을 다시 방문하였다. 그 때 영주주민들은 지난 은혜에 보답하듯 운동장을 꽉 메웠다. 그리고 체육대회가 열리면 학교마다 잔디가 심어진 스탠드에 줄맞춰 앉아 교가를 목 놓아 불렀다. 마스게임은 시내학교의 몫이었다.

영주역이 휴천동을 옮겨지면서 군대(軍隊) 입영(入營) 집결지기 되기도 했다. 인원파악을 마치면 역까지 선비로를 따라 행진을 했다. 먹을 것을 사들고 온 늙은 어머니는 이동하는 무리에서 아들을 찾다가 “˜야!” 히며 울먹이면서 행렬을 따르는 모습은 보는 이들의 눈시울을 뜨겁게 하기도 했다.

공성운동장 뒤, 현 강변타운 자리엔 생사공장이 있었다. 이 공장에서 나오는 번데기는 우리들의 중요한 간식거리였다. 저녁이 되면 여공들이 이 길로 쏟아져 나왔고, 여가를 보낼 장소가 마땅하지 않았던 시절, 서천 뚝방길은 그녀들의 차지였다.

 

1915년 영주지도
1963년 항공사진

물길에 세워지는 신영주의 구상

산을 잘라 폭포를 만들면서 영주는 수해의 위험에서 벗어나게 된다. 하지만 시가지의 모습은 크게 바뀌어 버린다. 대정(大正) 4년(경성부립도서관 종로분관 1915.4.1. 소장)만든 지도를 보면 예전의 물길이 제대로 볼 수 있다. 서천은 현재의 영주역을 거쳐 경북전문대학 앞으로 흘렀다. 하천이 신영주 일대를 거의 뒤덮고 있다. 물길을 돌리고 남은 자리엔 모래벌판뿐이었다. 영주 입장에서는 수해(水害)가 남긴 또 다른 선물이었다. 위기가 희망으로 바뀐 셈이다. 1963년 영주시가지를 찍은 항공사진을 보면 새로운 영주역(휴천동)과 역으로 이어지는 둑의 모습이 보인다. 직강 공사를 하며 물이 흐르던 남산들에 세워질 새로운 도시를 바로 구상한 것 같다.

직강 공사보다 시급했던 일은 650여 채의 ‘수해복구 공영주택’의 건설이었다. 1963년 사진을 보면 휴천동 일대에 크기가 같은 집들이 많이 보인다. 아마도 이 주택의 모습인 것 같다. 상망동(향교골)의 ‘재건주택’과 영주1동(숫골)의 ‘문화주택’도 그 때 지어진 공영주택이다.

그 무렵 휴천동성당이 1963년 봉헌식을 갖고, 송광제재소가 휴천동 642번지에 터를 잡으면서 신영주 시대를 재촉한다. 그리고 ‘영주종합시장’은 1967년 신영주 역사(驛舍)가 건립되면서 몇몇 상인들이 모이면서 시작된다. 1968년 블록을 쌓고, 슬라브 지붕을 덮은 세 동의 건물로 시작하여 1970년에 상설시장이 된다. 현재의 모습을 갖춘 것은 1983년이다.

1973년 역이 옮겨진 이후 신영주의 발전은 급물살을 탄다. 1970년 영주연초제조창(현 아트스퀘어148)과 1972년 영주경상전문학교(현 경북전문대학교)가 이미 문을 연 상태였기 때문에 ‘영주종합시장’ 주변은 늘 북적였다. 저녁이 되면 묵호항에서 가져온 문어가 숙회(熟鱠 )가 되어 번개처럼 시장을 만들었다. 그래서 번개시장(농협은행 앞 골목)이 되었다.

그리고 1982년 1월 5일, 야간통행금지가 해제와 함게 신영주는 화려하게 날개를 폈다. 광복이 되자 「미군정 포고령 1호」에 따라 치안 및 질서 유지를 명목으로 시작된 이 제도는 크리스마스 이브를 제외한 매일 밤 자정부터 이튿날 새벽 4시까지 사람들의 통행을 전면 금지하는 것이었다. 이 ‘통금(通禁) 해제는 밤차에서 내릴 때, 손에 찍어주던 ‘야간통행 허가 스탬프 확인 도장’을 이제 받을 필요도 없어졌고, 역전만 환했던 풍경을 신영주 전체를 불야성(不夜城)으로 만들어 버렸다.

 

동구대와 서구대 풍경

새로운 문화에 도전하는 선비로

동구대(東龜臺)와 서구대(西龜臺)를 배경으로 자전거를 옆에 세우고 찍은 멋스러운 사진은 1950년대쯤으로 보인다. 이 사진을 찍은 위치는 시민회관 광장쯤이 아니었을까? 이곳은 옛 영주의 가장 아름다운 풍경 중의 하나였다. 동구대 아래 쪽박소는 늘 푸른 물이 감돌고, 서구대는 소지왕과 벽화낭자의 이야기가 깃든 무신탑(無信塔)이 있던 곳이었다. 또 영주문화예술회관이 있는 구수산(龜首山)과 정도전생가가 있는 구학봉(龜鶴峰), 그리고 구성공원(龜城公園)은 원래 하나의 산줄기였다. 구수산과 구학봉은 1961년 직강공사로 끊었고, 구학봉과 구성공원은 용(龍)이 끊었다는 전설이 전해 온다. 그래서 옛 영주사람들은 그 이야기까지 사랑했던 곳이었다.

하지만 물이 흐르던 자리에 공설운동장이 만들어졌다가 다시 그 자리에 1984년 영주동주공아파트와 영주시민회관이 지어진다. 그리고 생사공장 자리엔 1990년 영주 최초 고층아파트인 강변타운이 세워진다. 엘리베이터가 있는 아파트가 만들어진 것이다. 그리고 몇 해 후 실내풀장을 갖는 스포츠 센터가 그 옆 동진아파트 지하에 만들어진다. 그렇게 영주의 새로운 문화를 조성하면서 선비로는 문화가 흐르는 꿈과 희망이 가득한 길이 되었다.

그런데 21세기가 되어 서천 너머에 새로운 택지가 조성되면서 화려했던 20년을 넘겨주고 변방으로 가야하는 기로에 서게 되었다. 이제 선비로에서 영주의 새로운 중심문화를 다시 구상해야할 시점이 된 것이다. 그 한 방법으로 ‘선비로’답게 영주문화예술회관, 정도전생가, 시민회관, 구성공원을 동서(東西) 잇는 문화 밸트를 만들면 어떨까 싶다. 위기는 항상 그것을 극복하는데 의미가 더 있기 때문이다.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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