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고장 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8] 순흥면 석교2리 ‘세연지’

바위 사이에 작은 샘이 있고 그 밑에 네모진 ‘세연지’가 있었다
지금은 세연지는 없어지고 ‘세연지비’와 석간천(옹달샘)만 남아
선생의 태실이 세연지 인근에 있었고, 살던 집도 여기에 있었다

 

석교2리(돌다리) 표석
세연지, 태실 등 위치도

안향의 고향 순흥 평리촌

순흥면사무소에서 영주방향 700m 지점 도로 우측에 「석교2리(돌다리)」라고 새긴 큼직한 표석이 있다. 표석에서 서쪽방향으로 보면 송학산이 우뚝하고, 그 아래로 보이는 지붕들이 안향의 고향마을 ‘평리촌(지금 석교2리)’이다.

이곳 평리촌에는 안향 선생이 어릴 적 공부할 때 붓과 벼루를 씻던 세연지터를 비롯하여 고택터(古宅址), 태실터(胎室址), 학교터(鶴橋址), 세연지비(洗硯池碑), 송학산(松鶴山), 학봉(鶴峰) 등이 있다. 선생의 어릴 적 흔적을 찾아보는 재미와 함께 총명한 기운도 받을 수 있는 유서 깊은 곳이다.

 

안향 선생의 선대와 출생

안향은 순흥안씨 시조 안자미(安子美)의 증손이다. 안자미에게는 안영유(安永儒), 안영린(安永麟), 안영화(安永和) 세 아들이 있었는데 첫째 아들 안영유의 손자가 안향(安珦)이다.

안향의 아버지는 밀직부사 안부(安孚)이며, 어머니는 강주우씨(剛州禹氏)로 예빈승(禮賓丞) 우성윤(禹成允)의 딸이다.

성세창(成世昌,1481-1548,좌의정)의 백운동묘기(白雲洞廟記)에 「웅장한 백두산이 남으로 뻗어 하늘에 우뚝하니 태백산이요, 또 다시 남으로 뻗어 신령한 기운을 감싸고 있으니 소백산이다. 이 한 가닥의 산맥이 둘러쳐진 그윽한 골짜기에 맑은 시냇물이 앞으로 휘감아 흐르니 죽계(竹溪)이다. 여기에 서린 산천의 기운을 받아 대인군자가 태어나 세상의 정기를 붙잡고 교화를 일으켜 사도(斯道)를 영원토록 계승시켰으니 선생은 실로 남다른 기운을 받아 이곳에서 태어난 것이다」라고 썼다.

가승(家乘,가첩)에 「선생의 부친 태사공(太師公:孚)이 어렸을 때 어느 술사(術士)가 그의 영특함을 귀하게 여겨, 지장산(智藏山,부석면 감곡2리 영모암) 기슭을 가리키며 말하기를 “여기에 장사지내면 반드시 큰 사람이 태어나 대대로 귀를 누릴 것이다”하기에 선친 추밀공(樞密公,영유永儒)이 세상을 떠나자 여기에 장사를 지냈는데 이어 선생이 태어나 유도를 밝히고 유풍을 크게 천명하였다」고 기록했다. 안향(安珦,1243~1306)은 소백산 아래 흥주성(興州城) 남쪽 평리촌(坪里村) 학교(鶴橋,학다리) 옆 본가에서 태어났다.

 

안향의 어린 시절

안향은 1243년 평리촌에서 태어나 향리에서 살다가 1260년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길에 오르면서 고향을 떠났다. 선생이 소년시절 이곳에서 공부할 때 남긴 이야기들을 모아보았다.

가승(家乘)에 「1252년, 어릴 적부터 단정하고 중후하여, 함부로 말하거나 웃는 적이 없었다. 1257년, 고택 아래 작은 연못이 있는데 선생이 어렸을 때 글씨를 익히면서 벼루를 씻었던 곳으로서 이름을 세연지(硯池碑)라 했다. 성(城) 북쪽에 숙수사가 있었는데 선생이 젊은 시절 그곳을 오가며 독서했다. 1260년(원종 원년), 과거에 급제했다. 이 때 고관(考官,시험관) 유경(柳璥)이 선생의 문장을 보고 “훗날 반드시 큰 선비가 되리라”하였다. 선생은 유도를 밝히고 유풍(儒風)을 크게 천명하여 삼한(三韓)의 고루한 풍습을 일신시켜 도학의 시조가 되었고, 자손이 번성하고 오랫동안 높은 벼슬을 누려 쇠퇴하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주세붕 문집에 「안향이 이곳에서 독서했기 때문에 사당을 짓고 서원을 창시했다. 안향이 어린 시절에는 숙수사가 건재했다」고 적었다.

소수서원기에 「안향은 흥주성의 북쪽에 있는 숙수사(宿水寺, 지금 소수서원)에 왕래하면서 유교 경서를 독학으로 수학했다. 그 결과 일찍 문장을 이루었고, 이후 글 솜씨를 더욱 닦고 강화하여, 1260년(원종1) 18세라는 이른 나이에 문과에 급제하여 교서랑이 되었다」라고 기록했다. 안향은 이처럼 백두대간의 지기가 응결한 자리에서 어린 시절 가학(家學)으로 공부의 기초를 닦는 한편, 끊임없는 자습(自習)을 통해 학문을 쌓았다.


 

석간천 (옹달샘)

 

세연지 모형(안자사료관)
송학산과 학봉
회헌안선생세연지비(晦軒安先生洗硯池碑)

석교2리 도로변 표석에서 마을길로 100여m 가면 ‘안자사료관’이 있다. 이어 이정표를 따라 900m 쯤 가면 옹달샘과 세연지비가 나온다. 안향이 공부할 때 벼루를 씻었던 연못인 세연지(洗硯池)는 송학산 지맥 학봉 기슭에 있다.

바위틈(石間泉)에서 맑은 물이 솟아오르는 샘이 있고, 샘 아래 작은 연못 세연지가 있었다고 전해온다. 700여년 세월이 흐르는 동안 옛 모습을 겨우 지탱하고 있었으나 1959년 9월 사라호 태풍 때 산사태로 옹달샘과 세연지가 매몰되고 말았다. 그 후 옹달샘은 마을주민들이 본 위치에서 4-5m 앞으로 옮겨 복원했지만, 세연지는 복원하지 못했다고 한다.

지난 4월 11일 권용학(85,전 순흥향교 전교) 어르신과 세연지비를 찾아갔다. 가랑잎을 헤치고 비문을 살폈다.

현재 옹달샘 뒤편에 있는 ‘회헌안선생세연지비’는 1935년 후손 교덕(敎悳), 승원(承元), 남수(南蒐), 승연(承淵)이 잡초 우거진 가운데서 세연지를 찾아냈다. 그리고 선성(宣城) 김동진(金東鎭) 선생에게 부탁하여 비문을 짓고, 글씨는 평해(平海) 황헌(黃헌) 선생이 써서 후세에 남겼다. 비문에는 「竹溪西松鶴山下(죽계서송학산하) 鶴橋村有石間小泉下(학교촌유석간소천하) 有半畝方池(유반무방지) 卽我晦軒先生少時洗硯池(즉아회헌선생소시세연지) 古傳晦軒先生胎室在(고전회헌선생태실재) 其傍先生舊第及洗硯(기방선생구제급세연) 죽계 서쪽 송학산 밑에 학교촌이 있고 바위 사이에 작은 샘이 있는데 그 밑에는 네모진 못이 있으니 회헌선생께서 소시에 벼루를 씻던 못이다. 전해 오기를 회헌선생의 태실이 그 옆에 있었고 옛날 사시던 집도 여기 있었다」고 기록했다. 비문은 이어 「그 태실이 밭가는 농부의 쟁기에 의해 파괴되고, 그 못이 진흙과 모래로 메워져서 다만 샘물이 풀숲 사이로 졸졸 흐르는 것이 보일 뿐이니… -중략- 선생의 도덕과 문장은 우리나라 도학의 선구자이니 참으로 후학으로서는 감히 덧붙여 논의할 바가 아니다. 이에 명(銘)을 짓노라」고 적었다.

 

안향 향려비(安珦 鄕閭碑)

세연지지(洗硯池址) 고찰(考察)

이정표를 따라 세연지에 가면 세연지는 없고 ‘세연지비’만 있다. 권용학 어르신은 “비(碑) 옆에 옹달샘이 있고 그 앞에 세연지가 있었다고 비문에 나와 있다”며 “또 그 앞쪽으로 본가가 있고, 그 앞 냇가에 학교(鶴橋)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고 말했다.

김동진 선생이 지은 세연지 비문(1935년)에 「바위 사이에 작은 샘이 있는데 그 밑에는 네모진 못이 있으니 회헌선생께서 소시에 벼루를 씻던 못이다」라고 썼다.

순흥읍지(1849년)에 「세연지는 부 남쪽 2리(在府南二里)에 있다. 전해오는 말에 의하면 회헌 안공이 이 연못에서 벼루를 씻었다고 한다. 향려지에도 그 사실을 기록하고 있다. 지금은 없어지고 논이 되었고, 다만 그 터에 비석을 세우고 제단을 설치하였다」고 썼다.

안향의 14세손 안응창(安應昌)이 1656년(효종7)에 세운 안향 향려비(安珦 鄕閭碑)에 「고을 남쪽에 안씨의 옛터가 있는데 사당에서 7리 쯤 되며, 그 곁에 조그만 연못이 있다. 이를 ‘세연지(洗硯池)’라 하여 옛 사적으로 삼아 지금도 사람들이 이곳을 이야기하고 경의를 표하여 고사(故事)로 전해오고 있다. 문성공의 부친인 태사공(太師公) 부(孚)와 태사공의 할아버지 신호위 상호군 자미(子美) 두 선조가 이곳에서 살았었다」고 기록했다.

이 마을 출신 손상호(59) 씨는 “어릴 적 여기서 놀았다”며 “석간천(옹달샘)은 지금 복원한 옹달샘 바로 뒤 바위틈에서 맑은 물이 솟아올랐고, 그 앞에 못(세연지)이 있었는데 지금은 길이 됐다. 예전에 길은 과수원 아래쪽으로 나 있었다”고 했다.

 

여기가 '학교와 학교촌' 김창석 어르신
여기가 '학교와 학교촌' 김용호 어르신
석간천과 세연지비

안향의 태실(胎室)은 어디?

우리 민족은 삼한(三韓) 때부터 조선시대까지 태(胎)를 중시했다. 생명존중 사상 때문이다.

안향 선생은 실로 남다른 기운을 받아 이곳에서 태어났으니 태(胎)에 대한 예우도 남달랐을 것이다. 세연지 비문에 「회헌선생의 태실이 그(세연지) 옆에 있었고, 옛날 사시던 집도 여기 있었다. 그 태실이 밭가는 농부의 쟁기에 의해 파괴되고…」라는 대목에서 선생의 태실이 세연지 가까이 있었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그러면 ‘태실은 어디쯤 있었을까?’가 궁금하다.

향토사학자들은 “안향 선생의 태실은 석간천에서 동북 방향(학봉 산자락) 60여m 지점(현재 밭)에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또 옛 학교(鶴橋) 석재 일부가 인근 축대 기초석으로 사용한 흔적도 보인다. 이곳이 ‘학교촌’이었다는 것을 여러 문헌이 고증하고 있다”고 했다.

김창석(89,석교리 후촌) 어르신은 “석간천 왼쪽 언덕에 관암당(觀岩堂,순흥안씨)이란 정자가 있었는데 지금은 없다. 석간천을 중심으로 세연지비, 세연지, 안향본가, 태실, 학다리 등이 이 주변에 있었던 것으로 짐작된다”고 말했다. 석간천 인근에 사는 김용호(80) 어르신은 학봉 자락을 가리키며 “이 과수원이 제 소유”라며 “태실이 어딘지 정확한 위치는 알 수 없으나 밭일을 하다보면 이곳저곳에서 기와장이나 자기(瓷器) 조각들이 나왔다”고 말했다.

 

공자(孔子)-주자(朱子)-안자(安子,안향)

안자(安子)란 안향 선생을 공자, 맹자, 주자와 같은 성현으로 예우하는 존칭이다. 중국 곡부(曲阜)의 공자 후손 직할 관청인 공부(公府)에서 공식적으로 안자(安子)로 의결한 바 있다.

예수는 “원수를 사랑하라”하셨고, 부처님은 “중생을 사랑하고 가엾이 여기라”하셨으며, 안자는 “남을 미워하지 말라”고 하셨다. 1917년 공자의 77대손인 공덕성(孔德成)이 회헌 선생을 ‘안자(安子)'로 높이 찬양하여 지은 찬문에 「集群聖之大成者孔子也(성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공자이시고), 集群賢之大成者朱子也(현인의 학문을 모아 집대성한 분은 주자이시고), 祖孔宗朱以啓東方之聖學者安子也(공자와 주자를 조종으로 삼아 동방성리학을 집대성한 분은 안자(安子)이시다」라고 썼다. 지역 유림·사학자들은 “생가 및 세연지를 복원하여 안자의 높은 뜻을 기리고, 유교 성지로 조성해야한다”고 말했다.

[탐방일 2020.4.11]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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