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의 추억이, 영주의 향기가 달빛으로 내리는 거리

우리들의 불행을 영원한 망각 속에 매장하고, 우리들의 번영하던 시절의 유쾌하고 감미롭던 추억으로 환기시킴은 우리들의 능력 안에 있는 일이다. -M. T. 키케로
 

①중앙시장 ②후생시장 ③365공영주차장 ④신한은행 ⑤하망동공영주차장 ⑥하망동성당 ⑦청구아파트 (촬영 이영규 기자)

“영주로”는 죽령로와 경북대로가 교차하는 “가흥교차로”에서 시작하여, “영주교”를 건너, 중앙시장과 후생시장, 신한은행, 하망동성당, 청구아파트를 지나 “용암교차로”를 만나는 구영주의 중심길이다.

 

영주 전경 (1937년)
영주읍시가지개황도 ①영주군청, ②서부소학교 ③경찰서 ④제일교회 ⑤철도관사 ⑥영주역 ⑦송재승댁 ⑧곡물검사소 ⑨농업창고 부지

한 장의 문서

1940년에 만들어진 한 장의 문서를 보았다. “소화(昭和) 15년 영주읍 개황도(槪況圖)”이다. 거기엔 군청, 학교, 경찰서, 교회, 화장장, 철도관사의 자리가 그려져 있었다. 영주역도 있었는데 역 앞엔 아무것도 없었다. 역에서부터 분수대 자리까지는 매립지로 표시되어 있었다. 손으로 그린 문서여서 정확하지는 않겠지만, 길의 형태는 지금의 길과 별반 차이가 없어 보였다.

그리고 1937년에 영주시가지를 찍은 사진과 비교해 볼 수 있었다. 사진을 찍은 위치를 “불바위”쯤으로 생각하면서 사진을 다시 보았다. 사진엔 영주역도, 철도도, “역전통”도 없다. 이 사진엔 옹기종기 있는 초가집만 보여, 시가지라 할 수가 없었다. 문서와 사진, 두 개의 자료를 정리하면 “역전통” 즉 “영주로”는 영주역이 생기면서 만들어진 길인 셈이다.

혹시나 해서 송재승님께 두 개의 자료를 보여 주었다. 영주역 앞 매립지 한가운데 있는 가옥이 20여 년 전까지 본인이 살던 곳이 맞다고 했다. 현재 365시장 공영주차장 자리이다.

“장날이 되면 장꾼들의 노새 방울소리가 들렸어요.”

예전에 이곳에 장이 섰다고 했다. 그래서 삼각지(현 분수대) 주변과 새롭게 형성된 가게들과 구별하여 역 주변을 구시장이라 했다고 한다.

 

영주역
조흥은행(신한은행)

영주역에서 시작한 새로운 문명

영주역(현 중앙시장 자리)은 1941년 11월, 영주-안동 구간 철로가 개통되면서 시작하지만 본격적인 구실은 1942년 4월, 청량리까지 서울로 가는 철길까지 개통되면서 부터가 아닐까? 인근 지역 사람도 이곳에서 서울로 가야 했을 테니까. 그렇게 영주역은 경북 북부의 중심이 된다. 그리고 역전통 시대가 시작한다. 역 앞에 대폿집·식당·여인숙들이 잇달아 들어서고, 삼각지 너머로 포목전·어물전·나무전으로 이어진다.

역전통에서 맨 먼저 들어선 관공서는 한성은행 영주지점이다. 곡물검사소 자리에 1942년 새 건물을 짓고 업무를 시작한 이 은행은 1943년 조흥은행으로, 2006년 신한은행으로 이름을 바꾼다. 신한은행이 되면서, 옛 건물은 헐리고 새 건물이 지어졌다. 우리들의 추억이 또 하나 뜯겨져 나간 셈이다.

신한은행 앞에는 지역 독립운동사에 중요한 거점이었던 대동상점이 있었다. 대동상점은 대한광복회가 만주지방 독립운동기지 건설에 필요한 군자금 모집을 목적으로 개설한 전국 100곳의 상업 조직 중 하나였다. 대동상점 운영을 주도한 권영목은 1918년 발각되어, 상하이와 베이징 등지를 전전하며 활동하다가 1935년 5월 10일 중국 봉천(奉天)에서 사망하였다. 대동상점은 해방 이후 월성상회가 되었다가, 삼성대리점을 거쳐 현재 동림당한약방이 되었다.

 

후생시장

영주 변화를 주도한 역전통

후생시장은 최근 도시재생으로 새롭게 단장했다. 하지만 이 시장의 시작은 한 장의 사진으로 확인할 수 있다. “영주중앙시장신축건설원 일동 4288. 7. 12.”라고 새겨진 사진인데, 현재 ‘선비골인삼사과빵’ 자리다. 4288년은 1955년이다.

역전통은 6.25전쟁 후 발전을 거듭한다. 1955년 영암선(이후 영동선) 개통, 1966년 경북선 개통으로 최고의 시기를 맞이한다. 영주에서는 탄광촌에 필요한 모든 물자도 들어갔지만, 탄광으로 가는 사람들도 영주를 거친다. 또 영동선으로 들어오는 어물들은 우리의 식탁을 풍성하게 했다. 영주문어, 간고등어는 그 때 그렇게 만들어졌다. 후생시장에 가면 “황금시대 방송국”이 있는데, “황금이 굴러다니는 길”이란 이야기를 만들어낸 그 시절을 그리며 지은 이름이다. 영주 시가지에만 들리는 저주파 FM방송인데, 주파수는 89.1㎒이다.

후생시장 건너편 점포들은 문을 닫은 곳이 많다. 어떤 점포는 진열장을 없애고, 벽을 쳐 버렸다. 장사를 접고 방을 만든 것 같다. ‘한채당’이 눈에 띈다. 그 3층이 예전에 ‘제일예식장’이 있던 곳이기 때문이다. ‘제일예식장’은 1970년대 영주를 대표하는 예식장이었다. 그 후 여러 곳이 문을 더 열었지만, 큰 예식장 몇 곳만 남고 문을 닫는다. 결혼식을 올릴 사람이 줄어들었기 때문이다.

1961년 ‘영주대수해’는 영주를 바꿔놓는다. 그 변화를 주도한 것 중의 하나가 영업용 택시였다. 그 중 한 곳은 분수대 앞 국민은행 자리에 있던 ‘영주택시’였고, 또 하나는 현 영주농협 동부지점 맞은 편에 현 하망동공영주차장 자리에 있었던 ‘영창택시’였다. 택시회사 주차장은 늘 비어있었다. 공터 안쪽에 6학년 담임선생님의 댁이 있었는데, 거기서 ‘밤공부’를 했다. 중학교 입학시험이 있던 그 시절, 밤에 하는 과외를 ‘밤공부’라 했다. 선생님이 오시기 전까지 팔을 벌리고 공터를 뛰어 다녔다. 팔을 벌리고 뛰었던 것은 아마도 만화영화 “황금박쥐”의 흉내를 내기 위해서였을 것이다.

 

박정희 영주방문(1961년, 국가재건최고회의 의장
김영삼 영주방문(1970년, 신민당 대통령지명후보자)

추억의 장소가 되어버린 구역통

박정희도, 김영삼도 거쳐갔던 ‘역전통’은 1973년 12월 역사(驛舍)를 휴천동으로 옮기면서 ‘구역통’이 된다. 그리고 시청사(市廳舍)마저 새 역이 있는 신영주로 옮기면서 역전통의 상권은 내려앉는다. 무너지는 상권을 살리기 위해 1982년 중앙시장을 만들었지만, 감당해내지 못한다. 그래서 2014년, 도시재생사업을 통해 ‘역전(驛前)의 역전(逆轉)’을 꿈꾸고 있다. ‘청년창업과 문화예술로 새로운 인프라 구축’을 위해 노력한다. 하지만 아직 그 성과가 크게 나타나지 않는다.

‘밤공부’를 마치고 귀가를 하면 늘 영주역 앞을 지났다. 어린 나에겐 별천지였다. 그 늦은 밤에도 대낮처럼 환했고, 리어카마다 카바이드 향을 풍기며 음료를 팔았다. 코코아보다 설탕이 듬뿍 든 따뜻한 밀크가 내 입에 더 맞았다.

그리고 몇 해 후 방학이 되어 청량리에서 밤차를 타고 내려왔는데, 개찰구에서 손에 도장을 찍어 주었다. 통금이 있던 시절 야간 통행을 허락하는 표식이었다. 깜깜한 역전통을 걸으며 발끝에 걸린 희미한 그림자를 보았다. 어깨 위로 달빛이 흐르고 있었던 모양이다. 이제 구역통엔 낮에도 따뜻한 햇살을 느낄 수 없다. 그저 달빛처럼 어렴풋한 추억을 비출 뿐이다. 하지만 그 추억은 늘 그렇게 향기롭다.

김덕우 /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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