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을의 변화는 왔다가 가는 자연의 흐름

❶영주문화파출소 ❷제일교회 ❸풍국정미소 ❹영광이발소 ❺이석간고택 ❻뒷새길 ❼부용공원 ❽철도관사 ❾숭은정 (촬영 이영규 기자)

 

1954년 항공사진 - 관사골

원래 땅위에는 길이란 없었다.
걸어 다니는 사람이 많이 있으면 그것이 길이 되는 것이다. -노빈, 「고향」

근대역사문화거리의 시작

영주초등학교 앞에 있는 도로원표에서 서쪽으로 뻗은 광복로는 ‘풍기통로’라 불렀다. 그 풍기통로에서 제일 먼저 만나는 하얀 집이 영주문화파출소이고, 이곳을 지나면 바로 제일교회가 보인다. 돌을 쌓아 만든 고딕 건축물, 언제 봐도 장엄하다. 건물은 1958년 준공됐다고 하지만, 교회의 역사는 훨씬 오래다. 일제강점기, 한국전쟁, 영주수해를 거치면서 100년이 넘도록 영주 사람들의 삶을 지켜왔다. 이 예배당은 아파트가 지어지기 전까지 영주에서 제일 높은 건물이었다. 그래서 영주시가지 어디서도 이 건물을 볼 수 있었다. 이제 근대건축문화유산으로 지정됐다. 근현대사에서 지역주민들의 삶과 역사적 흔적들이 남아 있어서 전승 보전해야 할 문화유산으로 가치가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2018년 8월 문화재청은 근대문화유산의 입체적 보존과 활용을 위해 교회와 함께 ‘풍국정미소’, ‘영광이발소’, ‘이석간 고택’, ‘철도관사’를 묶어 ‘근대역사문화거리’로 지정했다. 제일교회가 이 거리의 출발지인 셈이다.

 

 

풍국정미소

 

영광이발소

 

대영지업사와 포니 픽업

 

끊어진 뒷새길

업(業)을 지켜온 사람들

풍국정미소는 제일교회에서 100m쯤 떨어져 있다. 이곳은 광복로 동쪽에 있는 ‘신창정미소’와 함께 ‘경상북도 산업유산’으로 지정됐다. 신창정미소와 달리 영업은 하지 않지만 집기나 도정기계들은 보존상태가 양호하다. 2대에 걸쳐 이곳을 운영하고 있는 우수광(84세)씨는 “자식들이 하도 일을 말려서 그렇지 기계는 아직 쌩쌩해요.” 하면서, 판수동저울과 주판, 책상은 일제강점기부터 사용하던 것이라고 자랑한다. 붓글씨로 멋을 낸 풍국정미소 간판과 범죄신고센타 표지판이 세월을 멈추게 한 것 같다.

제일교회 옆에도 정미소가 있었다. 지금은 주차장이 되어버렸지만, 숫골로 들어서는 모퉁이가 그 자리였다. 예전엔 정미소에서 나는 모든 것이 소중했다. 첫 부산물인 왕겨까지도 베갯속으로 사용했었다.

풍국정미소에서 영광중학교를 지나면 영광이발소이다. 이곳의 주인도 초등학교를 졸업하고 14살부터 50여 년간 이 일을 해왔다고 한다. 1970년에 이곳을 인수했는데, 이 이발소의 역사는 그보다 40년을 더 거슬러 올라가야 된다 하니, 이곳에서 100년 세월을 지켜온 것이다. 이 주변엔 아직도 문화재로 지정되지는 않았지만, 그 후보가 될 수 있는 옛 건물들이 눈에 많이 띈다. 교회 앞의 ‘협동이발관’과 ‘소소컴퓨터’, 이발소 건너편의 ‘대영지업사’와 ‘현대함석닥트’는 오랜 역사가 몸에 배어 있다.

20대 초반부터 40년이 넘도록 함석을 만지고 있다는 김적교(66세)씨는 이 길에서 오래 되기로는 다섯 손가락 안에 든다면서 자신보다 더 오래 업(業)을 지켜온 대영지업사를 이야기 한다. “이제 80이 넘으셔서 올해만 하고 그만두신다고 하데요.” 하면서 세월엔 장사가 없다고 한다. 대영지업사 앞엔 오래된 차가 있다. 1970년대에 거리를 누볐던 ‘포니 픽업’이다. ‘포니 픽업’만 두 번 째란다.

대영지업사에서 영광중학교 옆길은 ‘뒷새길’로 이어진다. 예전엔 이 길이 풍기로 가는 주통로(主通路)였지만, 이젠 뒷길이 되어버렸다. 롯데시네마 자리에 영주시외버스터미널이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철길이 옮겨가고 구성로가 생기면서, 기관차사무소 자리엔 영주시외버스터미널이 들어섰다. 영광중학교와 롯데시네마 사이의 4차선 길은 1970년대까지만 해도 자전거나 리어카가 다니는 작은 진입로였다.

 

큰 길이 없애버린 옛길 속의 추억

류시언(66세)씨는 길옆에 무덕관이라는 태권도장이 있었고, 그 옆에 연못도 있었다면서 어린 시절을 떠올린다. 그리고 영광중학교 옆으로 도랑이 있었는데, 이젠 완전히 복개(覆蓋)가 되어서 번듯한 길이 되었다. 도랑을 하수 공사를 하고는 덮개를 씌워나서 가끔 그 아래에 들어가 동전이나 학용품을 줍기도 했다고 한다. 그리고 그 물길은 관사골에서 흘러내렸는데, 관사골 입구에 있는 주차장 아래엔 큰 바위가 있었다고 한다. 물이 닦아놓은 반들반들한 바위에서 미끄럼을 탔다고 한다. 큰 길을 만들면서 추억을 덮어버렸다고 아쉬운 듯 빙긋 웃는다.

영광중학교를 지나면 뒷새와 관사골의 갈림길이 나온다. 오늘은 뒷새쪽으로 가서 관사골로 걷기로 했다. 뒷새로 들어서는 길 입구의 왼쪽 아래편에 이석간고택이 있다. 원래 이 고택은 480년이나 되었다고 한다. 명나라 황태후(皇太后)의 병을 고쳐 주고 명나라에서 지어준 집이라고 한다. 하지만 집도 주인도 모두 바뀌었다. 원래는 본채와 별채가 있는 99칸 집이었는데, 현재 남아 있는 건물은 별채라고 한다. 본채는 매매되었다가 최근에 안영빌라가 들어서면서 그 자취를 감추었고, 그리고 별채는 몇 차례 주인이 바뀌다가 1968년부터 지금의 주인이 관리하고 있다. 이석간은 1509년(중종 4) 여기서 태어나, 서른다섯에 진사시에 급제하고, 마흔둘에 참봉에 제수되었는데, 의술로 더 이름이 높았다고 한다. 그의 의술은 “이석간경험방‘으로 전해진다.

뒷새를 지나던 풍기통로는 끊어졌다. 고가(高架) 철도를 만들면서 길을 돌려 버렸기 때문이다. 10살 쯤, 60년대 중반이었다. 영주장날 할머니 마중을 이곳까지 온 적이 있었다. 이 길은 사람들로 꽉 차 있었다. 모두가 머리에 무언가를 이고 있었고, 상인인 듯 한 남정네는 할머니들을 붙잡고는 이고 온 물건을 팔고 가라고 흥정을 하고 있었다. 그러다가 차라도 한 대 오면 인파는 길가로 붙어 서서 찻길을 만들어 주었다. 그렇게 많은 사람이 이 길을 메운 까닭은 풍기, 안정, 순흥에서 오는 유일한 통로였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길은 그날 할머니를 만났던 거기쯤에서 끊어져 있었다. “풍기, 순흥 방향 좌회전” 안내판이 있었다.

 

 

철도 관사와 부용공원

 

숭은정

관사골에서 꿈을 키운 사람들

표지판을 보면서 산길로 접어들었다. 시원하게 새로 난 고개 옆을 지나 부용공원에 올랐다. 이곳을 ‘부용(婦容)’이라 이름을 지은이가 이황이라고 한다. 이황이 풍기군수를 하던 시절, 과거에 급제한 지역 젊은이들의 모임이 있었다고 한다. 이황은 모임의 장소인 정자와 대(臺)에 이름이 없는 것을 안타까워하여, ‘붕래정’과 ‘부용대’란 이름을 지어주었다는 것이다. 400여년, 전 추로지향(鄒魯之鄕)을 꿈꾸며 모임을 하던 청년들의 기상이 다시 살아나기를 기대하면서 관사골로 내려간다.

1941년 영주역이 시작되고, 영주역과 지척인 이곳에 철도관사를 지으면서 관사골이 되었다고 한다. 어린 시절 우리 눈에 비친 철도관사는 남달랐다. 외관도 이국적이었지만, 집 안에 화장실은 경이로움이었고, 목욕시설은 부러움이었다.

1954년 항공사진을 보면, 골짜기엔 관사만 있고, 산등성이에는 밭의 흔적만 보인다. 그리고 두 채의 이석간고택과 한 동뿐인 영광중학교가 있다. 산비탈의 다닥다닥 붙은 집들은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1961년 ‘영주수해’에 지어지지 않았을까 생각할 수밖에 없다. 산비탈의 집들은 집집마다 방을 달아내고 학생들에게 자취방을 만들어 주었다. 학생들을 관사골 산비탈에서 꿈을 키우면서 관사골 사람이 되어갔었다. 골목을 메우고 뛰어 놀던 아이들과 관사골 자취생들은 이제 성장하여 경향 각지로 흩어져 어른이 되었다.

관사골에서 영광여고쪽으로 발길을 돌린다. 언덕배기에 숭은정(崇恩殿)이 있기 때문이다. 숭은전의 역사는 1958년 팔영전으로 시작된다. 1962년 자인전이란 현판을 걸고 경순왕 어진과 위패를 봉안하여 문화재 19호로 지정 받고, 보존회를 발족하여 매년 4월 4일에 향사를 받들어 왔다. 그 후 해마다 증가하는 향사 참여자들로 본전이 협소하여, 1976년 자인전 뒤편에 숭은전을 중건하게 되었다고 한다. 경순왕을 모시는 전(殿)은 전국에 여섯 군데 있다고 한다.

숭은전에서 영주시가지가 한눈에 다 들어온다. 구성공원 가학루(駕鶴樓)도, 구학공원 제민루(濟民樓)도 눈 아래이다. 그리고 광복로, 영주로, 구성로에서 세월의 흐름도 읽을 수 있다. 또 멀리 시가지를 둘러싼 아파트 군락…. 영주의 과거와 현재 그리고 미래가 한 곳에 다 있는 것 같다. 이제 숫골 쪽으로 난 작은 골목길을 갈 것이다. 거기엔 나의 유년시절이 있기 때문이다. 집들이 지어지고, 허물어지면서 개 실이 나고 하는 것이 자연의 흐름 같다. 봄이 되어 싹이나고, 여름에 무성했다가 가을이면 시들어지는…. 지금 영주는 어느 계절일까?

김덕우 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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