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 숨겨진 보물을 찾아서[4] 장말손 종가

보물 제5001-1호, 고려(1305) 홍패(紅牌)
보물 제501-3호 장말손 문과급제 홍패(紅牌)
보물 제881호-2호, 패도(佩刀,허리에 차는 칼)
보물 제604호, 장말손 적개공신상훈교서
보물 제881호-1호, 적개공신회맹록
보물 제1005-3호, 입안(立案,관청발급문서)
보물 제1005-4호, 교지(敎旨,4품이상 임명장)
보물 제1005-2호, 분재기(分財記,재산분배)
보물 제1005-1호, 소지(所志,청원서)
보물 제5001-2호, 조선(1453) 백패(白牌)
보물 제1005-5호, 녹패(祿牌,월급표)

인동장씨 장말손 종가, 경북 민속자료 98호로 지정
700년 동안 조상 유품 지켜온 비결은 오직 숭조정신
한국학중앙연구원, 2천여 점의 유물 학술적 정리·연구 중

경북도 지정 민속자료 제98호, 연복군 종택

장수면 장말손 종가 가는 길

우리고장 장수면 화기리에 있는 인동장씨 종가에 ‘국가지정 보물 5종 25점’이 있다하니 놀랍기도 하고 자랑스럽기도 하다. 이 보물들! ‘오랜 세월 어떻게 보존해 왔을까’ ‘언제 어떻게 세상에 알려졌을까’ ‘지금은 어떤 모습일까’하는 호기심과 기대를 안고 지난 4일 장말손 종가를 찾아갔다. 종가는 장수면 영주IC 사거리에서 예천방향으로 300m가량 가다보면 「장말손유물각 →600m」 표지판이 나온다. 화살표를 따라 삼거리 2곳을 지나 중앙고속도로 지하도를 통과하여 조금 내려가면 고풍스럽고도 위엄 있어 보이는 종택을 만나게 된다.

솟을대문 안으로 들어가 종택 사랑채 돌계단을 오르다 장덕필(71,이하 종손) 종손을 만났다. 화계정사(華溪精舍) 편액 아래 미닫이문을 열고 정갈한 선비 방으로 들어갔다. 종손께 예를 갖추다보니 종부(반남박씨)께서 꽃모양 곶감에 잣이 박힌 전통과일 등을 담은 다과상을 내 주셨다.

 

종택, 경북 민속자료 98호

종손은 “연복군 말(末)자 손(孫)자 선조께서는 1482년(52세) 벼슬을 마치시고 예천 화장(花庄)으로 낙남하셨고, 이 종택을 지으신 언(彦)자 상(祥)자 할아버지께서는 장수 화기(花岐)로 낙향하셨다”며 “두 분 다 꽃 화(花)자가 들어간 곳에 터를 잡으신 것은 ‘꽃을 지극히도 좋아하셨기 때문이 아닐까’라는 생각이 들어 종택 뜰에 접시꽃(어사화·선비꽃) 등 사계절 꽃이 끊이지 않도록 심고 또 심고 가꾼다”고 말했다.

장말손 종택이 자리 잡은 장수면 화기리는 조선(1600년) 때는 영천군(榮川郡) 호문송리(好文松里) 화기방(花岐坊)이라 부르다가 영조(1750) 무렵 호문송면 화기리, 조선말(1896) 호문면 화기리, 일제(1914) 때 장수면 화기리가 됐다. 조선 세조 때 적개공신 장말손(1431-1486)의 현손이고, 인동장씨 영주 입향조 장응신(張應臣,1490-1554)의 손자인 장언상(張彦祥,1529-1609)이 벼슬(建功將軍,종삼품)을 마치고 낙향하여 이곳에 터를 잡아 집을 짓고 살았는데 이때가 1590년경으로 추정하고 있다. 이 고택은 처음 지을 당시 모습을 잘 보존하고 있어 1992년 경북 민속문화재 제98호로 지정됐다.

 

송지향 선생이 세상에 소개

향토사학자 유계(幽溪) 송지향(宋志香,1918-2003) 선생이 1967년에 발간한 ‘영주향토지’의 서문을 쓴 김상기(한국문화재위원장) 서울대 교수는 「장사식(張師植, 종손의 아버지) 씨의 소장인 장계 선생(장말손의 6대조)의 대덕 9년(고려 충렬왕31년, 1305) 홍패(왕명 사賜 진사급제)는 실로 현존한 우리나라 최고의 홍패로 생각되는 바 이 향토지에 의하여 처음으로 세간에 소개되는 것이다」라고 썼다. 종손은 “유계 선생께서 ‘홍패’와 ‘연복군영정’ 사진을 찍으려고 7번이나 방문하였으나 선친께서 허락하지 않으셨다. 이를 딱하게 여긴 제가 아버님께 간곡히 말씀드려 8번째 겨우 촬영을 허락하셨다”면서 “그러나 그 뒤 신문에 보도되자 야단났다. 선친께서는 영정사진이 실린 신문을 들고 ‘이 신문이 통싯간에도 버려질 텐데 이런 불효를 어떻게 감당하려 하느냐?’며 호통 치셨다”고 말했다.

이와 같이 ‘장말손 종가의 700년 유물 본존 비결’은 ‘조상을 우러러 섬기는 숭모정신에서 비롯된 것’이라고 보여 진다. 기자가 “고려조 이후 수많은 변란 속에도 어떻게 유물들을 보존할 수 있었냐?”고 여쭈었더니, 종손은 “옛적 내력은 잘 알 수 없으나 ‘연복군영정’은 사랑방에 모셨고, 서책이나 문적 등은 상자에 담아 다락이나 시렁에 보관했던 것으로 안다”며 “6.25 때는 인민군이 종택을 점령하고 있었는데 피난가기 전에 마루 밑에 땅을 파고 단지를 묻고 그 속에 귀중품을 보관했다. 또 영정은 허술한 초석자리에 둘둘 말아 대청 다락구석에 던져두고 갔다는 이야기를 부모님께 들었다”고 말했다.

 

보물 제501호 고려 홍패

보물 제501호(1968.12.19 지정)는 장말손의 6대조 장계(張桂,직제학,정3품)의 홍패(紅牌)와 장말손의 백패(白牌) 및 홍패 등 모두 세 점이다. 특히 장계의 홍패는 1305년(대덕9년, 충렬왕31년) 진사시 급제 홍패인데, 조선시대의 것과는 서식이 다를 뿐만 아니라 말미에 주시관과 시관의 직함이 적혀 있는 등 과거제도 연구에 귀중한 자료로 인정받고 있다.

고려 홍패는 앞서 김상기 문화재위원장의 말씀처럼 현존하는 우리나라 홍패 중 가장 오래된 것으로 평가를 받고 있다. 장말손 백패는 1453년(단종1) 진사시 2등 7인으로 합격했다는 증서이고, 장말손 홍패는 1459년(세조5) 문과 병과(丙科) 제3인으로 급제했음을 적고 있다.

 

보물 제502호 연복군 영정(延福君 影幀)

보물 제502호 연복군 영정

‘연복군 영정(延福君 影幀)’ 또한 장계의 홍패와 같이 송지향 선생에 의해 세상에 알려져 보물 제502호(1968.12,19)로 지정됐다.

장말손이 이조좌랑으로 있을 때 1467년(세조13년) 길주의 호족 이시애가 반란을 일으키자 토벌에 나선 장말손이 크게 공을 세워 적개공신(敵愾功臣)에 책록됐다. 이에 1476(성종7) 왕명으로 충훈부에서 공의 영정을 그리게 하였다. 장말손은 1482년(성종13)에 연복군에 봉해졌으며, 1486년(성종17) 별세하자 안양공(安襄公)이란 시호가 내려졌고, 1489년 성종대왕이 영정을 내리면서 불천위도 명했다.

종손은 “예전에는 불천위 제사를 지낼 때 영정을 사당에 걸어놓고 지냈는데 보물 지정 후에는 위패만 모시고 제사를 지낸다”며 “영정은 영정각을 지어 안전하게 보존하고 있다”고 말했다.

 

보물 제604호 적개공신상훈교서

‘적개공신’이란 조선시대 때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하는데 공을 세운 사람들에게 내린 칭호이며, ‘상훈교서’란 공훈을 기리고 상을 내린다는 임금의 글이다.

교서 내용은 「왕은 이르노라, 충성을 다하여 난을 이기고 공훈을 세웠도다. … 내가 장수에게 명하여 토벌하게 하였는데 경이 능히 몸을 돌보지 아니하고 시석(矢石,화살과 돌)을 무릅쓰고 기계(奇計)를 내어 제승(制勝)하니 공훈이 크도다. 정각을 세우고 도상(圖像)을 그리며 비석을 세워 공을 기록하도록 하라! … 부모와 처자의 벼슬을 두 계급 높여주고 후손들은 죄가 있어도 용서할 것이며 토지, 노비, 의복, 말 등을 내리노라」고 기록했다.
이 적개공신상훈교서는 1976년 4월 23일 보물 604호로 지정됐다.

보물 제881호 장말손유품(狀末孫遺品)

장말손 유품은 적개공신회맹록(敵愾功臣會盟錄)이 보물 881-1호로, 장말손 패도(佩刀)가 보물 881-2호로 1986.10.15 일괄 지정됐다.

‘회맹’이란 ‘임금과 신하가 모여서 서로 맹세하다’는 뜻으로 ‘공신들 사이에 회맹을 한 사실과 공신들의 이름, 직위를 함께 적은 기록을 회맹록’이라 한다. 이 회맹록은 이시애란 토벌 때 공을 세운 이준(李浚)을 비롯한 45인을 1,2,3등 공신으로 포상하였는데 이 때 책봉된 훈호(勳號)를 수록한 것을 ‘적개공신회맹록’이라 한다. 이 때 장말손은 2등 공신으로 책봉됐다. 이 회맹록이 가치를 더욱 인정받은 것은 세조신록에 누락된 3등 이하의 공로자 명단과 훈호가 이 회맹록에 수록되어 있기 때문이다.

보물 881-2호 패도(佩刀,허리에 차는 칼)는 연복군 장말손이 1466년(세조12) 여진족 아지발(阿只拔)을 물리친 공으로 왕이 하사한 칼이다. 이 패도는 금으로 손잡이가 장식되어 있으며 칼집은 축피(竹皮), 상아재(象牙材), 은사(銀絲) 등으로 처리되어 조선 초기 왕실 공예 연구에 귀중한 자료가 되고 있다. 종손은 “이 패도는 6.25때 분실되었는데 1972년 추원사(追遠祠) 건립시 저의 선친(諱 張師植)의 현몽으로 찾게 됐다”며 “‘지성이면 감천’이라, 잃어버린 패도를 찾기 위해 애쓰시는 것을 보고 하늘이 감동하여 꿈에 현몽한 것 같다”고 말했다.

 

보물 제1005호 소지(所志) 등

보물 제1005호는 소지(所志) 6점, 분재기(分財記) 3점, 입안(立案) 2점, 교지(敎旨) 6점, 녹패(祿牌) 1점 등 18점을 1989.5.23 일괄 지정했다.

소지란, 예전에 관청에 냈던 청원서인데 고려 우왕 때(1385) 장계(직재학)의 증손자 장전(우윤공)이 경상도 안렴사에게 낸 소지에는 ‘부당하게 빼앗긴 농지를 돌려받도록 처결해 달라’는 내용이다. 소지는 모두 6점이다. 분재기는 부모의 재산을 가족들에게 나누어주는 내용을 기록한 문서로 1404년(태종4)에 작성된 노비분배 문서 등 3점이다.

입안이란 관청에서 발급한 증명서로 오늘날로 치면 공문과 같은 것으로 2점이 있다.

교지는 조선 때 임금이 신하에게 주는 사령(임명)으로 문무 4품 이상에게 주는 사령장을 교지라 한다. 교지는 장언상(종3품)의 건공장군 교지 등 6점이 있다.

녹패는 고려와 조선시대 때 쌀, 콩, 견포 등의 녹봉을 받는 사람에게 증서로 주던 종이로 만든 표(월급표)이다. 1508년(중종3) 장말손의 장자 장맹우(교리공)의 녹패가 발견돼 흥미롭다.

장말손유물각에는 위 보물로 지정된 것 외에도 2천여 점의 유물을 소장하고 있다.

종손은 “보물로 지정된 유물 외에도 성삼문·김굉필·조광조·이황 선생 친필 등 2천여 점을 소장하고 있다”면서 “이 유물들에 대해 한국학중앙연구원이 2018년부터 5년간 학술적 정리와 연구를 추진하고 있다. 연구가 끝나는 2022년에는 전체 목록과 도록(圖錄)이 나올 것”이라고 말했다. 기자는 사랑채에서 나와 종손의 안내로 종택 이곳저곳을 둘러봤다. 종손의 서재에도 가봤다. 선조의 숭조정신을 이어받은 종손은 지금의 (문중) 일들을 하나하나 기록하고 사진을 정리하고 있었다. 그래서 ‘아-하!-’ ‘이분이 바로 보물’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취재를 마치고 나오면서 ‘2천여 점의 유물을 정리·연구·분석하다보면 더 많은 보물들이 나오지 않을까?’ 기대하면서 대문 밖을 나와 차에 올랐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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