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자미 시인

호박 그 자체

- 김광규

뒷산에서 자란 호박 덩굴이 옆집

담을 넘어 들어오더니 밤나무를 타고 올라가

나뭇가지 끝에 연두색 호박을 매달아 놓았다

호박은 공중에서 하루하루 다르게 커졌다

밖에서 담을 넘어 들어왔으니

옆집에서 심은 것은 아니지...

 

그러니까 긴 골프우산 손잡이를 담 너머로 뻗쳐서

호박을 끌어다가 따 먹을 수도 있는 거야

하지만 누구에게 들키지 않는다 해도

시쳇말로 다툼의 여지는 있겠지 이를테면

옆집 영감이 투덜거리는 소리를 피할 수 없을 걸

요즘도 호박 도둑이 있는 모양이여...

 

늦장마 지나가고 매미와 풀벌레 소리 요란한

오늘도 옆집 밤나무 가지에 매달린 호박을

바라본다 따먹고 싶은 욕심이랑 몽땅 버리고

짙푸르게 익어가는 호박 그 자체만 바라볼 수는 없을까

가을이 가버리기 전에 그렇게 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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30년 전, 아니 그것보다 더 오래전일까? 그때 우리는 여고2학년이었다. 수업을 일찍 마친 토요일이었다. 자취하는 선배언니가 카레라이스를 만들어 주겠노라고 해 우린 언니 집으로 우르르 몰려갔다. 서툰 칼질로 서툴게 음식을 만드는데 재료마저 부족하였다. 그런데 앞집에서 넘어 온 호박줄기가 담장을 기어가고 있는 중이었는데 윤기가 반들거리는 연두색 애호박하나가 담장 위에 매달려 있었다. 한참을 고민하다가 결국 뚝 따서 끓고 있는 멀건 카레 솥에 썰어 넣고 말았다. 카레 한 그릇을 뚝딱 비우고 수다를 떨고 있을 무렵 앞집할머니가 불쑥 찾아왔다. 성이 잔뜩 난 할머니는 호박의 행방을 묻는 것이었는데 언니가 시침미를 뚝 떼고 큰 눈만 끔뻑거리는 동안 우리는 각자 가방을 찾아들고 슬금슬금 뒷걸음쳐 골목을 벗어나 배를 잡고 깔깔거렸던 적이 있다. 시는 밤나무에 매달려 있는 호박하나를 두고 눈치싸움 중이다. 그것은 아마 가을이 가기 전까지 계속될 듯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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