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특집 – 정규만 참전용사에게 듣는 6.25전쟁

정규만 6.25참전용사
소년병 정규만의 훈련모습
장진호 전투장면
흥남항 폭파
미 육군 제3사단 소속 정규만 용사
흥남부두 아비규환

피난지서 UN군 지원, 美 3사단 소속 흥남철수 작전수행
중학교 4학년(17세) 때 피난지서 소년병 입대
장진호 전투서 포위된 美해병1사단 퇴로 열어

올해는 6·25 전쟁이 발발한지 69년, 휴전 66년이 되는 해다. 

6·25를 10여일 앞둔 지난 14일, 6·25 때 美 제3사단 소속으로 장진호 전투에 참전하여 중공군에게 포위된 美 해병1사단의 퇴로를 열고, 흥남부두 철수작전을 수행한 정규만(丁奎萬,87) 참전용사를 만나 그날의 이야기를 들었다.

▲ 소년 정규만의 어린 시절
정규만은 나주정씨 27세손으로 1933년 가흥2동 줄포(茁浦)에서 태어났다. 영주국민학교를 졸업하고 영주농업중 1학년 때 서울 한양공업중학교로 전학했다. 1950년 6월 25일 서울운동장에서 전국춘계 중학교 축구결승전(한양공업중:선린상업중) 응원이 한창일 때 “북한군이 38선을 돌파 남침 중”이라는 장내 방송이 나왔다.

28일 서울이 함락되고, 7월3일 한강 방어선이 붕괴됐다. 친구 4명과 서울을 출발하여 철길을 따라 망우-양평-제천까지 왔으나 이미 남한강(단양) 전투가 시작됐다는 소문을 듣고 영춘-의풍으로 돌아 고치령을 넘어 1주일 만에 줄포에 도착했다.

▲ 피난지에서 UN군에 입대
7월 12일 북한군이 죽령을 넘었다는 소문에 이어 박격포탄이 마을 앞에 떨어지자 피난길을 서둘렀다. 쌀 3말과 구화 3천원을 가지고 안동-의성-신령을 거쳐 영천까지 갔다. 피난생활이 길어지면서 식량과 돈이 다 떨어졌다. 이 무렵 UN군을 모집하다는 소문을 듣고 대구 계성중에서 UN군에 지원했다. 그 때 만 17세였다.

기자가 UN군에 지원한 사연을 여쭈었다. 정 용사는 “‘피난지서 죽느니 군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게 옳다’는 생각이 들었다”며 “당시 중학교 4학년 영어 실력으로 UN군에 지원했는데 능통은 아니어도 소통은 가능했다”고 했다. 화물열차를 타고 부산으로 가 미군에 인계되어 9월 20일 군번(k1133002)을 받고 정식 입대했다. 다음날 화물선을 타고 현해탄을 건너 22일 일본 북큐슈 고구라에 도착했다.

오히이다 뱃부로 이동하여 군복과 M1소총을 지급받은 후 美 제3사단에 배속됐다. 美 본토에서 온 신병과 한국에서 지원한 소년·학도병들(수천명)은 50일간 신병교육을 받았다.

▲ 美 제3사단, 일본에서 함흥으로
정규만 소년병이 훈련을 받는 동안 한국전은 인천상륙작전 성공으로 10월 1일 38선을 돌파하고, 10월 9일 전 전선 북진 명령이 내려졌다. 10월 10일 맥아더 원산 상륙, 10월 19일 평양 입성, 11월 1일 압록강 초산까지 진격하여 강물을 수통에 담아 이승만 대통령에게 바쳤다. 일본에서 신병교육을 마친 정 소년병은 11월 초 미 해군수송선(2만5천톤급)을 타고 2박3일 간 항해하여 원산항에 상륙했다. 그리고 다음날 열차편으로 함흥에 도착했다.

지역 주민들이 몰려와 “이제 통일이 됐다. 남한 돈이 갖고 싶다”며 “사과를 팔아 달라”기에 천원을 주고 사과 한 광주리를 사기도 했다.

▲ 장진호 전투 투입
국군과 유엔군이 북진만 계속하는 동안 중공군이 개입한 사실을 몰랐다. 10월 19일 18만, 11월 5일 12만 총 30만 중공군이 압록강을 도하 산속으로 숨어들었다.

정 용사는 “중공군은 야간에만 행군하기 때문에 유엔군이 전혀 눈치 채지 못했다. 이런 줄도 모르고 국경을 향해 북진만 하던 美 제1해병사단은 11월 27일 장진호에서 중공군에게 완전 포위됐다. 당시 중대통신병으로 전투에 참가한 정 용사는 “천하무적 美 해병1사단이 함경남도 개마공원에 있는 장진호 근처에서 중공군 제9병단(7개사단,12만명)에 포위되자 우리 美 제3사단은 포위된 美 해병1사단의 퇴로를 여는 작전을 수행하게 됐다”고 말했다.

▲ 고난과 죽음의 장진호 탈출
정 용사는 장진호 전투(11.26-12.13)를 이렇게 회고했다. “개마고원은 밤 32도, 낮 20도의 혹한인데... 잠을 잘 수도 없고, 언제 밀고 들어올지 모를 중공군의 공격... 눈썹에 살얼음이 끼고 손발은 동상에 걸렸다. 오줌이 그대로 얼어붙을 정도로 추웠다”고 말했다.

이 전투에서 美 해병 제1사단은 혹독한 추위를 무릅쓰고 유담리에서 진흥리까지 40km가 넘는 협곡지대를 통과해야 했다. 겹겹이 에워싸인 중공군의 포위망을 벗어나는 동안 1만명 병력 중 전사 719명, 부상 3천500명, 행불 192명 등 많은 사상자가 발생했다. 다행히 UN 공군(美 해병제1비행사단 함재기)의 효과적인 근접 항공지원下에 과감한 돌파작전을 전개해 흥남지역으로 철수하는데 성공했다. 이 때 전사한 시신과 부상병을 함께 후송해야 했기에 더욱 힘들었다. 우리 美 제3사단은 해병1사단의 퇴로 확보와 경계 작전에 성공하여 흥남철수의 교두보를 마련하게 됐다.

▲ 흥남부두 철수작전
12월 11일 미 제1해병사단의 장진호 탈출 작전이 일단락되자 美 제3사단은 흥남철수 교두보 구축에 나섰다. 흥남 철수작전은 12월15일에서 24일 까지 미 제1군단과 국군 제1군단이 엄청난 군수물자를 버리고, 한국군과 UN군, 북한주민들을 부산으로 철수한 작전이다. 국군 제3사단과 美 제1해병사단의 병력과 장비가 15일 부산으로 출항했다.

정 용사는 당시 상황을 직접 눈으로 봤다며 “아군의 철수작전은 순조롭게 진행됐으나 피난민이 큰 문제였다. 미군이 흥남부두로 집결 부산으로 철수한다는 소문들 듣고, 피난민들이 장사진을 이루어 흥남항으로 끝없이 밀려왔다. 공산정권의 학정에 치를 떤 북한 주민들이 자유를 찾아 남으로 가기 위해서다.

승선 명령이 떨어지자 서로 먼저 배를 타기위해 흥남부두는 일순간 아비규환(阿鼻叫喚) 속으로 빠져들었다. LST(상륙전용함) 한 척에 10배가 넘는 5천명이 승선하기도 했다. 30만이 넘는 피난 인파 중 마지막까지 배를 탄 피난민은 9만 1천명이라고 하니 두고 온 피난민이 20만이 넘었다. ‘굳세어라 금순아’ 노래는 이 장면에서 나온 노래다. 오빠는 배를 탔으나 동생 금순이가 보이지 않아 찾아 헤맨 사연이 눈물겹다. 12월 24일 오후 2시, 美 제3사단은 마지막으로 승선을 완료했다. 그 때 200톤의 탄약과 500개의 포탄, 그리고 200여 드럼의 유류는 후송하지 못한 채 항만과 함께 폭파되는 광경을 보면서 흥남부두를 떠났다. 흥남부두 철수작전에 함정 125척이 참가했다고 하니 그 규모를 짐작할 수 있다”고 했다.

▲ 군함 속 크리스마스이브
정 용사가 탄 군함은 흥남부두를 떠나 부산으로 향했다. 기자가 “1950년 크리스마스이브는 군함에서 보내셨네요”라고 여쭈니 “이브에 맥주 1캔과 시가(잎담배) 1개피를 주더라”며 “25일 오후 늦게 부산항에 도착하여 미군 군악대의 환영은 받았지만 항구에 배들이 뒤엉켜 3일동안 정박해 있다가 상륙했다”고 했다. 美 3사단은 경주로 이동하여 첨성대 인근에서 일주일간 머무르면서 장비를 점검하고 보급품을 지급받았다.

▲ 휴전 그리고 만기제대
우리부대는 1월 15일 대전까지 북상하여 천안, 안성, 용인에서 중공군과 교전하였고, 경기도 광주 남한산성을 거쳐 잠실에서 한강을 도하하여 서울에 입성했다. 그 후 의정부, 동두천, 연천, 철원 등지에서 중공군과 격전을 치루면서 중서부전선을 방위하다 휴전을 맞았다.

휴전이 되자 美 육군3사단은 본국으로 철수하고, 나는 춘천 제3보충대를 거쳐 포천군 일동면 장암리에 주둔해 있던 제105통신대대에 배치되어 복무하다 군 입대 4년 3개월만인 1955년 1월 20일 일등중사로 만기제대 했다. 제대 후 영주농업고등학교 3학년에 편입하여 졸업하고, 1956년 6월 영주군 지방공무원으로 임용되어 20여 년간 봉직하다 퇴직했다.

용사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3시간이 훌쩍 지나갔다. 마무리 말씀을 부탁드렸다. 

그는 “함흥에 도착했을 때 ‘이제 통일이 되었다’며 좋아하던 함흥 주민들의 모습이 떠오르기도 하고, 끝내 배를 타지 못하고 돌아간 북한 주민들은 어떻게 되었을까 궁금하다. 6·25 전쟁은 참혹했다. 이 땅에 6·25와 같은 전쟁이 다시는 일어나지 않도록 하기 위해 안보를 더욱 튼튼히 해야 한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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