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우리나라의 서원은 대체로 제향(祭享)영역과 강학(講學)영역을 갖추고 있다. 이 두 영역은 서원의 필수 요건에 해당한다. 

바꾸어 말하면 서원은 이 두 가지 목적을 수행하기 위해 설립된 건축물이라는 뜻이다. 그래서 전국의 서원은 이런 두 가지 목적을 성실히 수행하는 것으로 서원의 존재 가치를 인정받아 왔다.

소수서원도 당연히 제향영역, 강학영역을 갖추고 있다. 하지만 전국의 서원이 대체로 전학후묘(前學後廟, 앞부분 강당, 뒷부분 사당)구조를 선호하는 것과는 달리 소수서원은 동학서묘(東學西廟)의 구조로 구성되어 있어 특이하다. 이를 두고 서쪽을 중시하는 우리의 풍속이라는 의견도 있으나, 서쪽에 있는 얕은 둔덕[靈龜峰]에 의지한 사당(祠堂)을 근간으로 서원을 배치하다 보니 이런 구조가 되지 않았을까? 서편 나지막한 둔덕은 영귀봉이다. 

거북이가 알을 품은 모습이라고 한다. 이른바 영귀포란형(靈龜抱卵形-서적에서는 금계포란형)이며, 영귀봉의 기가 응혈한 혈처에 사당[文成公廟]를 배치하여 유학의 생명을 싹틔우고자 했던 것 같다. 사당의 위치는 거북 머리에 해당한다. 이를 닭의 깃털에 해당하는 솔숲이 포근하게 감싸고 있는 배치라면 이야기가 될까? 곧 품은 알이 부화하기를 바라는 마음이 담긴 구조이다.

소수서원 설립 목적은 두 가지이지만, 주세붕은 죽계지(竹溪誌)에서 ‘거북으로 대표되는 영귀봉 주산과 죽계천이 절묘하게 어우러진 길지에 백운동서원을 세운다’고 밝히고 있으나 이는 이미 사당이 핵심적인 위치를 선점한 뒤의 일이다. 그렇다면 나중에 건축한 강학장소는 서원의 부수적인 성격이 강하게 된다. 즉 건물배치와 공간구성이 건립 목적에 충실한 것으로 보아 소수서원은 강학중심이 아니라 제향중심의 서원이라는 점이 확인되는 셈이다.

소수서원의 영역은 다른 서원에 비해 소요(逍遙)영역을 하나 더 갖춘 것으로 이해할 수 있다. 당초에는 앞부분 서편이 트여 있어 이를 보완하기 위한 비보(裨補)로 솔숲을 조성한 것으로 보여 지나 이후 숲이 거대해지면서 이를 소요 장소로 이용하기 딱히 좋은 공간이 되었다. 더구나 미끈한 춘양목 학자수림의 도열을 받으며 정문을 들어서는 방문객들에게는 특별한 기억을 얹어주는 훌륭한 진입공안의 역할을 하는 셈이 된다.

흔한 서원의 자리는 폐사된 사찰 터가 많다. 사찰 터는 풍수지리적으로 명당이었을 것이기에 이미 검증된 장소라는 점이 유혹을 강하게 한다. 게다가 불교에서 유교로 통치이념이 넘어가면서 폐사지 사찰에 대해 특별한 보상을 하지 않아도 큰 문제가 발생하지 않았다는 점 또한 곁눈질을 쉽게 해 주었던 것 같다.

소수서원의 자리도 본래는 통일신라시대 숙수사(宿水寺)라는 절터였다. 그 흔적이 입구 당간지주에서 명백해진다. 하지만 당간지주는 서원 설립을 위해 억지로 사찰을 폐사시키고 물건들을 땅에 파묻었다는 주장에 반론이라도 펼 듯 당당하게 서원입구에 서서 오히려 방문객들을 친절하게 안내하는 모습으로 보여 진다. 실재로 소수서원의 문화관광해설사들도 이곳 당간지주 앞에서 첫 해설을 시작한다. 당연히 당간지주는 그들의 해설도 귀기우려 새겨듣고 있는 것이다. 폐사지 숙수사는 그렇게 소수서원과 공생하는 모습이다.

당간지주를 지나면 은행나무 행단을 거쳐 서원의 정문인 지도문(志道門)으로 들어서게 된다. 상당한 남도 서원의 정문이 웅장한 누각 형태로 삼문을 마련한 데 비해, 소수서원 정문은 소박한 단문 형태를 취한다. 여기서부터 심신 수련의 상태를 보여주게 된다. 병산서원(屛山書院)은 ‘자기를 낮추고 예로 돌아가라’는 뜻을 담아 복례문(復禮門)이라했고, 도동서원(道東書院)은 ‘마음의 주인을 부르는 문’이라고 환주문(喚主門), 도산서원(陶山書院)이 ‘도리로 나아가는 문’이라 하여 진도문(進道門)이라 한데 비해, 소수서원은 이보다 소박하게 ‘도에 뜻을 두다’라는 뜻으로 지도문이라 정문을 이름 하였다.

누각도 남계서원(南溪書院)의 풍영루(風詠樓), 도동서원의 수월루(水月樓), 무성서원(武城書院)의 현가루(絃歌樓), 필암서원(筆巖書院) 확연루(廓然樓)가 장대한 문루(門樓) 형태를 취하고 있는데 비해 소수서원은 문밖에 마련된 소박한 경렴정(景濂亭)으로 이들을 대치하는 모습이어서 더욱 겸손하게 느껴진다.

정문으로 들어서면 곧바로 ‘白雲洞書院’ 현판이 걸린 명륜당의 측면과 마주하게 된다. 소수서원의 중심 건물이다. 전청후실(前廳後室, 앞대청 뒷방)의 명륜당 안쪽에는 명종 친필의 ‘紹修書院’ 편액이 높이 걸려 있다. 강당의 뒤편으로는 원장과 스승의 거처인 직방재와 일신재, 다시 그 뒤편에 학생들의 기숙사인 학구재와 지락재가 낮게 엎드려 있다. 건물들은 모두 올망졸망하다. 그러나 매우 자유롭게 놓여 있다. 아직 조선 성리학이 딱딱해지기 이전의 모습과 같다. 강당 서편으로 안향 등을 모신 사당[文成公廟, 보물 제1402호]이 있고 그 뒤로 장서각(藏書閣)과 전사청(典祀廳)이 자리하여 서원의 공간을 완성한다.

건물 명칭은, ‘독서를 통한 학문의 즐거움’을 나타내는 지락재(至樂齋)를 시작으로, ‘성현의 길을 따라 학문을 구’하는 학구제(學求齊), ‘날마다 익힌 학문을 새롭게 한다’는 일신제(日新齋), ‘언제나 깨어 있어 마음을 곧게 가진다’는 직방제(直方齋)에 이르러 학문을 크게 이루게 되므로 비로소 강당[明倫堂, 보물 제1403호]에 들어가서 ‘세상의 이치를 밝힐 수 있게 된다’는 그런 건물의 배치구조이다.

그런 소수서원 공간을 통과하면 근래에 세워진 사료관과 충효교육관이 있고, 후문 담장 밖에는 커다란 연못[濯淸池]이 있다. 건너편 공간에는 소수박물관, 선비촌을 추가하여 연계관광지로 도움을 받으며, 곧 완공될 한국문화테마파크(선비세상)가 세계유산 소수서원의 자신감을 크게 확대시켜줄 것으로 모두들 기대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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