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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백산 비로봉 아래 첫 동네 ‘달밭골(月田)’(2)우리마을탐방[231]풍기읍 삼가리 달밭골
  • 영주시민신문
  • 승인 2019.01.16 17:32
  • 호수 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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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사고지?, 정감록파 정착지, 6.25 피난처
불자 기도처, 나도 자연인, 산촌생활사 박물관

달밭골 전경

달밭골 초입 첫집
달밭골에 처음 간 날은 구랍 16일이다. 탐방지원센터 조기용 팀장의 안내를 받아 달밭골에 올라갔다. 비로사에서 달밭골로 오르면 언덕위에 하얀집이 탐방객을 맞는다. 하얀집(매점)에는 식품, 잡화 음료 등 등산객에 필요한 물품을 판다. 그리고 하산주(下山酒)를 한 잔할 수 있도록 도토리묵, 산나물전, 막걸리 등이 있다. 이 집 주인 박덕양(53)·임희숙(51)씨 부부를 만났다.

박 씨는 학업 차 고향을 떠났다가 2년 전 귀향했다고 한다. 박 씨는 “선친께서 영해에 사시다가 100여 년 전 이곳으로 이거하셨다는 이야기를 누님께 들었다”며 “아마도 일제치하 때 안전하고 편안한 곳을 찾아오신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박 씨는 또 “선친께서 77세에 저를 낳아 ‘七七장군의 아들’이란 별명을 얻었다. 달밭골을 산촌생활사 박물관으로 잘 보존하는 게 저의 할 일”이라고 말했다. 박 씨는 ‘달밭골 명품마을’ 사무장이기도 하다.

최현관 어르신댁

달밭골에 인자하신 어르신
박덕양 씨는 “최현관 어르신께서 달밭골 내력을 잘 알고 계신다”며 어르신 댁으로 안내해 줬다. 최 어르신댁 문패에 「달밭골에서 가장 인자하신 어르신이 살고 계시는 최현관 씨 댁입니다」라고 쓰여져있다. 어르신 방에 책이 많다. “TV보다 책보는 시간이 많다”고 하셨다. 어르신은 “우리 민족이 문자로 나타낸 기록 중 가장 잘 만든 게 국민교육헌장”이라며 “지금 교육이 걱정이고, 나라가 걱정”이라고 했다.

어르신은 “평안북도 구성군에서 태어나 어릴 적(1945) 아버지를 따라 (정감록파) 풍기로 왔다가 6.25 때 달밭골로 피난했다”며 “그 때 12살이었는데, 살다보니 여기가 명당이고 명승지라는 것을 알게 됐다. 1970년 반장할 때 철도청에서 보낸 기념품(타올) 50장을 돌렸는데 모자랐다. 당시 이곳에 6-70가구가 살았다. 그 후 박정희 대통령의 화전민 이주정책(1975년 완료) 때 대부분 떠났다”고 말했다.

최영학家 귀틀집
토굴부엌

고려 사고지?
달밭골 조이형(86) 어르신은 “사고터에 살다가 1975년 화전민 이주 때 달밭골로 내려왔다”며 “사고터에 3-4채 집이 있었고, 교회도 있었다”고 말했다. 달밭골에 살았다는 박간난(71) 씨는 “내가 달밭골로 시집 왔을 때(1968) 사고터에 춘봉스님의 암자가 있었고, 일초스님과 몇 가구가 살았다. 일초스님 처형(여, 조모 장로)이 (○○종교 성지를 만들 목적으로) 춘봉스님을 내보내고 교회를 세웠다”며 “그 후 1979년쯤 (마을에서 성지 설립을 반대하자) 모두 떠났다”고 했다. 김진선 씨는 “비로사 전성기 때 주변에 8암자가 있었다”며 “사고지에 극락암, 비로사 옆 상선암, 부도골에 토굴암, 원적봉下 원적암, 사고지 근처 사자암, 최현철家 만월암, 최영학家 관음암, 비로토굴에 심적암이 있었다”고 했다.

향토사학자 송지향(1918-2004) 선생은 영주향토지(1987)에 「사고터는 달밭골 기점 비로봉 등산로 450m 지점에 있다. 조선 때는 소백산 사고터 기록이 없으니 필시 고려시대 사고터로 짐작된다. 이곳은 고려 태조의 왕사 진공대사가 주석(柱石)했던 비로사가 있는 등 사고지를 두엄직한 곳」이라고 적었다.

4번의 지표조사
국립공원관리공단 소백산사무소는 고려시대 사고(史庫)였다는 구전에 의거 2007년 최초 자체 지표조사를 벌여 2동의 건물지와 고려시대로 추정되는 석탑 일부를 발견됐다. 2차 조사에서 석탑은 삼층석탑으로 확인됐고, 건물지 4동이 더 발견됐다. 2013년 3차 지표조사 결과 건물지 6동, 삼층석탑 1기, 건물지 하부석렬 1기, 주초석 12기, 문지도리석 2점, 평기와편 수백점 등이 발견되어 고려시대 사고지로 추정했다.

4차 지표조사는 국립공원연구원(총괄 오창근 부원장)이 2017년 8월14일부터 10월 31일까지 조사했다. 조사결과 조사구역 1지점에서 조선시대 건물지로 추정되는 석축유구 2기와 통일신라-조선 시기의 다량의 토·도·자기편 및 기와편이 확인됐다. 2지점에서는 4개 지점의 사역(寺域), 석축5기, 고려시대 석탑2기, 다량의 도·자기편 및 기와편(고려-조선)이 확인됐다. 조사위원 최성규(한양문화재연구원 기획실장) 씨는 “고려시대 이전 규모가 큰 사지로 추정되며, 사고터 관련부분은 발굴조사 등 향후 정밀조사가 필요하다”며 “이번 조사는 지표상에 드러난 현상만을 판단하는 조사로 보다 정밀한 역사·고고학적 조사를 통해 정확한 잔존 양상과 가치판단이 필요하다”고 말했다.

소백산 산신각
전덕성家

소백산 산신이 된 ‘하위지’
달밭골 표지판에서 등산로를 따라 160m가량 올라가면 80도 우로 꺾이는 곳 전면에 소백산 산신각이 있다. 산신각 안에는 소백산신 영정이 있고, 주변에 창고와 가마솥도 걸려 있다.

이 날 뜻밖에 소백산 산신이 사육신 하위지(河緯地,1387-1456)라는 것을 알게 됐다. 해마다 3월과 9월 초정일(初丁日)날 달밭골 사람들은 국태민안을 기원하는 산신제를 올린다고 한다. 김진선 씨는 축문과 관련서류를 보여주면서 “제향날은 출향인, 관광객 등 100여명이 참제한다”며 “3헌관이 잔을 드린 후 원하시는 분들은 모두 잔을 드리고 복을 빈다”고 했다.

축문에 보면 「천지간에 소백산신이 가장 높고 영험(靈驗)하나이다. 정성으로 고하오니 복으로 응답해 주소서. 전쟁과 질병과 도둑과 화재를 막아주시고, 백성태평과 화평풍년과 사업성공을 주옵소서…」라는 내용이다. 왜 하위지가 소백산신령이 됐는지 전덕성 씨께 여쭈니, “사육신과 단종이 죽임을 당한 후 백성들은 슬퍼하며 태백산신으로 단종(端宗)을 모시고 전국 명산에 사육신을 모셨는데 소백산에는 ‘영남(선산) 출신 하위지 선생을 모셨다’고 일초 선사(禪師)께서 말씀하셨다”고 말했다.

약사선원(정선자家)

앞달밭골 약사선원
달밭골은 본달밭골과 앞달밭골 그리고 순흥달밭골로 구분한다. 1975년 화전민 이주 이전에는 7-8가구가 살았다는 앞달밭골은 예전에 원적암이 있던 곳으로 지금도 불심(佛心)을 다지는 기도처가 됐다. 달밭골 표지판에서 동쪽방향 가파른 오르막길을 500m가량 올라가서 산등성이를 넘으면 외딴집 한 채가 있다. ‘약사선원’이다. 정선자(鄭善子.61,달밭골 반장) 보살의 기도처다. 정 보살은 20여 년 전 남편과 기도처를 찾던 중 부처님의 뜻으로 잡은 터라고 한다.

어느 날 남편이 “창 넘어 바위에 약사여래불(藥師如來佛)이 오셨네”라고 하기에, 정 보살이 바위를 자세히 살펴보니 평평한 바위면에 ‘약사여래불’이 새겨져 있는 게 아닌가. 정 보살은 “그날부터 ‘약사여래불’을 모시면서 예불을 드린다”고 했다. 이야기를 나누고 있을 때 예전에 앞달밭골에 살던 박간난(삼가리) 씨가 왔다. 박 씨는 “20살 때 단양에서 이곳으로 시집와 뙈기밭을 일궈 먹고살았다”며 “여름에는 감자만 2달간 먹었고, 겨울 내내 옥수수가 주식이었다. 쌀밥은 구경도 못했다. 1975년 화전민 정책 때 20만원 지원금 받아 삼가리로 내려갔다”고 했다. 약사선원 남쪽 100여m 지점에는 범어사 능가스님(내원암 회주) 기도처가 있다.

장영창家 귀틀집
권기하家 장작난로
주부도家 토굴방

달밭골 속 자연인
달밭골에는 자연을 좋아하는 토굴애호가들도 살고 있다. 달밭골 꼭대기 집에 권기하(68)·최옥순(62) 부부가 산다. 퇴직 후 (5년 전) 달밭골에 터를 잡았다고 한다. 나무와 흙으로만 지은 집에 벽난로가 있고 카페 같은 거실도 있다. 마당에는 손주들을 위한 그네가 집 뒤에는 토종벌통이 있어 대조적이다. 권 씨는 “소백산 북면은 석회암지대로 먹을 물이 못된다. 남면은 황토암 지대로 물(長壽水)이 최고다. 산이 좋고 물이 좋아 산에서 산다”고 말했다.

비로사와 달밭골 사이 왼쪽 산비탈 부도골 120m 지점에 토굴 같은 집이 한 채 있다. 이 집에 주부도(가명,57)·조명선(가명,56) 씨 부부가 10년째 살고 있다. 가스렌지와 밥솥을 제외하곤 모두 자연 그대로 산다. 주 씨는 “10여 년 전 자연을 좋아하는 사람을 만나 자연 속에서 자연인으로 산다”며 “개발을 핑계로 자연을 훼손하는 일은 막아야 한다”고 했다. 지금 주 씨가 사는 토굴집은 달밭골 원주민 장영창(79,삼가리) 씨가 살던 집이다. 장 씨 역시 정감록파 후손으로 6.25 때 이곳에 정착했다고 한다. 부인 박춘흥(78) 씨는 “부도골 초막삼간에 살 때는 시부모, 시동생, 시누이, 5남매 등 15식구가 살았다”며 “당시는 아무 생각 없이 오직 먹고 살기 위해 산전을 일궜다”고 말했다. 아들 장돈식(49) 씨는 “어릴 적 삼가분교 다닐 때 친구들이 10여명 됐다”며 “5학년부터 풍기북부초까지 걸어서 다녔다”고 했다.

달밭골은 일제 때 독립군의 거점이기도 했다. 삼가리 정안동에서 숯을 굽고 살던 김용재(金用才,1894生)는 1923년 독립운동에 투신 군사교육을 받고 군자금을 모아 송달하는 임무를 맡았다. 그 해 9월 달밭골 인근에서 활동 중 일경에 포위 되어 교전하다 순국했다. 유재화 씨는 “저의 조부(秉燦,1880生)님은 소백산지역 군자금 조달자 중 한 사람이었다”며 “조부님은 약재상으로 번 돈을 김용재 독립군에 전달했고, 조모님은 주먹밥을 만들어 비밀리에 독립군을 도왔다는 이야기를 선친(相烈,1920生)께 들었다”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조이형 어르신
박춘흥 할머니
박간난 씨
권기하 씨
최순옥 씨
정선자 씨
박덕양 씨
임희숙 씨
주부도 씨
장돈식 씨

 

영주시민신문  okh7303@yjinews.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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