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부석사 뒤편에 있는 응진전과 자인당

사람들은 조사당의 선비화를 끝으로 다리가 아프다는 이유로 바로 하산하고 만다. 하지만 부석사 관람의 종결은 자인당(慈忍堂)이라고 할 수 있다. 무량수전에서 보면 뒤편 높은 언덕이고, 조사당에서 보면 같은 높이의 서편이다. 조사당 서쪽으로 난 오솔길을 따라 50m 정도만 가면 응진전(應眞殿)과 자인당, 단하각(丹霞閣)이 모두 한 영역을 차지하고 온종일 사람들을 기다리고 있다.

커다란 나뭇등걸 사이로 빠끔히 들여다보이는 이쪽 영역에서 처음 만나는 전각은 응진전이다. 자인당과 함께 거의 일렬로 남향하여 일곽을 이루어 있는 응진전은 석가모니의 제자인 나한들을 안치한 전각이다. 석가삼존불과 16나한상이 안치되어 있다. 석가모니를 중심으로 좌우에 아난과 가섭을 협시로, 다시 그 주위에 16나한상을 봉안하는 것이 가장 일반적인 배치이다. 16나한은 수행이 완성되어 이미 성자(聖者)에 오른 수많은 나한들 중 말세의 중생에게 그 복덕을 성취하게 하고 정법(正法)으로 인도하게 하겠다는 원(願)을 세운 성자들을 말한다. 따라서 이들은 성자 반열이기에 사찰 중요 전각인 응진전에 봉안되는 것이다.

그 옆 자인당에는 3구의 불상이 안치되어 있는데 모두 부석사 동쪽 방골마을 절터에서 1958년 옮겨 온 불상들이다. 이들 중 중앙 불상은 석가모니불이며, 양쪽 두 불상은 비로자나불로 알려져 있다. 이 3불상은 모두 국가문화재로 보호 받고 있는데, 공식 명칭으로는 중앙 불상이 <부석사 석조석가여래좌상(보물 제1636호)>으로 2010년 10월 24일에 보물 지정이 되었고, 양쪽의 비로자나불 2구는 <영주 북지리석조여래좌상(보물 제220호)이라는 이름으로 1963년 1월 21일 일찌감치 보물로 등재되었다.

그런데, 부처를 3구나 안치한 자인당은 한옥 최상 계층의 전(殿)이 아니라 한 단계 아래인 당(堂)으로 되어 있다. 원래 불상 안치 목적이었으면 당연히 ‘자인전(慈忍殿)’이 되었을 테지만, 이곳은 원래 선방의 용도로 지어져 ‘자인당’이 된 듯하다. 자인당의 자인은 원래 석가모니부처를 자인대사(慈忍大師)라고 한데서 기인한다고 한다.

중앙의 석가모니불은 항마촉지인(降魔觸地印), 양쪽의 비로자나불은 지권인(智拳印)의 수인이고, 모두 통일신라 9세기의 작품으로 판단한다. 더구나 불상의 조각 수법이라든지 형식·양식이 매우 유사하여 동일인의 작품이 아닐까 추측하기도 한다.

석조석가여래좌상은 광배가 없으나 불신과 대좌는 거의 완전한 상태이다. 불두(佛頭)가 크고 허리길이가 짧지만 어깨와 무릎 폭이 넓어 앉은 자세에 안정감이 느껴진다. 나발로 된 머리에는 육계가 솟아 있고, 얼굴은 둥근 편으로, 아래로 뜬 두 눈과 굳게 다문 입술을 가지고 있다. 수인은 왼손을 복부에 놓고, 오른손은 무릎 아래로 내려뜨린 항마촉지인을 취하고 있다. 내의의 옷단은 꽃무늬(花文) 장식이 있다. 앉은 무릎 사이에 통일신라의 불상에서 볼 수 있는 부채꼴 옷 주름이 발견되며, 특히 대좌 뒷면에 조각된 지장보살상은 특이하며, 높고 화려한 대좌는 양감이 강조된 불상과 어우러져 조화를 이루는 수준 높은 작품이다. 거의 훼손 없이 원형을 유지한 삼단대좌와 불상은 다소 장식화 경향을 보이는 통일신라 9세기의 전형양식이며, 통일신라 석굴암 계열의 항마촉지인을 따르는 중요한 석불로 통일신라 후반의 양식 연구에 중요한 문화재적 가치를 가지고 있다.

왼쪽 불상은 8각연꽃대좌에 결가부좌한 모습이다. 얼굴은 둥근 편이며 온화한 미소를 띠고 있다. 두 손은 부러졌으나 두 팔이 가슴 쪽으로 올라가 있어 비로자나불의 지권인 모습으로 추측한다. 어깨는 넓게 표현되었으나 신체의 굴곡은 없는 편이며, 양 어깨를 감싼 옷은 평행한 계단식 옷주름이 촘촘하게 표현되어 있다. 넓은 무릎은 신체와 잘 조화하며 단아한 자세이다. 광배는 비스듬히 깨진 것을 붙여 세웠다. 내부는 두 줄의 양각선으로 두광(頭光)·신광(身光)을 구분하였는데 각각 삼존화불(三尊化佛)을 배열하였다. 대좌는 상대·중대·하대로 구성되어 있고, 각각의 면에 여러 가지 상들이 새겨져 있다.

오른쪽 불상은 기본 형태에 있어 왼쪽 불상과 거의 유사하나, 보다 안정감이 있으며 신체의 양감이 풍부한 편이다. 이 불상 역시 두 손은 깨어졌지만 지권인이 확실하므로 비로자나불상이라 할 수 있다. 이 불상 역시 9세기 후반 불교사상과 불상 양식의 특징을 잘 보여주는 작품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다. 그러나 광배는 앞 불상과 다소 달라서 차이가 난다. 꼭지 부분과 왼쪽이 약간 절단되었지만 대체로 양호한 편이다. 거신광배의 내부는 두 줄의 양각선으로 두광·신광을 구획하고, 각각 화불(化佛)을 배열하였다.

응진전 뒤편에 홀로 선 단하각은 중국 6조시대의 사리를 얻기 위해 목불(木佛)을 쪼개 땠다는 단하소불(丹霞燒佛) 고사의 단하천연선사를 모셨다는 설이 있고, 봉황산의 봉황의 알을 쥐들이 훔쳐갈까 봐 지었다는 이야기와 영험한 봉황산에 무당들이 모여들어, 이들을 쫓아내니 쥐들이 들끓게 되어 단하각을 세웠다는 이야기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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