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인생[17] 부석면 남대리 마숙용 어르신

▲멀지만 가까운 그때
나는 부석면 남대리에서 태어났다. 계곡과 산, 자연을 벗 삼아 어린 시절을 보내다가 초등학교를 입학한다는 말을 들었을 때 그 사실이 신기하고 믿기지 않았다. 어머니가 정성스럽게 준비해주신 도시락을 가지고 걸어서 학교를 통학했고, 친구들과 강에 가서 옷 젖는 줄 모르고 해질녘까지 놀았다. 행복한 추억만 있었으면 정말 좋았겠지만, 운명은 나를 행복하게 두지 않았다. 초등학교 4학년이 되었을 때 6.25전쟁이 발발한 것이다. 나는 가족들의 손을 잡고 북한군을 피해 쫓겨 다니기만 했다. 폭격을 맞아 죽을 뻔했던 순간도 한 두 번이 아니었다. 전쟁이 발발한지 3년 뒤, 드디어 모든 사람들이 손꼽아 기다리던 소식, 바로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을 수 있었다. 전쟁이 끝났다는 소식을 들었을 때 기쁘기도 했지만 한편으로는 우리 가족의 보금자리인 집이 폭격에 없어졌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나의 가족
20대가 되었을 때 군대를 가게 되었다. 육군에서 복무하면서 집의 소중함, 부모님의 소중함을 절실하게 느꼈다. 훈련을 받으면서 힘들었지만 곁에서 힘이 돼 주는 전우들이 있었기에 힘든 군 생활을 버틸 수 있었다. 군을 전역하고 25살이 되었을 때 지금의 아내를 만났다. 그 때 당시 아내 나이는 19살, 이름은 김금자였다. 결혼식을 준비하면서 ‘나의 아내는 어떤 사람일까?’라는 궁금증과 ‘내가 결혼을 해서 멋진 남편이 될 수 있을까?’라는 걱정이 들었다. 결혼식이 끝나고 아내의 얼굴을 보았을 때, 아내는 이 세상에서 제일 예뻤다. 신혼생활을 3년 보내고 아이를 가지게 되었는데 ‘내가 드디어 아빠가 되구나.’라는 생각이 들었다. 내가 누군가의 아빠가 된다는 사실이 나를 기쁘게 만들었다. 나는 3남1녀의 아이들을 가지게 되었고, 아이들에게 좋은 아빠가 되고 싶었다. 그리고 내가 경험하지 못했던 걸 아이들에게만큼은 해 주고 싶었다. 더 큰 세상을 보여주고, 좋은 경험을 만들어주고 싶어 아이들을 데리고 많이 놀러 다녔다. 아이들이 커서 이때를 생각해 보았을 때 ‘나에겐 어렸을 때 행복한 추억이 많구나.’ 라고 자신들의 유년 시절을 기억했으면 좋겠다.

▲같이 있다는 것
항상 내 곁에서 힘이 되어 주신 부모님이 돌아가셨다. 마음속 텅 빈 공허함을 느꼈다. 아버지의 빈자리도 크게 느껴졌지만 무엇보다 어머니의 빈자리가 더욱 크게 느껴졌다. 어머니와 함께 농사도 짓고, 딸기도 팔면서 항상 함께했는데 이제는 계시지 않는다는 사실이 나를 슬프게 만들었다. 어머니는 늘 따뜻하셨고, 자신보다 자식들을 먼저 생각하고 위해 주셨다. 어머니를 떠올리게 하는 또 한 가지는 된장찌개다. 사랑하는 아내가 끓여주는 된장찌개도 맛있지만, 어머니의 된장찌개와는 달랐다. 대단한 재료를 넣은 것도 아니지만 왜 그리도 어머니가 해주신 된장찌개랑 밥만 있어도 행복했는지 모르겠다. 하지만 이제는 알 것 같다. 된장찌개에 넣는 특별한 재료가 아니라 어머니와 함께 먹는다는 것 옆에 있기만 해도 행복하고 힘이 되는 사람, 바로 어머니가 있었기에 행복했던 것이다.

▲아직 난 청춘이다
가족을 위해서 살아온 세월을 보상 받듯 아들은 장가도 가고 딸도 시집 갈 정도가 되었기 때문에 더 이상 돈에 대한 걱정은 잊기로 했다. 자식들이 행복해 한다면 나는 자식들을 위해 살아온 나의 삶에 전혀 후회하지 않는다. 셀 수 없는 주름과 검버섯, 6.25때 생긴 상처들이 나의 삶을 대신 말해 주고, 거울을 볼 때면 내 주름들이 가끔 생소하게 느껴질 때도 있지만 싫지는 않다. 내가 그만큼 열심히 살아왔다는 증거이기 때문이다. 심심할 때면 나의 오락방인 마을 회관을 찾는다. 모여서 담소도 나누고 윷놀이도 하고 밭 이야기도 하면 시간가는 줄 모르고 있게 된다. 오랜 시간 바빴던 우리는 마을 주민들과 해외여행을 떠나 보기로 했다. 나와 아내는 밤새 옷도 챙기고, 비행기 안에서 먹을 것도 챙기면서 밤을 보냈다. 난생 처음 비행기라는 것도 타보고 꿈만 같던 일이다.

▲인생의 고비는 항상 내가 행복할 때쯤 찾아온다.
이제는 정말 나이가 들었는지 옆에 있는 무엇인가를 잡고 일어난다. 내가 늙었다는 것에 실감이 든다. 어린나이에 얼굴도 모르는 나를 만나 농사짓고 궂은 일을 한 아내 역시 몸이 성할 리가 없다. 매일 깨워주던 아침, 평소 같으면 같이 밭에 가서 못다 심은 씨도 심고 잡초도 뽑아야 할 시간이지만 아내는 일어날 힘조차 없는 것 같다. 병원에서 준 알약 몇 개에 의존해 고통스러운 시간을 혼자 보내는 아내를 보면 내 심장을 찢는 듯한 아픔과 미안함이 솟구친다. 나는 그저 아픈 곳을 손으로 어루 만져준다. 죽을 때가 다가온다는 것은 무서운 일이다. 애써 받아 들여야 되지만 아직 받아들이기에는 서툴다. 하지만 오늘 하루 내가 살아 있음에 감사 하면서 살고 싶다. 지금 내가 살아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부인이 아프지만 내가 지켜줄 수 있다는 것에 감사하고 감사한다. 내 곁에 든든히 있는 자식들에게도 감사한다. 나에게 또 다른 힘을 주는 두 동생에게도 감사한다. 아직 밭에 농작물들에게 물을 주러 갈수 있음에 감사한다. 아내의 아픈 곳을 어루만져 줄 수 있음에 감사한다. 아내와 함께 병원에 가는 것이 힘들지만 웃어 볼 수 있음에 감사한다. 지금 나의 자서전을 쓰러 온 이 아이들에게도 감사한다. 나이가 들수록 나는 내가 어떤 모습으로 변할지도 무슨 말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허나 나는 지금 이 자서전에 쓰여진 내 추억들은 결코 잊지 않을 것이다. 정든 고향의 달빛이 자꾸 나를 부른다.

정리/ 정세주 이영서

청소년기자(영주여고 1)
* 본지는 지역 어르신들의 삶을 들여다 보는 ‘은빛 인생’과 함께 10대들의 고민을 공유하고 꿈을 응원하는 ‘너의 꿈을 응원해’ 라는 코너를 격주로 운영합니다. 독자 여러분들의 많은 호응 바랍니다.<편집자 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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