권자미 시인

포도나무를 태우며 -허수경

서는 것과 앉은 것 사이에는 아무 것도 없습니까
삶과 죽음의 사이는 어떻습니까
어느 해 포도나무는 숨을 멈추었습니다

사이를 알아볼 수 없을 만큼 살았습니다
우리는 건강보험도 없이 늙었습니다
너덜너덜 목 없는 빨래처럼 말라갔습니다

알아볼 수 있어 너무나 사무치던 몇몇 얼굴이 우리의 시간이었습니까
내가 당신을 죽였다면 나는 살아 있습니까
어느 날 창공을 올려다보면서 터트릴 울분이 아직도 있습니까

그림자를 뒤에 두고 상처뿐인 발이 혼자 가고 있는 걸 보고 있습니다
그리고 물어 봅니다
포도나무의 시간은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에도 있었습니까
그 시간을 우리는 포도나무가 생기기 전의 시간이라 부릅니까

지금 타들어가는 포도나무의 시간은 무엇으로 불립니까
정거장에서 이별을 하던 두 별 사이에도 죽음과 삶만이 있습니까
지금 타오르는 저 불길은 무덤입니까 술 없는 음복입니까

그걸 알아볼 수 없어서 우리 삶은 초라합니까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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십 년 가까이 베란다에 두고 정성을 쏟았던 백화등이 말라죽어버렸다고 슬퍼하는 친구가 있습니다. 여행이 너무 길었던 탓인가 봅니다. 열흘이 지나도록 말라죽은 나무를 차마 버리지 못하고 혹시나 하는 마음에 마른 뿌리에게 물을 주고 있다고 합니다. 아마도 꽃으로 잎으로 가지로 교감하면서 위안 받으며 지낸 시간들에 대해 친구는 이별할 시간이 필요하겠지요.

시인은 시에서 그 ‘사이’를 말하고 있습니다. 서는 것과 앉은 것 사이, 죽음과 삶 사이를 말합니다. 그것은 깊은 곳에서부터 오는 사유에서 비롯된 것입니다.

며칠 전 시인이 삶을 너머 죽음 저편으로 건너갔다는 소식을 들었습니다. 삶 이쪽 편에 서 있는 사람들은 애석하고 황망합니다. 다시는 돌아오지 못할 곳으로 떠난 시인과 시인의 시를 사랑하던 사람들 사이에 국화꽃이 피고 가을달이 지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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