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안 최상호(시조시인·본지논설위원)

21세기의 대한민국은 갑질이 만연한 사회다. 언론에 자주 등장하는 ‘갑질’의 검색 동향을 살펴보면 몇 개의 대표적 사례가 있다. 대한항공과 아시아나의 닮은꼴 경영과 땅콩 회항, 백화점 모녀, 국정 농단, 최근의 대기업 회장부인 폭력, 대장 부부 같은 단어가 떠오른다.

갑질의 트라우마 사이사이에 대리점 강매, 인분 교수를 포함한 교수 갑질, 승무원·콜센터 직원 등 감정노동자에 대한 언어폭력을 비롯해 많은 사건이 끼어 있음은 물론이다. 실제로는 그 이상으로 우리 일상에 가득한 갑질은 일반이 그저 그러려니 할 뿐이다.

식당과 편의점 근로자에 대한 반말과 인격적 무시는 예사다. 직장 상사의 억압적 군기 잡기는 소규모에서도 빈번하며, 훈육이라는 명분의 가정폭력도 상존한다. 그야말로 갑질사회라 해도 지나치지 않다. 갑질사회에서 우리 모두는 상위에 대한 을이자 하위에 대한 갑이 됨을 모르고 있을 뿐이다. 갑과 을의 경계선상에서 위태로운 하루살이가 불안하다. 내가 언제 을로 바뀌어 갑질을 당할지 모른다는 불안이 갑의 자리에 섰을 때 을에 대한 공격성으로 드러나는 건지도 모른다. 갑질본색이나 갑을관계란 우월한 지위를 이용한 부당한 관계로 정의할 수 있는데 이는 다음의 두 유형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첫째 유형은 자신의 부하·후임, 학생·자녀를 본인 소유물로 생각하는 주인형 갑질이다. 둘째, 돈으로 산 물품과 같이 가해자가 되어 다른 을에 전치하는 을간 갑질이 있다.

그러면 이것은 구조적 문제인가 개인의 일탈인가? 이 둘은 공범관계라고 봐야 한다. 구조 차원에서 과도한 수직적 위계질서가 갑질을 부추겼다. 불투명한 폐쇄형 조직도 마찬가지다. 돈과 권력이 인간을 앞서는 비인간적 물신 숭배와 개인 차원에서 미숙한 분노 조절 능력, 그리고 갑질의 득실을 합리적으로 판단하는 인지기능 손상이라는 개인의 일탈이 결합돼 갑질을 만들었다. 안타깝게도 그 하나하나가 우리 사회의 특징이라 할 수 있는 것들이다.

갑질은 봉건시대로부터 근대화되지 못하고 봉건적 신분사회의 주종관계에 고착된 잔재라고 생각된다. 삼강오륜이 우리의 전통윤리라고 하지만, 현실에서는 개인의 가치가 다른 모든 것에 우선시되므로 상호평등부터 생각해야 한다. 인간 존엄과 평등의 민주 가치로 성장하지 못한 시대적 낙오자의 모습이 부모의 갑질, 상급자의 갑질, 고위직의 갑질 나아가 고객의 갑질로 드러나는 것이다. 갑질이 마치 승리의 트로피이자 권력의 상징인 양 과시하지만 그것은 오로지 미개함과 야만성을 드러낼 뿐이다. 을이 갑질에 무력한 근본적 이유는 사회안전망의 부재에 있다고 본다. 한번 세상 밖으로 낙오되면 다음번 기회는 없을 거라는 불안 때문에 웬만해서는 참아야 한다. 유연화된 노동시장에서 안정된 삶은 보장되지 않기에 생존을 인질로 잡힌 을은 때로 병·정이 되는 것마저 감수해야 한다.

얼마 전 서울에서 한 건물주가 세입자가 도저히 감당할 수 없는 임대조건을 제시하여 건물주를 폭행한 사건이 있었다. SNS에는 ‘조물주보다 건물주가 더 우위’라는 댓글이 꼬리를 물었다. 법조차도 보호하지 못하는 임대차보호법이다. 사회안전망이 갖추어지지 않은 보기다.

때로 갑은 온화한 척 을을 위로한다, 인생은 원래 아픈 거라고 달랜다. 무한한 노력으로 갑이 되라고 등을 떠밀고, 명상과 즐거움을 통해 고통을 잊으라고 유혹한다. 권위에의 순종이 미덕이라고 세상에의 동화가 성숙이라고 세뇌한다. 가해의 순간조차 갑은 설교하는 것이다,

오랜 세월에 걸쳐 숙성한 노하우를 고려하지 않고, 다른 데 가서 다시 시작하면 된다고 조언했던 건물주를 폭행한 세입자의 분노에 어느 누구도 관심을 가지지 않는다. 오히려 아픔만큼 성숙하게 자신이 만들어주고 있노라고 설교한다. 을은 견뎌내며 불합리하고 병적인 세상에 적응하기를 강요받는다. 그러나 크리슈나무르티는 “건강하지 않은 세상에 잘 적응하는 것은 건강의 척도가 아니라고!” 절규한다.

갑이 스스로 개과천선해 선을 베풀기 바라는 자체가 갑을 프레임에 갇힌 사고이다. 적극적 노력 없이는 갑의 세상이 더욱 공고해질 뿐이다. 인간은 본질적으로 평등하며 갑을관계는 직업적 교환관계에 국한될 뿐이라는 상식이 공유돼야 한다. 승리하면 갑질권 포함 모든 것을 얻는 듯 경쟁을 부추기는 교육은 타인의 입장에서 공감하고 다양한 삶을 경험하는 교육으로 바뀌어야 한다. 또한 을의 존엄성을 지키는 문명사회의 보호 장치가 필요하다. 문제를 제기해도 세상은 바뀌지 않고 오히려 개인만 위험할 거라는 사회적 불신에도 불구하고 세상을 조금씩 진보시키는 한 명 한 명의 양심과 용기에 존경과 감사를 표시해야 한다. 우리 모두의 갑질은 사회 탓이라고 개인은 사회에 미루고 개인의 일탈 탓이라고 사회는 사람에게 미루지만, 갑질은 시스템과 인격이 공범으로 만들어낸 악일 뿐이다. 갑질은 심각한 질병, 악질(惡疾)이라고 정의한다. 더 이상 방치해서는 안 되는 병이기에 각 개인이 스스로 치유에 나서야 한다. ‘선비의 고장, 영주’에서는 절대 일어나지 않기를 기대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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