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수서원 사액 봉안례 최초 재연
명종어필 재연의 서예퍼포먼스도

선비문화관광연구소(대표 배준우)는 한국선비문화축제 시작을 알리는 개막식에서 ‘소수서원 사액 봉안례’를 재연해 축제의 의미를 더했다.

지난 4일 오후 7시부터 진행된 소수서원 사액 봉안례는 ‘편액 하사’ 무대부터 재연돼 과거로 돌아간 듯 궁중의복을 갖춘 연기자들이 무대에 올라 눈길을 끌었다.

무대 중앙에는 명종이 어좌에 앉고 그 아래 대신 6명이 좌우로 나란히 섰다. 영의정은 한발 나서서 “풍기의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은 황해도 관찰사 주세붕(周世鵬)이 창립한 것인데 그 터는 바로 문성공(文成公) 안유가 살던 곳으로 무릇 학령(學令)을 세우고 서적(書籍)을 비치하며, 전량(田糧)과 공급의 도구를 다 갖추어서 인재를 키워낼 만하다”며 “이황(李滉)이 편액(扁額)과 서적·토지·노비를 하사해 줄 것을 청하였는데 전하께서 특명으로 내려 보낸다면, 먼 곳의 유생들이 반드시 고무 감격하여 기뻐 일어날 것”이라고 아뢴다.

명종은 이 의견에 대해 대신들의 생각을 물었다. 다시 영의정이 지방의 유생들이 무너진 유학을 바로 세우고 학문에 정진할 수 있도록 사액을 내리심이 옳다고 허락을 구하자 대신들도 뜻을 같이했다. 명종이 서원의 이름도 함께 내려야 한다며 대제학의 생각을 물었다. 이에 서원의 이름을 이미 무너진 유학을 다시 이어 닦게 한다는 뜻으로 ‘소수’라는 이름을 내놓았다. 의미가 좋다며 명종은 “직접 소수서원의 편액을 써서 하사하겠다”고 말했다.

이어 영의정이 “이황(李滉)이 편액(扁額)과 서적·토지·노비를 하사해 줄 것을 청했다”며 “전하께서 특명으로 내려 보낸다면 먼 곳의 유생들이 반드시 고무 감격해 기뻐 일어날 것”이라고 아뢴다.

명종이 어좌에서 일어나 미리 준비된 지필묵으로 탁자에 준비된 붓을 들고 편액을 써내려갔다. 이때 동시에 우리고장 서예가인 이산 박기진 선생이 한쪽에 미리 준비된 큰 천에 명종의 어필을 재현하는 퍼포먼스를 펼쳐 관객들의 시선을 끌었다.

‘사액 지영례’가 시작되고 사액현판을 들은 대신이 현판을 정청(현판 거치대)에 안치 후 사배했다. 풍기군수도 사액현판에 사배했다. 이어 대신은 “백운동서원을 사액서원으로 낙점하노라”라고 말했다. 한바탕이 잔치 한마당이 열리고 장엄한 음악이 흐르자 ‘사액 봉안례’가 시작됐다. 이렇게 ‘소수서원’의 사액현판은 468년 전으로 돌아가 축제에서 다시 재연됐다.

이날 재연행사를 본 시민들은 “개막공연을 보러왔는데 소수서원 사액 봉안례가 재연된다는 설명을 듣고 무엇인지 궁금했다”며 “재연되는 모습을 지켜보니 축제에 의미 있는 행사를 준비한 것 같다. 다음에는 축제가 열리는 소수서원에서 행사를 진행해도 좋겠다”고 말했다.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최초의 사액 서원이다. 사액(賜額)은 임금이 사당, 서원, 누문 따위에 이름을 지어서 새긴 편액을 내리던 일이다. 1550년(명종 5) 당시 조선 명종임금이 소수서원 현판의 글씨를 직접 써서 하사하는 모습에서부터 소수서원 강학당에 걸려지기까지의 모습이 468년 만에 재현된 것이다.

최초로 국학의 제도를 본떠 선현을 제사지내고 유생들을 교육한 곳인 ‘소수서원’은 풍기군수 주세붕이 유학자인 안향의 사묘를 설립한 후 1543년 유생교육을 위한 백운동서원을 설립한 것이 시초이다. 이후 경상도관찰사 안현이 서원의 경제적 기반확충과 운영방책을 보완하고 이황이 교학진흥과 사풍을 바로잡기 위해 서원 보급의 중요성을 주장하면서 사액과 국가의 지원을 요청했다. 이에 소수서원은 1550년 명종으로부터 현판을 하사받았다. 사적 제55호로 지정되고 보물 제59호 숙수사지당간지주, 국보 제111호 회헌영정 등과 141종 563책의 장서가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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