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늘에서 바라본 소수서원

 

안향선생 초상화

소수서원과 안향 선생

 

조선선비의 큰 스승 칭호국내최초 주자학 연구
사회질서 바로 잡을 사상인재 키우고 성리학 체계화

▲세계는 유교에 주목하고 있다
지난해 독일인 햄메어트 교수가 쓴 ‘타이거 매니지먼트(Tiger Management)’란 경영서적이 발간됐다. 세계적인 불황속에서도 선전하고 있는 한국기업들의 빠른 의사결정과 유연한 대처능력, 저돌적이고 공격적인 성향을 호랑이에 비유한 말이라고 한다. 책의 저자는 한국식 경영의 강점에는 전통적인 유교의 덕목을 중시하는 문화와 높은 교육열이 중요한 요인이라고 분석했다.

지난 3월에는 중국 최고의 MBA스쿨인 ‘장강상학원(長江商學院)’의 샹빙(項兵) 원장이 국내 한 호텔에서 열린 아시안리더십 컨퍼런스에서 “유교정신이 21세기를 이끌 것”이라고 주장했다. 그는 “유교를 기반으로 한 중국의 정치제도가 중국 성장의 핵심 동력이며, 유교 정신이 중국을 세계 일류국가로 발전시킬 것”이라고 말했다. 또한 “21세기에는 공동체를 중시하는 유교 중심의 사회로 변할 것”이라고도 내다봤다.

▲ 인재양성의 요람, 소수서원(紹修書院)
경북 영주시 순흥면 내죽리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서원이자 사액서원인 소수서원(紹修書院)이 있다. 주자(주희)의 백록동서원을 본(本)으로 해 처음 이름은 ‘백운동서원’이었으며, 1542년 풍기군수로 부임한 주세붕(周世鵬)이 조선 선비의 큰 스승인 안향(安珦, 1243~1306)선생을 배향하기 위해 세운 것이다. 그로부터 8년 뒤인 명종 5년(1550)에 퇴계(退溪) 이황(李滉)이 풍기군수로 부임한다. 퇴계는 명종임금에게 인재를 길러낼 서원의 중요성을 알리고 ‘소수서원(紹修書院)’이란 친필 편액과 서책, 전답 등을 하사받는다.

이을 소(紹), 닦을 수(修) ‘소수(紹修)’란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뜻이 들어있다고 한다. 그러나 명종의 명에 따라 소수서원이란 이름을 지은 대제학 신광한(申光漢)이 ‘백운동소수서원기’에서 소수라고 한 연유를 “학문을 하며 그 뜻을 밝히지 못하면 자신을 닦는 것이 어떤 일인지 모르며, 자신을 바로 닦지 못하면 행동을 바르게 가질 수 없다”고 했다. 이는 ‘소수(紹修)’에 단순히 무너진 학풍을 다시 세운다는 의미를 넘어 학문과 수양을 통해 바른 행동을 실천하는 인간의 참된 본성을 회복하자는 큰 뜻이 담긴 것으로 볼 수 있다.

과연 소수서원은 그 이름답게 조선조 400년간 4천명이 넘는 훌륭한 인재를 길러냈고 그 정점에는 민족의 큰 스승인 안향(安珦) 선생이 있다.

▲ 동방성리학의 비조(鼻祖), 안향 선생
안향(安珦, 1243~1306)선생의 자는 사온(士蘊), 호는 회헌(晦軒), 본관은 순흥(順興)이다. 고려 고종 30년(1243) 순흥에서 태어났으며, 밀직부사(密直副使)였던 부(孚)의 아들이다. 고려 원종1년(1260) 문과에 급제했고 충렬왕 15년(1289년)에 왕과 함께 원나라 연경에 들어가 ‘주자전서(朱子全書)’를 접하고 필사한 뒤 돌아와 우리나라 최초로 주자학을 연구했다.

당시 고려사회는 불교와 도교의 폐단과 악습으로 백성들이 도탄에 빠지는 등 사회 기반 자체가 흔들릴 지경이었다. 이러한 때에 선생은 주자학의 연구를 통해 성리학이 사회질서를 바로잡을 사상이자 나라를 떠받칠 인재를 키워낼 수 있는 학문이 될 수 있도록 체계화시켰다.

선생은 우리나라 최초의 성리학자이면서도 이미 당대에 학문이 드높았다. 문하시중(조선시대 영의정급)이란 최고의 벼슬을 지냈으며, 안향 선생의 학맥을 이어받아 누구보다 학문이 진중했던 이제현(李齊賢, 1287~1367)도 안향 선생을 그 시대 유학의 으뜸이자 대표 격으로 높이 평가하며 추앙했다.

▲ 인재양성에 최선을 다한 민족의 스승
‘고려사 열전’ 안향 편을 보면 선생이 주창하기를 “재상의 임무 가운데 인재를 양성하는 것보다 우선하는 것이 없는데 지금 양현고가 비어 인재를 기를 수 없으니 6품 이상은 은 한 근씩을, 7품 이하는 등급에 따라 포(布)를 내어 그 이식(利息, 이자)으로 섬학전(贍學田)을 조성하자”고 했다. 실제로 선생은 학문에 무심했던 무신(武臣)들마저 설복시켜 교육기금을 받아내 양현고를 채우고 섬학전도 마련해 서책을 구입하는 등 인재를 기를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선생의 노력으로 충목왕 즉위년(1344년)에는 성리학의 핵심 교과서인 사서(四書)가 과거 시험과목으로 채택되기도 했다.

학문 수학을 통해 인격을 수양하고 인재를 길러내는 것이 유학자인 선비의 도리라며 평생 인재양성에 최선을 다했던 안향 선생. 훗날 공민왕의 개혁 정치를 보좌하고 조선을 건국하는 등 격변기의 역사를 이끌어간 무수한 신흥 사대부들이 바로 선생의 노력으로 배출됐다 해도 과언이 아니다.

사후 안향 선생은 평생 학문과 인재양성에 몸 바쳤던 삶을 대변하듯 그 시호를 문성(文成)으로 받으셨다. 또한 공자(孔子)를 모신 문묘(文廟)에 함께 배향(配享)되어 유학자로서 최고의 영예를 누리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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