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성인이 들어오는 꿈을 꾸고 퇴계를 낳았다는 성림문

퇴계의 외가는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이다. 안동과 예천의 경계인 구담에서 신풍 쪽으로 곧장 가면 대죽리가 나온다. 당시는 용군현 대죽리(大竹里)였다. 이 마을은 예로부터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킨 선비들이 은둔한 곳이라 한다. 퇴계 어머니 춘천박씨 집안은 원래 춘천에 살았는데, 고조부가 이리로 옮겨왔다.

이 마을은 역사적으로 뛰어난 인물이 즐비하단다. 장수 의산서원에 배향된 임란 의병장 이개립도 이 마을 출신이다. 그러나 이 마을이 퇴계의 외가라는 사실은 별로 알려지지 않았다. 퇴계를 키워낸 그의 어머니가 잘 알려지지 않았기 때문이다. 퇴계는 태어난 지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어머니에게 전적으로 의존하면서 성장하였기에 자주 이곳 외가를 왕래한 것으로 보인다. 예안 온계(도산면 온혜리)에서 이곳까지는 200리 길이다.

퇴계의 어머니, 춘천박씨는 고난의 일생을 살았지만 영광의 일생이었다고 할 수 있다. 32세에 청상(靑孀)이 되어 전실(前室) 아이 넷을 보탠 8남매를 혼자 길러 성장시키느라 고생은 막심했지만, 온계나 퇴계와 같은 대학자를 길러낸 보람이 매우 컸을 것이라는 뜻이다. 남편을 먼저 보내고 나서 그녀는 더욱 맘을 다져 농사일과 양잠일에 힘을 써 지닌 살림을 줄이지 않았고, 여러 아들들을 서당에 취학시켜 글을 배우게 하였다. 특히 행실을 중히 여겨 자세를 바르게 가지도록 인성교육에 치중하였다 한다.

퇴계연보에는 퇴계 어머니의 훈도가 퇴계의 생애를 절대적으로 결정했던 것으로 기록하고 있다. 6세 전후에 이미 밤중에 어른이 부르면 빨딱 일어나곤 했다고 한다. 어머니 훈도가 퇴계를 그렇게 만들었던 것이다.

뒤에 두 아들이 과거에 급제하고 벼슬길에 오르는데도 기뻐하지 않고 오히려 걱정하였다고 한다. 글공부나 과거급제를 단순히 출세로 보지 않고 인간됨됨이의 길로 보았던 것이다. 실제로 퇴계는 사마시(司馬試) 이후 과거에 큰 뜻을 두지 않아 32세에 형의 권고로 늦게 과거에 나갔다. 퇴계는 어머니의 훈도를 가슴에 깊이 새긴 그런 어머니의 그런 아들이었다. 글자를 익힌 적이 없는 어머니였지만, 보고 들은 것을 바탕으로 아이들을 조용히 훈도하는 그런 교육자였다.

퇴계의 어머니가 세상에 크게 알려지지 않은 것은 자신의 지식과 생각을 밖으로 드러내지 않고 안으로만 되새김질하여 자녀들에게 실천토록 지도했었기 때문이다. 그녀의 교육방법은 외양보다 내실에 있었고, 또한 그 실천을 중시하고 있었다. 율곡의 어머니 신사임당과는 또 다른 조선시대 여성 교육의 표상이라고 할 수 있다.

율곡의 어머니, 사임당(師任堂) 신인선은 1504년 강릉부 죽헌리 북평촌의 오죽헌에서 태어난다. 딸만 다섯 중 둘째 딸이었다. 유난히 영특했던 그녀는 호를 사임당으로 지었다. 중국의 대표적인 현모양처로 알려진 태임(太任)을 닮겠다는 뜻이었다. 주나라 문왕의 어머니로 태교를 처음으로 실천했던 여성이었다.

신사임당은 어린 시절부터 아버지와 외조부로부터 글과 그림을 배웠다. 천자문, 명심보감 외에도 사서삼경(四書三經)과 통감(統監) 등 경전을 두루 읽어 한학에 정통하였던 것으로 알려져 있다. 그와 같은 학문적 소양 외에도 그녀는 시문과 그림에 특별한 재질을 보였다. 신사임당은 조선 건국 후 최초로 자신의 재능으로서 명성을 떨친 여성이라 할 수 있다. 그래서 아들 율곡보다 더 유명세를 타는 인물이 되었다.

율곡의 부친 이원수가 수운판관으로 재직하고 있을 무렵 사임당은 친정에 머물러 있었는데, 어느 날 홀연히 용이 가슴 가득히 안겨 오는 꿈을 꾼지라 즉시 집에 돌아와 기다렸는데, 그날 마침 원수공이 도착했다. 그날 밤 잠자리에서 율곡을 잉태하였고, 9개월 만에 오죽헌에서 율곡을 낳았다. 사임당은 아들 율곡이 닮아야 할 인물로 주나라 주공을 꼽았다. 주나라 무왕의 동생으로 형을 도와 태평성대를 이루었고, 조카 성왕이 어려 섭정을 하면서도 왕위를 꿈조차 꾼 적이 없는 어진 사람이었다고 한다.

퇴계와 율곡은 조선시대를 대표하는 선비로 이름을 남긴 분들이다. 이런 큰 인물 뒤에는 항상 그들을 조련하는 어머니들의 큰 훈계가 뒤따르고 있음을 알 수 있다. 퇴계의 어머니는 보이지 않는 곳에서 조용하게, 율곡의 어머니는 나타나서 당당하게 자식들을 가르쳤다. 방식이 조금 다를 뿐….

퇴계는 모친의 당부에 따라 중앙 관직을 사양하고 지방 관리로 지내다가 검소하게 풍기군수로 벼슬을 마감한다. 그의 학문을 익히 들은 23세 율곡이 58세의 거성 퇴계를 초당으로 찾아와 3일간 학문을 나누었다는 이야기는 유명하다. 그렇게 퇴계를 평생 스승으로 모셨던 율곡은 퇴계가 세상을 떠나자 3년간 상복으로 예의를 갖추었다고 한다.

글을 전혀 읽은 적이 없는 춘천박씨의 초췌한 가슴과 당당히 학문 체계를 간추린 사임당의 화려한 두뇌 사이에서도 우리는 내면을 잔잔히 흐르는 일맥의 동질성을 발견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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