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인생[4] 5남매 훌륭히 키워낸 류단 어르신

서애 류성룡 선생 후손...하회마을 강 건너 마을이 고향
가난한 집에 20살에 시집와 억척스럽게 자식 키워

“욕심 채릴 것 없이 나만 착하게 살면 행복은 돌아와요. 옳고 그른 것은 말해도, 너무 따지지 말고 살라고 말하고 싶어요. 너무 따지고 살면 적이 생기기 때문에 사는 게 힘들어져”

풍산 류 씨인 류단(80세) 어르신은 안동시 풍산읍 하회마을 강 건너에 있는 광덕동이 고향이다. 큰 부자는 아니어도 양반집에서 귀하게 자랐다고 한다.

“하회마을에 있는 초등학교를 다녔는데, 배를 타고 물을 건너야 했어요. 일꾼들이 업고 물을 건네줘서 학교를 다녔어요. 나중에는 광덕에 분교가 생겼고, 광덕에 있는 신망중학교를 다녔는데 아버지가 돌아가셔서 중도에 그만두고 엄마랑 둘이 살았지 뭐. 언니는 일찍 죽었고 오빠는 서울로 가고, 친척들 의지하며 살았어요”

▲ 부자는 아니어도 양반집에서 귀하게 자라
일제 강점기의 기억이 희미하다는 류단 어르신은 어렸을 적의 기억을 한자락 떠올렸다.
“일제 강점기에 순사들이 마당으로 한가득 들어와서는 목화 따서 단지에 넣어둔 것이랑 놋그릇이랑 다 찾아내어 도둑놈 훔쳐가듯 가져갔어. 순사라고 하면 기절을 했지. 

그리고 그 때는 몰랐는데, 지금 생각해보면 할아버지가 독립 운동가들에게 자금을 대준 것 같아. ‘오늘은 안대문 걸지 말아라’ 하신 날이 자금을 가지러 오는 날이었던 것 같아. 

6.25때는 소에 쌀을 싣고 술도 얹고 닭 잡아 얹고 피난을 가는데, 사람하고 소하고 같이 걸으니 멀리 못가요. 피난을 가서 빈집이 된 남의 마당에서 밥해먹고 이불 깔고 덮고 자는데, 이 집 마당에도 저 집 마당에도 피난민이 꽉 찼어. 아버지는 다시 집으로 가서 양식 챙겨 오시고, 그러다 6.25가 끝났어”

▲ 안동에서 영주로 20살에 시집와
조선시대 임진왜란 당시 공을 세운 서애 류성룡의 13대 손인 류단 어르신은 같은 마을에 살던 지인의 중매로 우리고장 장수면으로 20살에 시집을 왔다.

“시집을 어예 왔냐하면, 우리 종반 중에 내가 제일 못 낫지만, 덕스럽다고 나보다 나이 많은 사촌들 놔두고 내가 먼저 시집을 왔어요. 말로는 부자라 했는데 와보니 아무것도 없더라고. 일학년 책에 나오는 그림 같은 집. 손을 들면 지붕이 대이고 안방하나에 도장방, 사랑방 하나인 3칸짜리 집. 이런 집도 있나 싶었지. 그래도 우리 신랑은 영주농고를 2등으로 졸업했는데, 실력도 좋고 키도 크고 인물도 좋았어요”

시집을 와 열심히 농사를 지어도 설을 쇠기도 전에 양식이 모자라 빌려다 먹었다는 류단 어르신은 겨울에는 집이 하도 추워서 시집올 때 해온 이불을 방바닥에 깔아놓고 살았다고 한다.

“결혼하기 전에는 모녀만 사니까 일도 없었는데, 가난한 집에 시집을 와서 방이 하나니까 저녁을 해먹고도 쉬지 못하고... 그래도 우리 신랑이 살려고 그렇게 노력을 하는데, 불쌍한 생각이 들어서 친정 생각도 안했어. 그보다 착한 사람이 없었어. 하지만 착한 사람 옆에 사는 사람은 애먹어. 집에 가서 없다 하면 엄마 맘 아플까봐 말도 못하고.... ”

▲ 무섭도록 알뜰하게 살아
없는 살림에 시동생에 시어머니까지 모시며 살았으며 신랑마저 군에서 병을 얻어와 일을 도맡아 하느라 류단 어르신은 몸이 자꾸 아팠단다.

“신랑이 군에 가 병을 얻어서 치료하느라 살림을 다 팔았어요. 신랑은 아프고, 없는 살림에 애들 다섯 키우고 교육시키려면 정신 못차립니다. 사람들이 내가 좀 무섭다고 생각하는데, 실지로 무서운 게 아닌데....내가 많이 알뜰해서 그래요. 내 나름대로 애를 많이 썼어. 그래도 내가 고생하는 거는 괜찮아. 저들이 잘 되어야지. 누가 나를 미워해도 우리 애들만 잘되면 괜찮아요”

한 집안의 가장 역할까지 맡아야 했던 류단 어르신은 누구보다도 열심히 알뜰하게 살며 5남매를 키웠다. 자식들 또한 장학금을 받으며 모범적으로 자라주었다.

“5남매가 다 서울에서 잘 살고 있어요. 첫째는 대우건설 다니고, 둘째는 서울지하철, 셋째는 고등고시 합격해서 감사원에 있어요. 첫째 딸은 은행 다니다 시집갔고, 둘째 딸은 서울시 공무원 하는데, 애들이 다 잘 되었어. 내 욕심에는 장관쯤 나왔으면 좋겠어. 우리 셋째는 그렇게 될 것 같아”

주변사람들이 훌륭하게 자라주는 자식들을 보며 ‘하회댁을 닮아 재주 있지’ 그렇게 말을 할 때가 제일 속상했다는 류단 어르신은 “우리 양반이 나보다 몇 배 더 똑똑한 분인데, 그만큼 착하고 착실한 분을 주변 사람들이 못 알아줄 때가 제일 속상해. 우리 양반이 돌아가신지 6년이 되었는데, 서로 미워하고 억누르고 당하는 사람을 보면, 누가 좀 잘못하는 사람이 있으면 우리 양반이 더 생각나요. 눈물이 나요”

김미경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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