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갈산구곡(제5곡) 각자

도교에서는 도통한 사람을 ‘도사(道士)’라고 한다. 도교는 종교 교단을 갖춘 이른바 교단도교와 그렇지 못하고 민간에서 풍속적으로 신앙되는 민중도교로 구분할 수 있다. 조선조에 들어 기복(祈福)을 위한 의식 중심의 교단도교는 유학자들의 반대로 폐지됐다.

따라서 도사도 사라질 처지였지만, 단학으로 불리는 수련적 도교가 대신 그 맥을 이었고, 또한 민간의 신앙이라 할 수 있는 민간도교는 풍속적으로 지속되어 민속신앙으로 폭넓게 깔려졌다.

도교는 중국에서 발생한 민간신앙의 한 부류인데, 신선사상은 물론 음양오행, 복술(卜術), 역술, 천문, 점성술 등에 유교와 불교사상까지도 포섭해서 잡다한 민간신앙을 하나의 종교로까지 끌어올렸다. 도교의 궁극적인 목표는 신선(神仙) 또는 진인(眞人)이 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실제로 일반 대중들은 현세적 길흉화복에 더 관심을 두는 것이 사실이다.

북위시대에는 한때 불교를 압도하기도 했지만, 음양오행술파, 복술파, 역술ㆍ천문ㆍ지리파, 점성술파, 신선술파 등으로 갈라지기도 했다. 송나라 때도 도교는 매우 중시되었다.

그러던 것이 거란의 금이 등장하면서 도교에 대한 혁신운동이 일어나고, 도교와 불교 간 사상논쟁이 일면서 도교로 흡수되었던 민간신앙까지 다시 불교로 이적된다. 그 대표가 관세음사상, 지장사상 등이란다. 이런 어려운 흐름으로 부정적 인식이 확산되고, 근대 서구문명까지 밀려들면서 도교는 완전히 미신으로 취급되고 말았다.

중국을 거친 불교, 유교, 도교의 영향을 받은 우리나라에서는 유(儒)·불(佛)·선(仙)이 혼합된 무속신앙이 만들어졌다. 도가는 불교의 인과응보설과 윤회설을 받아들였고, 불교도 도가의 사상을 받아들여 경전을 만들었다. 한국의 불교도 무속의 대상인 산신당을 사찰마다 들여 놓았다. 하지만, 정통 종교로부터 소외된 무속이 스스로의 체계를 갖추어나가기는 그리 쉽지 않아 보인다.

도(道)란? 우주의 규율, 원리, 본체 등을 가리키는 중국의 철학으로, 노장사상에서 표방한 도는 천지의 시작이며, 만물의 어머니로서의 우주의 생성 원리이자 대원칙이다. 노자는 도를 따르고 도를 지키는 것을 덕(德)이라 하였다. 노장사상의 핵심인 무위자연(無爲自然)은, 한국 고유 신앙위에서 중국의 신선사상에다 유교, 불교를 덧붙여 형성되었다고 볼 수 있다. 「도덕경」에 “사람은 땅에서 본받고, 땅은 하늘을 본받고, 하늘은 도를 본받고, 도의 법은 자연에서 따온다.”는 내용이 있다. 그러니까 무위는 자연에서 인간의 본성인 도를 깨치는 것으로 볼 수 있다.

무위는 인위(人爲)의 반대 개념이며, 인간의 의해 제정되고 실천되는 제도[禮]나 행위를 부정하는 개념이지만, 결코 ‘아무것도 하지 않는다’는 뜻은 아니다. 자연스럽게 자유자재(自由自在)하고, 스스로 그러하고[自己如此], 무엇에도 의존하지 않으며, 사물의 실상과 합일로써 얻어지는 정신적 원만성이다. 혼란해진 자신을 정화함으로써 본래의 자연스러움을 회복하려는 노력이며, 동시에 세상을 다스리는 법술이라는 것이다.

명산대처에 은거(隱居)하여 수련을 통해 신선이 되어야 한다고 주장하는 일파가 있었다. 이들은 심산유곡에서 광물과 약초로 몸을 깨끗이 하면서 신선으로 가는 수련을 계속하고 있다. 신라 화랑도의 생활양식 중 ‘유오산수 무원부지(遊娛山水 無遠不至)’의 원칙도 도교의 무위자연 사상과 결합된 것으로 해석되고 있다. 특히, 조선의 당파 싸움은 많은 사림파 가운데 현실에 실망한 유생들이 도가를 야인정신의 귀의처로 삼고 산야에 은거하여 수도하는 이른바 단학파(丹學派)를 형성한 것으로 이해하고 있다.

무위자연은 ‘무엇을 억지로 하지 않으며 스스로 그러한 대로 사는 모습’을 말한다. 즉 그야말로 자연스러움에 이르는 모습이다. 이처럼 도는 어떤 의도나 목적이 없는 자연스런 흐름이므로 영원한 생명력을 갖게 되는 것이다. 이러한 도(道)의 개념을 하늘의 경지라고 한다. 즉 이런 경지를 추구하는 선비들에 의해 구곡(九曲), 팔경(八景), 동천(洞天)문화가 탄생한 것으로 볼 수 있다.

우리지역은 예로부터 우수한 문화전통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바탕으로 민족문화의 산실 역할을 해왔다.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이라는 말과 이 지역에서 도를 닦은 선비들의 배출은 결코 무관하지 않다는 말이다. 영주에 유교문화의 메카가 형성될 수 있었던 것은 도처의 산천경승(山川景勝)과 이를 바탕으로 하는 명현거유(名賢巨儒)들의 구곡문화(九曲文化)가 학문을 도야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탄탄한 배경이 되었다는 주장이다.

주자의 무이구곡으로부터 연원된 구곡문화는 조선 성리학자들이 퇴계 및 율곡의 도학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고, 구곡시가를 짓고, 구곡도를 그리는 등의 작품 활동이 자연스레 인재양성의 밑거름이 되었다는 뜻이다.

그래서 구곡원림은 단순한 아홉 굽이의 자연공간이 아니라, 성리문화 구현의 큰 공간이 되었으며, 이를 통해 도학을 체득하고 표출하는 의미로 각처에서 향유된 것으로 보인다. 특히 경북지역은 구곡문화가 성대했던 곳으로 영주·봉화에만 10곳이 넘는 구곡원림이 경영된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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