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춘양구곡(제1곡-적연)
춘양구곡(제1곡-적연)

중국 주자(朱子)의 무이구곡(武夷九曲)에 연원을 둔 우리나라 구곡문화는 조선 성리학자들이 퇴계와 율곡의 도학을 계승한다는 의미에서 구곡원림(九曲園林)을 경영하고 구곡시가(九曲詩歌)를 짓고 구곡도(九曲圖)를 그리는 등 작품 활동을 했던 것으로 관측된다.

그래서 구곡원림은 단순히 아홉 굽이의 자연공간이 아니라 성리학 구현의 한 공간이었으며 이를 통해 도학을 체득하고 표출하는 의미로 발전시켜져 각처에서 향유하게 되었다.

이를 창달한 중국보다 우리나라에서 더욱 흥성하여, 조선이 세계 최고, 최다의 구곡문화를 이룩하였다는 것이 일반적인 평가이다. 이후 구곡은 ‘팔경’과 더불어 세계 2대 산수문화를 만들어냈다.

경북은 예로부터 우수한 문화전통과 천혜의 자연환경을 배경으로 민족문화의 선진지를 이룩하였다. 또한, "조선 인재의 절반은 영남에서 나왔다"고 할 만큼 인재를 많이 배출하여 한국 성리학의 기틀을 마련하고 지켜낸 한국 유교문화의 성지라고 할 수 있다.

아울러, 도처에 빼어난 산천경승을 바탕으로 명현거유(名賢巨儒)들이 학문을 도야하고 인재를 양성하는 과정에서 구곡문화는 더욱 성행하였다. 기록상 최초의 구곡은 박하담(朴河淡)의 운문구곡(雲門九曲)으로 전해진다.

봉화는 깊은 산골이지만 선비들의 숨결이 곳곳에 남아있는 곳이다. 낙동강의 한 지류인 운곡천(雲谷川)은 그 대표라고 할 수 있는데, 옥석산에서 발원하여 춘양면 서벽리와 법전면을 거쳐 명호면 도천리에서 낙동강에 합류한다.

이곳 운곡천의 명승 8㎞에 경암(敬菴) 이한응(李漢膺 1778~1864)이 춘양구곡을 설정하고 경영하였다. 경암은 법전면 녹동마을의 계재(溪齋)에서 성리학을 공부하며 제자 양성에 주력했다. 그의 학문은 오로지 경(敬)에 있었다고 한다. 그래서 자신의 호도 경암이라 했다고 한다.

춘양구곡은, 1곡 적연(笛淵), 2곡 옥천(玉川), 3곡 풍대(風臺), 4곡 연지(硯池), 5곡 창애(滄崖), 6곡 쌍계(雙溪), 7곡 서담(書潭), 8곡 한정(寒亭), 9곡 도연(道淵)으로 명명되어 있다. 앞선 학자들의 정자를 중심으로 굽이를 설정한 것으로 보인다.

당시에는 어은정(1곡), 사미정(2곡), 어풍정(御風亭-3곡), 창애정(5곡), 한수정(8곡), 도연서원(9곡)이 있었던 모양이다. 거기에다 졸천의 옥천정(玉川亭)이 4곡 연지를 멀찍이 내려다보고 있고, 삼척봉 아래 연주정(戀主亭)이 6곡 쌍호를 밀착 경호하고 있으니 거의 모든 곡에 정자 하나씩 배정된 셈이 된다. 성리학의 도(道)가 면면히 전하고 있음을 알리려 한 것일까?

춘양구곡의 1곡은 적연이다. 법전면 어은리 운곡천 냇가에 있다. 세월을 낚는 아마추어 어부가 숨어 지낼만한 곳이라는 어은동의 적연은 동산과 계곡의 어우러짐이 절경이다.

2곡 옥천은 옥천계곡이라는 뜻으로 적연에서 1㎞ 정도 상류로 올라간다. 시내가 약간 넓어지는 구비의 바위 언덕 사미정이 있는 곳이다. 옥천 조덕린이 말년에 지은 정자로, 정미년 정미월 정미일 정미시에 세웠다고 해서 사미정이라고 한다.

3곡 풍대의 바위 위에는 풍대 홍석범이 제자를 가르치던 어풍정이 있었다고 한다. 4곡은 연지이다. 옥천터마을에서 정면으로 내려다보이는 앞 냇가이다. 산 그림자 쪽 바위 벼랑을 치는 물이 소를 빚었을 것으로 보인다.

5곡 창애정은 창애 이중광이 건립하였다. 냇가 오른편 우뚝 솟은 벼랑의 창랑정사와 의좋게 평생을 마주보고 섰다. 6곡은 쌍계이다. 춘양을 돌아 나온 운곡천과 수청거리에서 나오는 물이 합수하는 곳에, 홀로 떨어져 있는 삼척봉이 애처롭다.

7곡 서담은 비록 좀 망가진 상태지만 나무와 소(沼)가 잘 어우러진 과거를 충분히 떠올릴 수 있는 곳이다. 8곡은 원래 권벌의 거연헌(居然軒)이 있었으나 소실되자 그의 손자 권래가 새로 건물을 세우고 한수정(寒水亭)이라했다. 찬물과 같이 맑은 정신으로 공부를 하라는 뜻이라고 한다. 9곡 도연서원은 도가 솟아나는 연못이라는 의미의 서원이었으나 1858년 훼철되었다.

“춘양은 신령한 골짜기와 맑은 시내를 가졌다. 그것은 그윽하고 깊이가 있을 뿐만 아니라 한 번씩 굽이치면서 가경(佳景)을 만들어냈다.” 경암은 「춘양구곡시」 서문에서 운곡천을 이렇게 표현한 뒤 “우리 현은 비록 궁벽하나 덕이 높은 유현이 많고, 우아한 풍절은 성대하여 세상의 희망이 되는지라, 이런 산과 물의 만남이 진실로 우연이 아니다.” 라고 하면서 자신이 적연(笛淵)에서 도연(道淵)까지의 구곡을 설정하고 시를 짓게 된 사연을 밝히고 있다.

그리고 춘양구곡이 평범한 공간이 아니라 성리학의 도가 전개되는 공간이라는, 골보다 깊은 생각을 담고 있는 것으로 보인다.

춘양구곡(春陽九曲) : 운곡천에 있다.

· 일곡 적연가이선. 一曲 笛淵可以船(笛淵-어은동)

· 이곡 옥천천상봉. 二曲 玉川川上峰(玉川-사미정)

· 삼곡 풍대가약선. 三曲 風臺架若緖(風臺-어풍대)

· 사곡 연지인석암. 四曲 硯池印石巖(硯池-옥천터)

· 오곡 창애고차심. 五曲 滄崖高且深(滄崖-창애정)

· 육곡 쌍계요석만. 六曲 雙溪繞石灣(雙溪-삼척봉)

· 칠곡 서담주입탄. 七曲 書潭注入灘(書潭-남산들)

· 팔곡 한정제야개. 八曲 寒亭際野開(寒亭-한수정)

· 구곡 도연경활연. 九曲 道淵更活然(道淵-도연서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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