은빛 인생[1]문수면 조제리 멱실마을 오진문 할머니

20살에 멱실마을로 시집와
6.25때 남편 잃고 홀로 자식 키워

서울서 밥장사로 돈도 벌었지만
곗돈 떼이는 바람에 영주로 낙향

한 사람의 생애를 들여다보면 사랑과 행복, 슬픔, 아픔 등 온갖 사연이 스며있기 마련이다. 그래서 우리는 누구나, 소설 속의 주인공이 될 수 있다. 특히, 일제 말기부터 6.25전쟁, 산업화와 민주화까지 격동의 시대를 온 몸으로 겪어낸 어르신들의 이야기 속에는 우리가 가늠키 힘든 아픔이 있다. 한마디로 파란만장했던 격동의 시대를 온몸으로 받아들이며 살아온 어르신들은 그 모든 것들을 감당해 내면서 본인과 가족, 이 나라를 여기까지 이끌어온 것이다.

영주시 문수면 조제리 멱실마을에 파란만장했던 삶을 이제는 추억으로 가슴에 품고 살아가고 있는 오진문(96세) 할머니가 있다.

“고운 새댁이 우리 집엘 왔네. 나도 옛날에 식모 2~3명 두고 장사를 했는데, 치마 모시저고리 입고 나가면 안쳐다보는 사람이 없었어. 신랑도 보고 싶고, 신장이 나빠 일찍 죽은 딸도 보고 싶어서 어젯밤에도 울었어. 오늘은 상추씨를 심어봤어. 새싹이 나라고 방에 갔다 놨어. 상추 올라오면 또 놀러와”

▲ 수놓고 뜨개질하고 책보고 풀 한포기 안 뽑았어
오진문 할머니는 이산면 조암리 사일에서 태어나고 자랐다. 20살에 문수면 조제리 멱실마을로 시집을 왔다.

“맨날 집에서 수놓고 뜨개질하고 책보고 풀 한포기 안 뽑았어. 친정집이 잘 살진 못했지만 밥은 먹고 살았는데 공부나 하고 글이나 배우라고 했어. 조모께서도 당신은 일 하시면서도 나보고는 그늘에 앉아 놀라고 했어. 우리를 공주같이 길렀어”

집안형편이 넉넉지는 않았지만 양반 집안에서 곱게 자란 오씨 할머니는 친정어머니가 일찍 돌아가셔서 조모의 품에서 자랐다.

“우리동네는 퇴계선생 처갓집이 있는 양반동네였는데 오촌아재가 호령을 치면 일본 놈들이 우리 동네에는 들어오지도 못했어. 다른 동네는 일본 놈하고 한패가 되어 앞잡이 한 사람들이 동네사람들에게 두들겨 맞고 난리 났었지”

▲ 빨갱이가 남편 잡아가고, 배급쌀 받아먹으며 살아
“신랑 얼굴도 못보고 시집을 왔는데 우리 신랑, 마음도 좋고 인물도 좋고 다 좋더라고. 일본에 가서 공부도 하고 오신 분이야. 결혼 후, 서울에 있는 시삼촌이 불러서 신랑이 산업조합 서기로 근무했어. 일제 강점기라 사무실로 징병이 나온다 해서 영주로 피해 내려와 해방을 맞이 했어”

해방 후 오씨 할머니는 가족과 함께 다시 시삼촌이 있는 서울로 가게 된다.

“서울 용산에서 장작 장사를 했는데 신랑이 6.25사변 나기 전에 6개월간 경찰을 했다고 빨갱이가 잡아갔어. 그때는 잡아가면 대번에 죽였지. 죽었다는 소식은 못 들었지만 살아있으면 벌써 왔지. 28살에 돌아가셨어. 우리 집뿐만 아니라 여러 사람이 죽었어”

그 후로 시아버지는 고향으로 내려 왔으나 오씨 할머니는 남편을 기다린다고 시어머니와 함께 서울에 남았다.

“맨날 우는 게 일이었어. 나도 울고 시어머니도 울고. 밥이 떨어져서 빨갱이들이 하는 공장에 일 하러 갔는데 맨날 비행기가 날아오니 반공호에 숨는 게 일이었어. 배급 쌀을 받아서 어머니에게 갖다 주면 아이들에게 밥해 먹이고 그랬어”

▲ 중앙시장에서 새우젓 팔며 먹고 살아
오씨 할머니는 1.4후퇴 때 시어머니와 아들딸을 데리고 친정식구가 머물고 있는 대구로 갔다.

“기차를 탔는데 4일이 걸려서 대구로 왔어. 기차가 잠시 쉬었다 가는 곳에서 시어머니가 기차를 놓치고 우리만 친정집에 도착했어. 그날 다시 대구역을 찾아갔더니 기차를 놓친 어머니가 그 다음 기차로 오셨지. 그곳에서 시어머니도 울고 나도 울고”

그렇게 우여곡절 끝에 대구 친정집에 머물던 오씨 할머니는 다시 영주 본가로 오게 된다. 그것도 잠시, 남편에 대한 한 가닥 희망을 버리지 못했던 할머니는 아들만 데리고 서울로 다시 올라갔다.

“중앙시장에서 새우젓을 팔며 먹고 살았는데 밤마다 신랑 생각하며 울었어. 그때는 돈도 싫더라. 돈 몇 만원 벌어서 다시 영주로 왔어”

▲ 십 원짜리 밥장사하며 자녀 교육시켜
“아들딸이 서울서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나도 다시 서울로가 십 원짜리 밥장사를 했어. 그때는 거지들이 얼마나 많던지 맨날 외상으로 먹고 가는 사람이 많았어. 안주면 그만이지 어쩌겠어.”

십 원짜리 밥장사로 이십만 원을 모은 오씨 할머니는 지인과 동업으로 장사를 시작했다. 그 뒤로도 요릿집을 하며 자식 둘을 대학도 보내고 시집장가도 보냈다.

“시집장가 보내고 계를 했는데 계가 망해서 돈을 많이 손해 봤어. 집도 다 팔아먹고 거지가 되어버렸어. 집도 절도 없이 시골로 왔는데 아들이 스페인에 가서 번 돈으로 지금 사는 이 집을 사줬어. 오늘도 아들이 온다는데 내가 불쌍해서 못 오게 해. 나이가 칠십인데 서울에서 차타고 오려면 얼마나 힘들어”

시조부가 물려준 여섯마지기 땅에서 나오는 양식과 아들이 보내주는 용돈으로 살고 있는 오씨 할머니는 지금의 생활이 행복하다고 말했다.

“하느님이 도와주셔서 얼마나 감사한지 모르겠어. 목사님이 목욕도 데려가주시고 먹고 싶은 거 있으면 사다먹고... 나는 아픈데도 없어 병원에도 한번 안가. 하느님의 은혜로 사는 거지”

김미경 프리랜서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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