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장회나루에 만들어진 퇴계 스토리공원

세계적 학자라지만 퇴계는 출생부터가 그리 따뜻하지는 않았다. 1501년 11월 25일, 엄동설한의 한가운데가 그의 탄생일이고, 진사 이식(李埴) 재취 아내의 막내아들로 태어난 퇴계는 생후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게 된다. 32살 청상과부 어머니 춘천박씨는 전처가 낳은 3남매를 포함한 8남매를 맡아 키우느라 살림살이가 골몰하였다.

퇴계는 배울 곳이 마땅치 않아 6세 때 이웃 노인에게 ‘천자문’을 배웠다. 12세 때에는 숙부에게, 13세, 15세 때에는 형들을 따라 청량산에, 16세 때에는 봉정사에 들어가기도 하는 등 과히 걸식공부를 했다. 17세 때 후원자이던 숙부마저 별세하자 19세에 영주 제민루, 20세에는 소백산을 떠다니며 주역(周易)을 배우기도 했다.

와중에도 “과부의 자식이라는 소리를 듣지 않도록 더 열심히 공부하고 행동거지를 올바르게 가져야 한다”는 어머니의 가르침 따라 약관을 전후한 이 때 침식을 잊고 공부에 매진하느라 지병을 얻어 평생을 허약하게 살게 되었다고 한다. 23세에 성균관에 입학은 했으나 정통 유학이 아닌 도학(道學)에 관심을 갖느라 3차례나 과거에 낙방하는 어려움도 있었다.

그 후 28세라는 이르지 않은 나이에 진사에 합격하고, 34세에 대과에 급제하여 벼슬살이를 시작했으나, 50세 나이로 짧은 벼슬살이를 마감하였다.

그는 결혼생활도 평탄하지가 않았다. 21세에 첫 장가를 든 김해허씨와는 7년만에 사별하였다. 둘째 아들을 낳은 지 불과 1달 만의 일이었다. 3년 뒤 안동권씨와 재혼하지만 그는 정신이 혼미한 사람이어서 정상적인 살림살이가 어려울 정도였다. 엉뚱한 천으로 두루마기를 덧기운 이야기, 제사상의 과일을 훔쳐낸 이야기 등이 권씨부인의 이야기이다.

그나마 권씨부인은 오래 살지도 못했다. 두 부인을 먼저 보낸 퇴계는 더 이상 혼인을 않기로 하고 마음을 추스른다. 어느 정도 마음이 정리되어 가던 48세에 외직을 청하여 단양군수로 부임하지만, 부임 1달이 채 지나지 않아 둘째아들마저 세상을 앞세우게 된다.

이리도 공허한 퇴계의 시린 옆구리를 채워준 햇살이 바로 두향이었다. 18세의 여린 관기와 48세의 거성 유학자와의 신분과 세대를 뛰어넘는 로맨스야말로 세기적인 가십거리가 되는 듯했다. 그러나 퇴계에게는 그런 온기마저도 길지가 않았다.

열 달을 못 채워 두향이의 속치마에 별리의 먹물을 찍어야 했기 때문이다. 운명이었다. 형이 충청감사로 임관(任官)하는 바람에 자신은 죽령이라는 큰 산맥을 넘어 풍기군수로 전임을 해야 했다. 그뿐이었다. 그로부터 퇴계가 70수로 세상을 마감할 때까지 둘은 한 번도 다시 만나지를 못했다. 퇴계가 풍기로 떠나던 날 죽령길 어디쯤에선가 옷고름 눈물 닦아 배웅을 마친 그것이 끝이었다.

그로부터 20여 년 뒤, 퇴계가 보내온 우물 정안수가 핏빛으로 변하던 그날, 두향은 소복차림으로 나흘을 걸어 예안에 도착하지만 그날이 상여(喪輿) 나가는 날이라 집 뒷산에서 먼발치 배웅으로 퇴계를 마지막 보내고, 다시 돌아온 강선대 초막에서 두향은 이날로부터 곡기를 끊고 세상을 하직하게 된다.

많은 사람들이 퇴계의 학문을 막연히 흠모하지만, 그의 태산 같은 학문이 이런 역경 속에서 이루어진 결정체라는 것을 꿰고 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다. 그의 학문이 세상사에 더욱 빛을 발하는 것은 바로 이런 어려움 속에서 완성된 것이기 때문일 것이다.

<단양향교>

1415년(태종 15) 현유(賢儒)의 위패를 봉안, 배향하고, 지방민의 교육과 교화를 위하여 창건되었다. 명종 초기 이황(李滉)이 군수로 있을 때 현 위치로 이건하였으며, 명종 후기 군수 황준량(黃俊良)이 명륜당을 추가 건립(建立)하였다. 충청북도 유형문화재 제107호로 지정되어 있다.

<수몰이주기념관>

구 단양 뒤편 언덕에 수몰이주기념관을 마련하고 주위 수몰지에 있던 문화재들을 이전해두었다. ‘탁오대(濯吾臺)’라는 바위는 ‘나를 씻는 곳’이라는 뜻인데, 퇴계가 이름붙이고 글자를 써서 새겼다고 알려져 있다.
‘복도별업(復道別業)’ 역시 퇴계의 글씨인데 복도소 옆 길가에 있었다. 복도소는 퇴계가 농사에 필요한 물을 대도록 단양천에 둑을 쌓아 만든 보(洑)이다. ‘복도별업’이란 도를 회복하기 위하여 지은 경치 좋은 곳의 집이라는 뜻이다.

<장회나루와 강선대>

장회나루는 두향이의 초막이 있었던 강선대가 건너다보이는 곳이다. 퇴계와 두향이가 자주 거닐었다고 전해 오는 곳이다.

이곳 단양군 단성면 장회리 장회나루에는 퇴계와 두향이를 테마로 하는 스토리공원이 조성되어 있다. 매년 시월 이곳에서는 ‘두향제’가 열리고, 두향묘소 제사에는 퇴계의 후손들도 같이 참여하는 것으로 돼 있어 이채롭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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