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퇴계의 출생지가 예안현(禮安縣)이지만, 퇴계학의 시원지(始原地)는 영주라고 주장하는 사람들이 있다. 탄생 7개월 만에 아버지를 여의고 6살부터 이웃집 노인에게 글자를 익힌 그가 12살에 숙부, 13세부터는 청량산과 봉정사를 전전하다가 철들 무렵인 19세에는 영주의 제민루에서 글을 읽고, 20세에는 소백산에서 주역(周易)을 공부한다. 그가 ‘약관을 전후하여 침식(寢食)을 잊고 공부에 너무 골똘한 나머지 병을 얻어 평생을 병약하게 지냈다’ 했으니 그의 영주에서의 공부가 몸을 다칠 정도로 열심이어서 이때를 퇴계의 ‘학문입문기’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병약했기에 더욱 의방(醫方)에 관심을 갖게 되고, 이를 극복하기 위해 도학(道學)에까지 심취하면서 <활인심방(活人心方)>이라는 건강관리법을 고안해낸 게 아닌가 한다. 그 후 지천명을 전후해서도, 영주의 소수서원과 이산서원 강학을 통해 그의 학문이 심오하게 된 것을 두고 세인들은 ‘퇴계학의 시원지’라는 표현을 쓰게 되는 것으로 보여 진다.

<제민루(濟民樓)>
제민루는 ‘세종 15에 창건되었으며 구성산 남쪽 향서당(鄕序堂)과 인접하였다’고 되어있다. 처음에는 의국(醫局)으로 약제만 취급하다가, 다시 의약소(醫藥所․지금의 보건소)로 개칭되어 제약구민(劑藥救民)하였다. 이곳은 양반 자제들에게 의술을 가르치기 위해 설립한 의약소로, 소백산 약재를 저장하고 백성을 치료하던 곳이지만, 선비들의 시가 읊는 경로소 역할도 겸했다고 한다. 

퇴계는 이곳에서 6개월을 머물며 영주와 첫 인연을 갖는다. 이듬해에는 소백산에서 주역 공부를 하고, 그 이듬해에는 푸실의 김해 허씨와 혼인을 하면서 인연을 이어가게 된다. 7년 동안 처가를 왕래하면서도 이곳을 상기했을 테지만, 나중에 아들, 손자까지 대를 이어 이곳에 수학(修學)시킨 것으로 보아 제민루가 그에게는 특별한 인상으로 자리했었음을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제민루는 1961년까지 구성산 남록에 있었으나, 퇴락하여 지금의 서천강변으로 이건하였다.

<푸실[草谷]-사일마을>
한자로는 초곡(草谷)이라고 쓰는 푸실마을은 지금의 파머스마켓 서편 사일마을의 옛 이름이다. 퇴계는 21세 때 푸실마을 김해허씨 허찬(許瓚)의 맏딸에게 장가를 들었다. 동갑나기 허씨부인가 아이 둘을 낳을 때까지 7년 동안 당시의 풍습대로 친정에서 살았기에, 퇴계도 이곳과 예안을 수없이 들락거릴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 이후에도 퇴계는 서울을 내왕하는 길에 자주 이곳을 들렀던 것으로 보인다. 

퇴계의 이곳 거처이던 새초방(새신랑방)은 늦게까지 이 마을에 남아 있었는데, 1965년 경북선 철도공사 때 헐렸다고 한다. 

<소수서원(紹修書院)>
퇴계는 49세에 풍기군수로 임관(任官)한다. 이때 퇴계는 주세붕이 지은 백운동서원(白雲洞書院)을 수시로 드나들면서 강학을 펼쳤고, 서원 상향축문과 진설도 및 홀기를 손질하였다. 그리고 죽계천 냇가에다 소나무, 대나무를 심고 취한대(翠寒臺)라고 명명하였다. 또한, 서원의 공인화를 위해 처음으로 국왕의 사액(賜額)을 받음으로써 백운동서원이 첫 사액 서원으로 되도록 하였고, 이것은 공인된 사학기관의 효시가 되어 전국 서원발달의 선도적 역할을 담당하였다.

<소백산 기행>
퇴계는 소백산에서 주역을 공부하던 20대 때부터 소백산 종주를 머리에 그리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그로부터 20년 만에 풍기군수로 부임하자 말자, 그는 별러오던 4박 5일간의 소백산유람을 결행하게 된다. 국망봉 쪽으로 올라 비로사 쪽으로 하산하는 코스였다. 그가 쓴 『유소백산록(遊小白山錄)』에는 아래의 기행코스가 기재되어 있다. 소수서원(1박)→ 안간교→ 초암→ 철암→ 명경암→ 석륜사(1박)→ 백운암→ 석름봉→ 국망봉→ 중백운암→ 석륜사(1박)→ 상가타→ 중가타→ 하가타→ 관음굴(1박)→ 소박달현→ 대박달현→ 비로전(비로사)→ 욱금동. 그러는 동안, 청운대(靑雲臺), 자하대(紫霞臺), 백학(白鶴), 백련(白蓮), 죽암폭포(竹岩瀑布), 비류암(飛流岩), 송석대(松石臺) 등을 명명한 것으로 되어 있다.

<이산서원(伊山書院)>
이산서원은 군수 안상(安瑺)이 번고개(남간재) 너머에 터를 잡고 세운 서원이다. 건립 후 퇴계는 원규(院規)와 기문(記文)를 짓고, 「伊山書院」이라는 편액을 썼으며, 경지당(敬止堂), 성정재(誠正齋), 진수재(進修齋), 지도문(志道門), 관물대(觀物臺) 등의 이름을 지었다. 이때 그가 만든「이산서원원규(伊山書院院規)」는 우리나라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기준이 된 것으로 평가 받고 있다. 그리고 이 서원에는 그의 건립 정신이 구석구석에 면면히 녹아 있어, 그의 교육철학이 모두 반영되었다는 세인들의 반응이다. 후일 이산서원이 사액되던 날, 그의 후학들이 건립한 도산서원이 준공되었다고 한다.

지금 이산서원은 남간재 너머 원래자리에다 작은 표지석을 남기고, 이산면 내림리 내성천변에 경지당만 얾겨 있었으나 이제는 그마저 철거되어 영주댐문화재단지로 이건될 전망이다.

<괴헌고택(槐軒古宅)의 성학십도>
퇴계는 복잡한 성리학의 요점을 정리하여 도식(圖式)화 하였는데, 이른바 「성학십도(聖學十圖)」이다. 이는 흔히 퇴계 학문의 결정판으로 불리어지는데, 당시 17세에 왕위에 오른 선조를 성왕(聖王)으로 인도하려는 목적이었다고 한다. 전국 하나밖에 없는 성학십도 판목의 원래 소장처는 이산서원이었던 것으로 짐작되나, 서원 훼철 후 괴헌고택이 보관하고 있다가 소수박물관에 기증되어 영구 존치되었다. 소수박물관에서는 즉각 판각을 복제하여 전시하기에 이르고 있다.

영주댐 수몰문화재로 이전하기 위해 철거된 괴헌고택의 원래 자리는 이산면 영봉로 875-8이다.

이외에도, 중형 온계를 배웅하던 촉령대, 왕건의 화상을 참배하던 용천사, 대장장이 제자와의 인연이 서린 배점마을, 신암리의 부인묘소까지 그의 관련 유적이 영주에 산재하고, 더구나 그의 출생지 예안이 신라 때에는 영주와 함께 내령군(奈靈郡)에 속해 있었기에 퇴계와 영주지역이 더욱 친근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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