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하식<소설가>

광복 후 ‘한민당’은 정당 중 세력이 큰 우익정당이었다. 1945년 9월 16일 종로구 경운동 천도교 대강당에서 열린 한민당 발기인대회는 김성수, 송진우, 장택상, 조병옥, 윤보선 등 부유층 보수주의 계열인사 1천6백여 명이 참석해 대 성황을 이루었다. 친일 행각을 벌려온 대지주와 자본가들이 다수 참가한 것은 큰 서광이었다. 한민당은 애국자와 반역자의 경계 같은 것은 없었다. 그들은 ‘동아일보’와 ‘조선일보’ 등 자신들이 소유한 보수언론을 통해 반대세력을 공격하는 한편, 북한에서 친일행각으로 쫓겨 내려온 사람들에게 활동 자금을 주는 등 젊은 폭력단을 조직했다.

친일파 부자들로부터 막대한 정치자금을 지원받는 한민당(이승만)은 “뭉치면 살고, 흩어지면 죽는다”고 외쳤다. 광복된 조국의 이승만은 친일이던 반역이던 돈이면 사람을 끌어안았다. 지방에서 친일경찰 일본헌병 출신 친일파들이 서울로 숨어들었다. 서울은 친일 반역자들의 피난처요 낙원이었다. 그들은 하나같이 자기는 애국자라고 강변했다. 그 많던 이 땅의 친일매국노들은 다 어디로 가고 없고, 해방된 조국에 남은 것은 애국자들뿐이었다. 부자들은 너도 나도 독립자금을 댔다했고, 친일경찰도 자기는 임시정부의 비밀요원이었다고 둘러댔다. 이 황당한 주장들은 언론, 교육, 문화계의 인맥을 그대로 형성했다.

1945년 12월 23일자 ‘해방일보’ 사설은 “한민당 이승만은 해외생활 40년, 상해 임시정부가 난국에 처하자 미국으로 달아나 수많은 독립운동 자금을 사비로 횡령하여 호화로운 생활을 하고, 후안무치하게 조선에 돌아온 것은 그동안 미국에서 목도한 동포들의 폭로에 의해 명확한 바이어니와 조선에 돌아와서 조선호텔 뽀이에게 팁으로 일시에 1만원을 준 사실은 그 일례이다. 돈암장에서 수많은 호위병을 거느리고 봉건 후무의 생활에도 비견할 수 없는 호화사치의 생활을 취하기 위하여 미 군정청에 아첨하여 이권으로써 간상배 같은 행동으로서 민족의 자금을 강제 징수하여 그 자금을 낭비하는 죄상 등은 실로 낱낱이 들어 거론하기 곤란하다.”고 쓰고 있다.

중경 임시정부의 마지막 내각 요원들인 김구, 김규식, 이시영, 유동열 등 일행이 귀국한 것은 1945년도 저물어가는 11월 23일이었다. 한민당이 자리를 잡은 뒤 늦게 들어온 임시정부는 아무런 쓸 힘이 없었다.

미국은 “유엔 감시 하에 남북한의 인구비례에 의한 임시 입법의원 선거를 해, 새로 선출된 의원의 입법에 따라 남북한의 통일된 임시정부를 수립하자”는 제안에 소련이 반대했다. “남북한에서 미소 양군을 동시에 철수하자”는 소련의 제안에 미국이 거부했다.

“38선을 없애고 한반도에 단일한 임시정부를 수립 후 혼란이 일어날 경우에는 유엔이 감시하겠다는 이 결정은 현실적으로 미국과 소련이라는 양 강대국에 의해 분할되어버린 한반도가 큰 혼란 없이 통일될 수 있는 유일한 길”인 기대는 헛꿈으로 사라졌다.

1946년 6월 3일 미소공동회의 결렬에 의해 남한 ‘단독정부’를 수립해야 한다는 이승만의 발언에 좌우익은 모두 남북 분단을 고착화시키려는 반민족적 계략이라고 그의 말을 맹비난했다. 제2차 대전을 일으킨 전범국 일본은 그냥 두고, 일본의 식민지였던 약소국인 조선을 반 가르는 것이 미국의 인도주의였다. 모든 비극은 여기서부터 시작됐다. 남한은 친일파 친미로 이루어진데 비해 북한은 항일 빨치산파로 권력이 형성됐다. 정의가 없는 땅을 만들었다. 그 후 민주주의 수호를 이유로 무고하게 죽어가고, 공산주의란 이름아래 죽어간 형제들, 수백만의 무고한 동족의 무덤위에 세워진 눈물의 공화국 70년. 그 불의의 뿌리는 팽목항에 까지 이르렀다.

신탁통치 반대, 찬탁과 반탁! 찬탁은 우리나라를 또다시 강대국들의 식민지로 전락시키는 결과라고 좌우익을 막론하고 민족진영이 결사반대하는 속에 1948년 8월 15일 38선 이남에 ‘대한민국(이승만)’이 9월 9일 북한 땅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김일성)’이 수립됐다, 그 후 동족상잔의 한국전쟁을 일으켰고, 우리는 미국의 핵우산 보호 속에 북 핵을 머리에 이고 살고 있다.

온몸 바쳐 항일투쟁을 해온 피 끓는 젊은이들은 좌익사상이라기 보다는 이승만 정권에 반발하는 폭동이 전국에서 일어났다. 미소공위의 폐지와 소련 영사관 서울 철수는 20세기 동서 냉전의 시작을 알리는 우리민족의 서글픈 서곡 속에, 저승에 가서도 용서받지 못할 사람들이 있었다.

김구 선생은 총을 맞고 죽으면서 “내가 무엇을 원하고 있다고 생각하는가. 나는 어떤 권력도 지위도 원하지 않는다. 오직 대한독립이다!”고 외쳤다. 반탁을 외치던 진정한 민족진영의 애국지사들은 여운형, 조만식, 송진우, 장덕수 하나 둘 죽어가기 시작했다. 찬탁을 위한 무서운 암살이었다. 그 후 정병주, 장준하 선생까지 애국자의 씨는 죽어야했다.

이런 나라를 물려받은 박 전 우리 대통령은 국부 이승만 대통령의 뒤를 이어받은 조국의 후예이다. 헌법을 수호하며 정의와 원칙에 따라, 창조경제 문화융성의 외침은 어디로…아무것도 잘못한 것은 없다. 정윤회 문건, 최순실 게이트, 뇌물죄, 내 주머니에 돈 한 푼 넣은 것이 없다. 올림머리 값이 한 달에 천오백만 원, 집무시간에 비서가 어디 있는지도 모르고, 거실의 사방 유리벽에 갇혀 살았다는 구중생활, 얼마나 고독한 ‘대한민국’이었으면 그렇게 살았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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