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예나 지금이나 손님을 맞이하고 배웅하는 일은 큰일에 속한다. 먹고 살기가 힘든 시절의 손님 대접은 더욱 큰일이었다. 그러면서도 민가의 손님맞이는 자못 극진하였다. 

차라리 식구들이 굶는 한이 있어도 접빈만큼은 소홀하지 않았던 그 시절의 인정이 그립다. 
좀 살만한 지금에 와서 오히려 방문객에게 정성을 다하지 않는 듯이 보여 안타까운 마음이다. 

요즘은 자신의 집을 방문한 손님을 무슨 모텔이라는 곳에서 밤을 새우게 한다. 정성스럽게 음식을 만드는 모습도 구경하기 힘들어져 웬만하면 식당으로 부르르 쫓아가곤 한다. 예전에는 관가에서도 사신을 영접하기 위해서는 정성을 다하였다. 

옛 지도를 들여다보면 각 고을 관아가 있는 곳이면 어느 곳이나 이런 영빈관이 있었음을 살필 수가 있다. 여관이나 호텔이라는 신생 서비스업종이 생기기 이전이니 관가를 방문하는 관리나 사신을 영접하려면 이런 영빈관이 꼭 필요했을 것이다. 봉성현에 영봉루가 있었듯이, 순흥도호부에 흥주관이라는 객사(客舍)가 있었고 봉서루라는 문루가 있었다. 

풍기초 운동장 서편쯤에 풍기 객사가 표시된 고지도가 완연하다. 객사 옆에는 관아로 들어가는 문루였을 것으로 보여 지는 제운루(齊雲樓)까지 확연히 표시되어 있다. 영천(영주)군에도 이런 객사는 있었는데, 지금의 영주초등학교 교정에 있는 영훈정이 그것이다. 

정자 형식으로 되어 있지만, 영훈정은 대개의 정자가 사가의 가문에서 지어지는 것과는 달리 관용으로 지어진 영빈관 정자에 해당한다.

영훈정은 본래는 삽재 너머 지금의 봉화읍 문단리에 있었으나, 1467년(세조 13)에 군수 정종소(鄭從韶)가 화천(禾川 광승)의 돌다리(石橋) 북쪽에 건립한 것으로 알려져 있어 영주초등학교 부근에 있었던 관아의 기준으로 보면 남쪽에 해당하므로 처음에는 남정자(南亭子)로 불리었단다. 

그러다가 1550년(명종 3) 풍기군수로 있던 퇴계 이황이 「迎薰亭」이라고 명명하고 현판도 자신이 직접 써서 걸어 주었다고 한다. 이후 중간에 폐지되었다가 1643년(인조 21) 군수 신속(申속)이 자신의 봉록까지 보태면서 경비를 모아 다시 세웠다고 중건기문에 기록되어 있다. 

그 후 1910년 일제 강점기 때 현 위치로 이건 되었으니 지금 건물은 100년 남짓한 나이를 가진 셈이다. 여기에도 문루는 있었으니 이름 하여 가학루(駕鶴樓)이다. 

가학루는 1923년에 영주초등학교를 짓느라고 구성산 꼭대기로 옮겼다. 영훈정은 현재 경상북도문화재자료 제414호로 지정되어 있다. 정면 3칸, 측면 2칸의 중층으로, 겹처마에 팔작지붕이고, 하부 기둥은 12개의 원주(圓柱)를 3열로 배치하고, 상부는 가운데 기둥 없이 10개의 원주를 세웠는데, 사방이 개방되어 있고 바닥은 우물정자형 마루를 깔았으며, 마루 끝 가장자리는 난간(欄干)을 설치한 구조이다. 

일제강점기 때 군청사로 사용하기 위하여, 칸막이를 한 흔적들로 훼손되어 결구가 다소 이완되고 일부 퇴락되긴 했지만 비교적 상태가 양호한 편으로 평가되고 있다.

중건기문에는, “이 정자는 철탄산(鐵呑山)을 등지고 학가산(鶴駕山)을 바라보고 있는데, 읍내 가까이 있으면서도 시끄러운 분위기가 전혀 없고, 한가하고 널찍한 곳에 처하여 사방 들판 경치를 앞에 펼쳐두고 있다. 

동서로 왕래하는 여행객들이 여름에 올라서 더위를 씻고 남쪽 들판에서 일하는 농부들이 가을이 되면 많은 수확을 올린다. 참으로 성스러운 세상에 답답한 마음을 풀고 산물이 많은 즐거움을 이 정자에서 볼 수 있다.”고 되어 있다.

또한 “우리 영천(영주)은 문헌(文獻)이 영남에서 이름난 고을이다. 그러나 지금 선비들의 취향이 날로 야박해지고 고을 풍속이 날로 변질되고 있는 것이 마치 큰 집이 기우는 듯하다.

한 고을의 정사와 교육을 맡은 자로서 개탄하고 진흥한 것은 너무나 당연한 일이다.” 하여 선비들의 인성을 개탄하고 자신을 추스르는 모습이 바로 지금의 선비정신실천운동을 보는 것과 흡사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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