배용호(전 영주교육장·소백산자락길 위원장)

갈산의 의산서원

장수면 갈산리 돌마람의 의산서원이 작년 3월 17일자 경상북도지정 기념물 제172호로 지정 고시되었다. 이번 토요일에 첫돌을 맞는 셈이다.

의산서원은 영주지역에서 네 번째로 설립된 서원이어서 소수서원이나 이산서원 만큼은 아니더라도 조선조 영주를 대표하는 서원의 하나로 줄곧 손꼽혀 왔다.

400여 년 전 성곡리 의산마을에서 의산서당으로 시작한 의산서원은 약 260여 동안 지방 유림의 중심지로 학문을 논하던 곳이었다.

조선 말 대단위 서원 철폐 때는 고비를 넘지 못하고 훼철되었다가 근년에 와서(1982년) 현 위치로 옮겨 복원하였고, 경내는 제향영역인 경덕사(景德祠)와 강학영역인 의산서당(義山書堂)과 성오당(省吾堂), 그리고 관리사인 석종재(石宗齋)로 나누어져 있다.

의산서원은 토석담장을 돌린 장방형 일곽 안에 양졸당, 의산서당, 내삼문, 사당이 일직선으로 배치되어 있으며, 각 건물은 조금씩 비켜 앉아 있다.

서원에 배향된 성오당(省吾堂) 이개립(李介立)은 1546년(명종 1) 당시 용궁현(현 예천군 지보면) 대죽리에서 태어났다. 어려서부터 문장에 남다른 재능을 보여 인근 유학자들의 기대를 한 몸에 받고 있었다. 22세 때 진사가 되었으나 부모를 모시기 위해 관직에 나가지 않았다.

부친상과 모친상 및 시묘(侍墓)살이까지 모두 마치고 나서야 비로소 관직에 나섰다고 한다. 관직에 나설 때도 유일(遺逸 : 학문과 덕행이 높아서 과거를 치르지 않고도 중요한 관직에 나아갈 수 있는 선비)로 천거되어 참봉이 되었다.

이듬해 1592년(선조 25) 4월 임진왜란이 발발하자 “임금이 치욕을 당하면, 신하들은 죽는 것이 도리이다”라며, 정예병으로 전장을 지휘하였고 참전한 명나라 군대의 군량을 조달하고 굶주린 백성들을 구휼하기 위해 둔전(屯田) 경영의 책임을 맡는 등 활약하였다.

의병장으로서 전공을 세워 원종공신(原從功臣)에 책록되었다. 정유재란 때에는 인근의 선비들을 규합하여 의병을 일으켰다. 곽재우 의병장과 힘을 합해 화왕산성(경남 창령군)전투에서 왜적을 크게 무찔렸다. 그러나 그때의 전황들을 자신에게 보고하지 않고 의병장 곽재우에게 보고했다하여 병마절도사 김경서의 모함을 받아 크게 위태롭게 되었으나 공과가 참작되어 큰 화는 면하고 별미(곡물벌금형)에 처해졌다 한다.

별미를 조달할 형편이 되지 못하였으나 조정관원들이 봉록에서 도와줌으로 별미를 치르고 풀려났다. 이후 관직을 버리고 고향으로 돌아와서는 두문불출하였다 한다. 다만 스승인 학봉 김성일, 소고 박승임 등을 찾아 지도를 받고, 후학들을 위한 학문 강론에만 전염하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젊은 시절에는 퇴계문인으로, 장성해서는 학봉의 실천도학에 전념하였다.

광해군의 난정(亂政) 이후로는 더욱 말이 없어졌고, 1625년(인조 3) 시 1수를 남겨 친구들과 작별한 뒤 다음날 홀연히 세상을 떠났다. 또, 자식들에게는 술 한 잔씩을 마시게 하고 “오랜 시일 병간호하기에 수고들이 많았구나” 하는 등 오히려 남은 자식들을 위로하면서 숨을 거두었다는 일화를 남겼다. 향년 80세였다. 병조참판에 추증되었다.

조선 후기에 이르러 의산서원은 향촌사회를 이끈 서원으로 유생들의 근거지가 되었고, 이곳의 강학활동을 통해 다수의 과거 급제자가 배출되었던 중요한 사설 교육기관이었다. 현재는 서원, 누정, 재사, 묘소가 한 곳에 모여 있는 영주 갈산의 경주이씨 성오당 문중의 정신적 구심점으로 유지되고 있다.

성곡저수지 아래 돌마람 마을은 성오당 이개립이 마을에 터를 잡으면서 형성된 마을이다. 이 마을 의산서원에 소장된 성오당의 여러 전적들은 2001년 경상북도유형문화재 제329호로 지정된 바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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