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39] 단산면 병산3리 젓돌(회석)

젓돌마을 전경

고려 충신 이억(李薿 )이 회석에 은거(隱居)
‘공경과 신의’를 물려준 서당골의 전설

단산면 젓돌 가는 길
영주 서천교 사거리에서 회헌로를 따라 순흥·단산 방향으로 간다. 동촌2리(조개섬) 교차로에서 사천·단산방향으로 우회전 한다.

사천-바우-병산-새터를 지나 서쪽 산 아래를 보면 반달모양으로 옹기종기 자리 잡은 마을이 젓돌이다. 지난달 19일 젓돌에 갔다.

마을회관에서 만난 윤주하(60) 이장은 “윗대 선조님들은 가난하게 살면서도 ‘공경과 신의’를 후손들에게 물려주셨다”며 “지금은 20여호에 40여명이 사는 작은 마을이지만 훈훈한 인심은 예나 지금이나 변함이 없다”고 말했다.

마을표석

역사 속의 젓돌(檜石)
병산리 지역은 1413년(태종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에 속한 이름 없는 마을이었다. 조선 중기에 와서 행정구역을 면동(面洞)으로 정비할 때 순흥도호부 일부석면(一浮石面) 회석동(檜石洞)이 됐다.

조선말 1896년(고종33년)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경상도가 남도와 북도 분리되고, 순흥부가 순흥군으로 격하됐다. 또 순흥부 일부석면이 순흥군 단산면으로 개칭되면서 순흥군 단산면 회석리가 됐다.

1914년 일제 때 영천군, 풍기군, 순흥군을 통합하여 영주군이라 하고, 동원면을 단산면에 통합시켰다. 이 때 남동, 병산리, 회석리가 병산리로 통합되었으며, 해방 후 병산3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이억의 묘

지명 유래
마을 이름은 ‘젓돌’이다. 도로변 표석에는 ‘회석’이라고 새겨져 있다. 윤승욱(67) 노인회장은 “예전에 마을 북편 산자락에 아름드리 전나무가 있었고, 그 주변에 큰 바위가 많아 전나무 회(檜)자에 돌 석(石)자를 써 회석동(檜石洞)이라 했다는 이야기를 선친께 들었다”고 말했다.

그러면 ‘젓돌이란 지명은 어디에서 유래되었을까?’ 훈몽자회(訓蒙字會) 등 옛 문헌에 보면 「전나무를 젓나무라고도 한다. 젓나무 어린 열매에서 흰 젓(우유)이 나오므로 ‘젓나무’라고 이름지었다」라는 대목이 있다.

지금은 ‘젖(우유)’을 ‘젖’으로 쓰지만 예전에는 ‘젓’으로 썼다. 그래서 젓나무 ‘젓’자와 돌 석(石)자의 훈 ‘돌’자를 조합해서 ‘젓돌’이라 했다고 하니 기발하고 재미있는 지명이다. 이 마을 황한용(67) 노인회 총무는 “마을에 바위와 돌은 많은데 젓나무의 흔적은 없어 아쉽다”며 “마을 뒷골을 서당골이라 하는데 예전에 안동권씨가 서당을 지어 한학을 가르쳤다는 전설이 있다”고 말했다.

젓돌 경로당

고려 충신 이억의 은거지
향토사학자 송지향 선생은 영주향토지에서 “회석동은 고려 말 도평의(都評議)를 지낸 이억(李薿)이 고려가 망하자 피하여 회석에 숨어 살았다”고 했다. 또 한국의 인물사 경북편에 보면 “고려 진현관직제학 안영부(安永浮)의 사위인 이억이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 고향인 순흥에 와서 회석에 숨어 살았다”라는 기록이 있다. 

그러면 ‘이억이란 누구일까?’ 이억은 우계이씨(시조:陽植) 8세손으로 영주 입향조다. 영주의 우계이씨는 모두 이억의 후손들이다. 이억은 고려 공민왕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강계원수로 재임 중 우왕 14년(1388) 이성계와 요동정벌 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이성계가 위화도회군 후 조선을 개국하자 “충신은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不事二君)”라며 벼슬을 버리고 순흥에 은거했다. 

이성계는 수차 높은 벼슬을 제수했으나 끝내 나아가지 않고 회석에 숨어 살았다. 그는 초하루 보름에 국망봉에 올라 개성을 향해 절하며 통곡했다고 한다. 국망봉(國望峯)이란 이름도 이 때 지어졌다고 하니 회석에서 단곡, 두레골을 거쳐 국망봉으로 오르는 길이 새롭게 떠오른다. 그의 묘소는 젓돌 뒷산 남쪽 기슭에 있는데 비기실 안쪽 구렁 쪽이다. 묘소 앞에는 퇴은정(退隱亭)이란 정자가 있다. 퇴은(退隱)은 이억의 호다. 현재 젓돌에는 우계이씨 일족(이윤은, 이윤진씨 후손)이 살고 있다.

동수목 느티나무

李 약국어른이 살던 마을

백 년 전 순흥, 단산, 부석면에 의원이 딱 한 분 있었는데 이 분이 회석에 살았다. 이 분은 제16대 단산면장(1959-60)을 지낸 이해만(李海萬.1906-1967)의 조부 이재직(李載稷.1868-1953)이다. 재직은 고종 때 의관(醫官) 시험에 합격하여 전의사 등에서 초급의관으로 근무하던 중 나라 안팎이 어지러워지자 서울 회현동에서 순흥땅으로 피신했다. 남동과 안남을 거쳐 회석동에 터 잡은 때는 1890년경으로 추정된다.

후손 이해경(90.강원태백)씨는 “재직 조부께서 회석에 살면서 단산장터에 약국을 차려놓고 매일 출퇴근하셨다”며 “일제 때 조선총독부가 재직 조부님을 영주군수로 추대하려고 여러 번 찾아 왔으나 그 때마다 뒷산으로 몸을 피했다”고 말했다. 전주이씨 세보에 보면 “신성군파 10대손인 이재직은 옥대장터에 한약국을 경영하면서 인술과 덕을 베풀어 3개면에 칭송이 자자했다”고 기록했다.

옛 돌담

시인이 본 젓돌(회석)

젓돌의 며느리(이윤은씨의 자부)가 된 이서빈 시인은 2014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당선된 특급 시인이다.

시인은 젓돌마을 동수목 느티나무 앞에서 마을의 역사와 기름진 인심을 느꼈을 것으로 보여진다. 제목은 ‘회석동에 꽃이 핀다’이다. 

해마다 둥글게 품을 늘리며
묵묵히 동네를 지켜온 삼백살 느티나무
그 푸른 그늘에 길손도 앉았다 가고
바람도 잠시 쉬었다 가는 곳
개구리 울음소리 살이 오르면
포도꽃이 피고 씨알도 여물어
대대로 기름진 인심이 흘러넘치는
하늘아래 다정한 마을
가가호호 웃음소리
 회석정에 오순도순 둘러 앉는다.
  2011.

서당골 전경

젓돌에서 나서 어릴 적 여기서 자란 시인이 있다. 권오윤(69)씨와 내외종간인 강순구 목사는 지금 천안제자들교회 목사다. 제목은 ‘옛날 옛적 간날 갓적에’다

조그마한 단산 젓돌마실에 할머니는 옛이야기를 들려주신다
엄마하고 아부지하고 순구가 살았단다
하루종일 퐁당퐁당 소리에 빠져서 우물에 돌던져 넣고
몰래 솜들고 엿바꿔 먹느라 순구얼라는 피곤했단다
토닥토닥 가슴을 두들기며/엄마는 순구를 업고큰길에 나가서
아부지를 기다린단다
새근새근 코 고는 소리
눈깔사탕을 사 가지고 돌아오신 아부지는
순구에게 뽀뽀를 한다. 
하략… 2016」

마을로 들어가는길

젓돌 사람들

마을의 숙원이던 경로당이 2016년 11월 문을 열었다. 기자가 마을에 갔을 때 어르신들은 덕담을 나누고 계셨다. 박해용(87)·이순학(86) 할머니는 “노인회장과 이장 그리고 박봉길(65)·이장춘(61) 등 젊은이들이 나서서 경로당을 마련해줘서 고맙고 감사하다”며 “예전에는 모두 고생만하고 살았으나 지금은 살기 좋은 마을이 됐다”고 자랑했다.

박복순(87) 할머니는 “지금 경로당 세대들은 일제 때는 나라 없는 설움을 겪었고, 6.25 난리때는 전쟁의 무서움과 배고픔을 견뎌냈다”며 “요즘 세대는 그걸 잘 모르는 것 같다”고 말했다. 김옥란(83) 할머니는 “왜정 때는 일제가 다 빼앗아가는 바람에 먹을 것이 없었고, 6.25 때는 인민군이 들이닥쳐 소를 몰고 가는 등 이래저래 고달프기만 했다”고 말했다.

안남에서 젓돌로 시집와 지금까지 살고 있다는 권남규(여.79)씨는 “벼농사 중심 가난한 농업에서 통일벼가 나와 보릿고개를 넘겼고, 지금은 인삼, 사과, 포도 농사로 소득이 늘어났다”고 말했다.

마을의 지킴이 박봉길(65)씨는 “1960년대에는 40여호에 400여명이 사는 큰 마을이었으나 지금은 집수는 절반으로 줄었고, 사람 수는 십분의 일로 줄었다”며 “마을의 모습도 초가에서 현대식으로, 논은 과수원으로, 외나무다리는 콘크리트다리로 변했다”고 말했다.

방다리에 사는 이길노(73)씨는 “회석에서 물 건너 방다리는 수백년 한 마을로 살아왔지만 다리가 없어 불편하기 짝이 없다”며 “두 마을은 서로 물 건너 농토가 있지만 2km쯤 돌아서 다니고 있다”고 말했다. 노인정에서 나와 이장춘씨와 마을을 한 바퀴 돌았다. 이서빈 시인이 장춘씨 부인이라는 것도 알았다. 

동샘 자리에서는 “옛 샘을 보존하지 못해 아쉽다”는 이야기를 했다. 돌담길도 걷고 토담집 흔적도 보았다. 이 씨는 마을 뒤 서당골을 가리키며 “서당골에 서당골어른이 계셨는데 바로 윤승욱 노인회장님의 부친이셨다”며 “함자는 ‘영(英)’자 ‘일(一)’자이셨고, 늘 의관정제하셨으며, 마을 사람들에게 공경과 신의를 가르치셨다”고 말했다. 

마을 앞 도로변까지 따라 나온 이장춘씨는 “물건너 방다리는 한 마을인데 다리가 없어 애로가 많다”며 “두 마을이 뜻을 모아 다리 놓을 방안을 강구 중”이라고 말했다.

이원식 시민기자

<단산면 병산3리 젓돌마을 사람들>

윤주하 이장
윤승욱 노인회장
박해용 할머니
박복순 할머니
이순학 할머니
김옥란 할머니
권남규 할머니
이길노 노인회감사
황한용 노인회총무
박봉길 씨
이서빈 시인
강순구 목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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