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석 거까뭇재(巨釜峴) 성황당(城隍堂)

소지 올리기

광서5년(1879) 지역민이 성금을 모아 건립
거부현 성황여신 김씨존상(金氏尊像) 봉안

성황제의 유래

동제는 동신제로 마을의 수호신인 성황신께 드리는 제사다. 이를 ‘서낭제’라고도 한다.

부족국가시대 이래 유구한 전통을 지닌 동제는 마을 사람들이 일체감으로 뭉쳐 화목과 단합을 다짐하는 행사이며, 본질적으로는 민주성을 띠는 민중축제라고 할 수 있다.

이러한 성황 신앙이 우리나라로 전래된 것은 고려 성종 때(981-997) 경남 사천지방에 유배된 왕족 안종(安宗) 욱(郁)이 “자신을 현(縣)의 성황당 남쪽에 묻어 달라”고 유언했다는 기록이 처음 등장하고 있어, 그 무렵이나 그 이전에 전래됐을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여신화상 김씨존상

우리고장의 성황제

2007년 영주문화원(원장 박찬극)이 발간한 「영주의 성황당」 책에 보면 시 전역에 88개의 성황당이 사진과 함께 실려 있다. 그 중에서 순흥 비봉산 본당은 이건기와 중수기가 남아있고, 부석 거까뭇재 성황당은 건립기문(1879)이, 단산 안남의 성황단은 바위글씨(1880년)가 남아 있어 동신제 역사 연구에 귀한 자료가 되고 있다.

비봉산 본당 이건기에 보면 「원래 율림에 있었는데 부사 조상덕이 1754년 이곳으로 옮겼다. 순흥부가 복설되고 역대 부사가 마음을 써 보수했다. 이 서낭제에 아전들도 목욕재계하고 수없이 절하며 신위에 빌었다」라는 대목에서 관아 주도 성황제였음을 알 수 있다.

이와 같은 기록으로 볼 때 순흥부 폐부로 성황제가 중단되었다가 복설 후 관(官) 주도로 행해 왔으며, 조선 말기에 와서 민(民) 주도로 이관됐다는 것을 짐작할 수 있다. 이에 우리고장에서 마을마다 성황제를 지내기 시작한 것은 1880년 전후가 아닐까 추정해 본다.

 

산신제

거까뭇재 성황당의 역사

예전에 순흥, 단산에서 부석으로 갈 때는 거까뭇재를 넘어야 했다. 이 고개마루에 거까뭇재 성황당이 있다. 성황당 서쪽 벽상에 「韶川巨釜峴城隍祠記 光緖五年己卯五月初四日(소천거부현성황사기 광서5년 기묘5월초4일)」이라고 쓴 기문이 있다.

기문을 살펴보니, 성황당의 이름은 한자로 ‘거부현성황사’다. 거부현(巨釜峴)이란 이곳 산세가 가마솥을 엎어 놓은 듯하다 하여 클 거(巨)자에 가마 부(釜)자, 재 현(峴)자를 써 ‘거부현’이라고 했다.

그러나 이곳 사람들 간에는 ‘큰 가마’라는 뜻으로 ‘거가마재’라 불렀는데 세월이 흐르면서 발음이 변해 ‘거까뭇재’가 됐다. 기문 끝에 ‘광서5년’이라고 썼다. 광서5년은 중국 연호로 서기로는 1879년이다. 이 때 당을 짓고 고유제를 올렸다는 내용이 적혀 있다.

진설

세월이 흘러 비가 새고 축대가 무너졌다. 1991년 3월 초대 영풍군의원으로 당선된 이수근 의원이 관련업체로부터 석재를 지원받고, 자비(170만원)와 당시 부석면 지원금(100만원)으로 석축을 쌓고, 당은 해체한 후 옛 기둥 일부를 살려서 중건(重建)했다.

그 후 2001년 중수기에 「韶川里(소천리) 守護(수호) 巨釜峴城隍女神(거부현성황여신) 김씨존상(金氏尊像) 봉안고유제(奉安告由祭)」란 기문이 있다. 이는 성황신인 ‘김씨부인(金氏婦人)’의 여신화상(女神畵像)이 낡아 화상을 새로 그려서 봉안하고 2001년 6월 20일 고유제를 지냈다는 내용이다. 중수기 옆에는 헌성금을 낸 120명의 명단도 걸려 있다.

 

거까뭇재성황당

성황제 준비

거부현 성황제는 소천3·4리가 합동으로 정월대보름 자시(子時)에 지낸다.

정월 초 7일이 되면 당회를 열어 깨끗한 사람으로 도가, 헌관, 축관을 선임한다.

정유년 성황제 도가는 소천4리 마을회관으로 하고, 초헌관에 이수근 전 시의원, 아헌관에 유만수 면발전협의회장, 종헌관에 이재식 전 이장, 축관에 서석원 성균관유도회경북본부 부회장, 도감에 송준호 이장, 집사 남기하 새마을지도자, 도가 제수준비에 금동창 씨, 김경애 씨, 박영숙 부녀회장 등이 분정됐다.

독축

13일은 도가를 청소하고 금줄을 친다. 14일 이른 아침에 도감과 제관들이 장을 본다. 이날 오전 10시 축관과 제관·집사가 당에 가서 청소를 한 후 묵은 금줄을 걷고 새 금줄을 친다. 당 주변과 도가에 붉은색 흙을 뿌려 잡신을 물리친다.

이 때부터 도가에서는 백설기 2시루, 장닭 1, 조기1, 포 1, 삼실과, 소고기·돼지고기 산적, 육탕, 채탕, 메와 국, 계란과 두부전, 배추전, 막걸리와 정수 등 제수를 준비한다.

밤 11시가 되면 제관들은 의관정재하고, 축관은 축문 내용을 제관들에게 설명하면서 엄숙한 자세와 청신(淸新)한 정신으로 행할 것을 주지한다. 밤 11시 30분 제관들은 제물 상자를 차에 싣고 당으로 출발한다.

 

유식례

성황제 제의(祭儀)

당에 도착하면 장작불을 피워 천지신명께 동신제 시작을 알린다. 축관이 소금물 바가지를 들고 동서남북에 뿌리면서 “부정 풉니다”라고 외친다. 종헌관은 산신석에 술을 한 잔 올리고 산신께 성황제의 시작을 고한다. 아헌관은 신위 앞 좌우에 촛불을 밝히고 진설을 시작한다. 떡시루는 제단 아래에 메와 국, 탕과 포, 삼실과와 어육전적은 신위 전에 진설한다.

시계를 보고 있다가 밤 12시가 조금 넘은 시각 12시 5분 초헌관의 삼상향으로 제의가 시작된다. 강신례에 이어 초헌관이 신위 전에 술 두 잔을 올린다. 한 잔은 여신(女神)의 잔이고 또 한 잔은 남신(男神)의 잔이라고 한다. 할머니 제사에 할아버지의 잔도 함께 올리는 것과 같은 의미라고 한다. 이어서 축관이 독축한다.

부정풀기

“정유년 새해를 맞이하여 정월 을묘달, 15일 기사일, 유학 경주 이수근은 삼가 밝혀 고하나이다. 이 고요한 밤. 거부현성황신께 목욕재계하고 엎드려 포과진병(脯果陳餠)과 맑은 술을 올리나이다. 높으신 신령이시여! 지금 이후 소천3,4리에 비는 순하게 내리고 바람은 조용하여 재앙이 없게 하시고, 농축상업이 일익번창하고 이웃이 편안하며, 서로 친히 사귀고 동락하게 하옵시고, 들어오고 나갈 때마다 무사하고 만사형통하게 하여주옵소서. 이에 받들어 올리오니 마음껏 드시옵소서”라고 고했다.

다음은 아헌관과 종헌관이 잔을 올리고 나서 삽시정저-유식례-첨작례-진다례 순으로 행한다. 제의가 끝나면 축관이 소지를 올린다. 준비한 명단에 따라 성황소지, 제관소지, 도가소지, 호주소지, 부석면기관장 소지, 개인소지 순으로 올린다. 소지가 끝나면 신위 전에서 음복을 하고 도가로 돌아온다. 당을 떠날 때 서석원 축관은 “불조심”을 당부했다.

 

음복연

음복연(飮福宴)

성황제가 끝나면 도가에서 축제 분위기 속 음복연이 열린다. 마을 사람들은 제관과 축관, 참제자들의 노고를 위로하고 덕담을 나눈다.

송준호(46) 이장은 “오늘 영하 12도로 매우 추운 날씨에 제관님들 고생 많으셨다”며 “성황제가 유종의 미를 거둘 수 있도록 협력해 주시고 참제해 주신 모든 분들께 감사드린다”고 말했다.

서석원(76) 축관은 “오늘 성황제를 무사히 잘 마칠 수 있어 기쁘게 생각한다”며 “처음부터 끝까지 경건한 자세와 청신한 정신으로 동제를 올려, 성황님께서 마을에 큰 축복을 내려주실 것”이라며 덕담했다.

헌관, 축관, 집사

20여년 동안 도가에서 제수(祭需) 준비를 해 왔다는 금동창(여.79)씨는 “20년 전이나 지금이나 제물은 변함이 없다”면서 “메를 짓고 전을 부치고 산적을 장만할 때 깨끗하게 정성을 다하는 게 가장 중요하다”고 말했다.

이재식(69) 종헌관은 “우리 성황당은 효험이 좋다고 소문이 나서 전국 각지에서 신내림을 받으려 오는 무속인들이 많다”며 “마을에서도 당에서 기도하고 소원을 빌어 크게 은혜를 받은 사람이 여럿 있다”고 말했다.

유만수(70) 아헌관은 “거부현성황제는 역사적·민속적 가치가 충분하고, 지역주민들의 관심 또한 크다”며 “민(民) 주도 토속 신앙인 성황제가 후손들에게 전수될 수 있도록 하자면 기록 보존이 중요하다”고 말했다.

거부현 불밝히기

성황제를 지내고 도가로 돌아오는 길에 이수근(77) 전 의원으로부터 성황제 이야기를 들었다.

이 전 의원은 “제 나이 스무살 적부터 성황제에 참제하기 시작하여 지금까지 한 번도 빠진 해가 없으니 57년이란 세월을 함께 했다”며 “한밤중에 여기와도 무섭지 않았고, 우리집 같이 편안한 느낌이 든다”고 했다.

산신석

이 전 의원은 또 “성황신령님의 은혜로 초대 군의원과 4대 시의원에 당선되는 영광을 안았다”며 “부족한 사람이 지역사회를 위해 봉사할 수 있는 기회를 가질 수 있어 보람이 컸다”고 말했다.

마을 사람들은 큰일을 앞두고나, 어렵고 힘든 일이 있을 때 성황당을 찾는다고 하니 성황제의 의미를 여기에서 찾을 수 있었다.

건립기문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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