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마을탐방[134]상망동 보름골

▲ 보름골 전경
삼국시대 때 망동, 우리말로 ‘보름골’
우계이·옥천전·성주배씨 500년 세거지

상망동 보름골 가는 길
보름골은 봉화통로 동부삼거리, 삼일주유소, 코아루아파트 주변 마을이다.
원당로와 광복로가 만나는 동부삼거리에서 상망교차로 방향으로 간다. 동부지구대 앞에서 좌회전하여 마을길로 접어들면 보름골식당, 보름골한우 등 ‘보름골’이 들어간 간판들이 여럿 보인다.

여기서 부터가 유서 깊은 마을 보름골이다. 보름골은 새마을주택과 영남동산·명성방산·하망화성·코아루A·무지개·장미마을 등 단독주택과 아파트가 어우러진 도농복합마을이다.

지난 8일 보름골에 갔다. 보름경로당에서 조순백 노인회장과 전하원 옥천전씨 문중대표, 아랫보름골경로당에서 장동락 전 통장과 이분이 할머니 그리고 여러 사람들을 만나 보름골의 역사와 전설을 듣고 왔다.

▲ 보름골 표석
보름골의 역사
영주는 고구려의 내기군, 신라의 내령군, 고려 때 강주·순안·영주, 조선 때 영천(榮川)으로 고쳤다가 한 때 구성(龜城)이라 부르기도 했다. 1413년(태종 13년)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로 정비할 때 보름골은 경상도 영천군(榮川郡) 봉향리(奉香里) 망동방(望洞坊)에 속했다가 영조 이후에 봉향면 망동리가 됐다.

당시 철탄산 아래 현 영주초 자리에 군의 관아가 있고, 관아 동편에 망동(望洞. 보름골)이 있었다. 1896년(고종33) 조선의 행정구역을 8도제에서 13도제로 개편할 때 망동이 상망동과 하망동으로 분리되면서 보름골은 상망동에 편입됐다.

▲ 옛 방산마을 터
1914년 일제가 행정구역을 개편할 때 영천군·풍기군·순흥군을 통합하여 영주군이 됐고, 당시 읍내 지역에 있던 봉향면·망궐면·가흥면이 영주면으로 통합됐다. 1940년 영주읍 상망동에 속했다가 1980년 영주시로 승격하면서 영주시 상망동이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보름골 장동락(74) 전 통장은 “60년 전 보름골은 토담초가집이 띄엄띄엄 있는 청빈한 농촌마을이었다”며 “1980년대 후반 소형아파트가 들어오고, 2005년 코아루가 들어오면서 대규모 주거단지가 됐다”고 말했다.

▲ 옛 망동마을 터
지명유래
보름골은 망동(望洞)에서 유래된 한글 이름이다. ‘삼국사기’ 소지왕 11년(489) 기록에 「가을 9월 고구려가 북변을 내습하여 과현(戈峴)에 이르다」라고 적었다. 여기서 과현은 보름골에서 진우로 넘어가는 재(峴)다.

당시 보름골은 고구려와 신라의 격전장으로 변했다. 이 때 이 지역이 적의 동정을 살피는 ‘망(望)보는 동네’라 하여 ‘망동’이라 부르다가 순수한 우리말로 ‘보름골’이 됐다고 한다. 다른 유래도 있다. 영주시사에 보면 「조선 때 배치암(裵癡巖)이란 선비가 치바위 밑에서 살았는데 이곳에서 보면 마을이 넘어다 보인다고 하여 ‘망동’이라 했다」고 썼다.

조순백 보름노인회장은 “보름골에는 우계이씨 세거지 망동(코아루 앞), 옥천전씨 집성촌 방산(方山), 성주배씨가 정착한 치바위(癡巖) 등 유서 깊은 지명이 많다”고 말했다.

▲ 옛 배묘터 자리
보름골 우계이씨
원당로 동부지구대에서 상망교차로방향으로 500여m 올라가면 장미마을로 들어가는 길이 있다. 교통표지판에는 ‘개난골’이라 되어 있고, 마을표석에는 ‘아랫보름골’이라고 새겨져 있다.
도로에서 100여m 들어가면 고택 몇 채가 보이는데 이 근처가 우계이씨 세거지로 추정된다.

우계이씨(시조 陽植)가 영주에 터 잡은 것은 고려가 망하자 벼슬을 버리고 처가 고장인 순흥(구구리)에 내려와 은둔한 이억(李억.고려말-조선초)으로부터다.

이억의 현손 수형(秀亨.1435-1528)은 통훈대부 평시서령으로 있다가 단종이 수양에게 왕위를 빼앗기자 벼슬을 버리고 1456년 낙향한 절신(節臣)으로, 순흥부 도촌(桃村.현 봉화沙提)에 터를 잡았다. 보름골 우계이씨는 수형의 아들 양근(養根.세조연간 출생)의 후손들이다.
양근은 경사에 통달하고 예학에 밝아 학행으로 전설사별좌(典設司別座)에 제수되었으나 나가지 않고 오직 학문에만 전념했다.

이후 양근의 아들 장(樟.1489-미상)은 장사랑 경기전에, 손자 약함(若함.1510-미상)은 통예원 인의에 오르는 등 과환과 문한이 끊이지 않았다.

후손 이장선(상망동)씨는 “저의 고조부 윤배(潤培.1826-1901)선조는 소수서원장을 지내셨고, 교덕(敎悳.1895-1955)선조는 독립운동가로 상해임시정부 의열단에서 암약 중 일경에 체포되어 옥고를 치루기도 했다. 또 정희(正熙.1903-1975) 선조는 제3,4대 국회의원을 지내는 등 국가적 인재가 많이 배출됐다”며 “1960년대까지 30여세대가 살았으나 산업화 이후 도시 진출이 많았다”고 말했다.

▲ 보름경로당
옥천전씨 망동파
옥천전씨(시조 學浚)가 영천에 옮겨와 살기 시작한 것은 조선 초 단종이 왕위를 빼앗기자 분연히 벼슬을 버리고 이곳 휴천(광시)에 은둔한 휴계(休溪) 전희철(全希哲.1425-1522)에서 비롯됐다. 전희철의 맏아들 호(琥)는 고향 옥천으로 가고, 둘째 아들 박(珀.1453-1528)이 보름골(望洞)에 터전을 열어 뿌리내렸다.

박의 아들 5형제 중 셋째 응두(應斗.성균생원.1496-1567)가 망동파 파조이다. 응두의 아들 개(漑)는 선조 때 직장에 오르고, 개의 아들 뇌(磊.1577-미상)가 광흥창봉사를 지냈으며, 뇌의 아들 익희(益禧.雪月堂.1598-1659)는 문과에 급제하여 사헌부지평·선산부사에 이르는 등 옥천전씨 문중에서 과거급제자와 글 잘 하는 선비가 많이 나왔다.

후손 전하원(82) 어르신은 “옥천전씨가 보름골 방산(方山.화성아파트 인근)에 터 잡은 것은 1480년경으로 추정된다”며 “1960년대까지 방산에 30여세대가 집성촌을 이루고 살았으나 도시화로 분산됐다”고 말했다.

▲ 옛 치암이 있던 자리
‘배치암’은 누구인가?
영주시사에 보면 ‘배치암이 보름골을 개척했다’고 되어 있고, 아랫보름골 표석에도 ‘배치암이란 선비가 치바위에 살았다’고 기록했다. 그럼 ‘배치암이란 선비는 누구일까?’가 궁금하다.

배치암의 조선 선조 때 사람으로 이름은 배상익(裵尙益.1581-미상)이고 호가 치암(癡巖)이다. 치암은 성주배씨(星州裵氏)로 나주목사를 지낸 안촌(安村) 배응경(裵應경.1544-1602)의 아들이다. 안촌이 본향 성주로부터 1570년경 영주 보름골(망동)에 옮겨 정착함에 따라 치암이 보름골에 살게 됐다.

치암은 치바위 아래 살아서 호를 치암이라 했고, 여기서 마을이 넘어다 보인다 하여 마을 이름을 망동(보름골)이라 했다 한다. 치암은 1624년(인조 2년) 문과에 급제하여 1629년 황해도사와 1631년 진주판관에 임명됐다.

후손 배석태(86) 전 영주농협조합장은 “치암 선조는 저의 11대조”라며 “안촌 선조(12대조)께서 영천에 입향하신지 450년이 됐다. 보름골에서 집성촌을 이루지는 못했지만 문과급제자와 글 잘 하는 선비를 많이 배출했다”고 말했다.

보름골 사람들
보름골에는 보름경로당, 치바위경로당, 아랫보름골경로당 등 경로당이 세 군데나 있는 큰 마을이다. 보름경로당은 상가지역 오랜지마트 골목 안 단독주택이다. 김정남 보름부회장은 “보름경로당은 하루 40-50명이 함께하는 모범경로당”이라며 “건전한 오락과 독서·건강강좌 등 유익한 프로그램이 많다”고 자랑했다.

김선제 총무는 “보름골은 ‘배치암’이라는 선비가 마을을 개척했다고 전한다”면서 “예전에 배 선비가 살았다는 치바위(癡巖)가 치바위경로당 근처에 있었는데 1970년대 도시계획으로 흔적이 없어졌다”고 말했다.

보름경로당 정정자(78)·고화자(79)씨는 “매월 29일은 남녀회원 50여명 모두 점심을 함께 먹는 날”이라며 “경로당은 허름해도 나눔과 돌봄이 잘 이루어지는 모범경로당”이라고 자랑했다.
아랫보름골경로당은 장미마을 앞에 있다. 2011년 신축한 현대식 건물이다.

이분이(85) 할머니는 “6·25 후 보름골의 모습은 넓은 도랑가에 칡넝쿨이 무성하고, 집들은 토담초가집뿐이었다”며 “논가에 박샘이 있고 빨래는 못(池)에서 했다. 장물도가 둑방 밑에 군복 염색하는 곳이 여러 곳 있었다”고 말했다.

김인식(80)할머니는 “지금은 길이 좋아졌지만 예전에는 겨우 사람이 걸어 다니는 지게길 밖에 없었다”면서 “살기 좋은 세상이 되어 좋은데 나이를 많이 먹어 아쉽다”고 했다. 장미마을 정말흠(83) 할머니는 “우리마을의 자랑은 장동락 (통장경력 16년) 전 통장님”이라며 “마을의 대소사를 챙겨주시고, 5년 전 경로당을 지을 때도 힘을 많이 쓰셨다. 나라에는 대통령이 있고, 우리마을에는 대통장(大統長)이 있다”고 자랑했다. 이번 마을탐방 때 특별히 도움 주신 우계이씨 이홍선(李弘善.봉화도촌) 종손님께 감사드린다.

이원식 시민기자

<상망동 보름골 마을 사람들>
 

▲ 조순백 보름노인회장
▲ 장동락 전 통장

▲ 전하원 옥천전씨 대표
▲ 이분이 할머니

▲ 김정남 보름부회장
▲ 정말흠 할머니

▲ 김인식 할머니
▲ 김제선 보름총무

▲ 정정자 보름부회장
▲ 고화자 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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