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붉은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영주시 가흥2동 배고개 마을 뒤 가고파가든 텃밭에 닭 암수 한 쌍이 금실 좋은 모습으로 서로 마주보고 있다.
붉은 닭은 액운을 쫓고 행운을 부른다는 속설 있어
풍기읍 ‘닭마을’ 금계촌은 천하제일 십승지지 마을

사람들이 말하는 그대로 다사다난했던 병신년(丙申年)은 해넘이를 끝으로 역사 속으로 사라졌다. 올해는 닭의 해 정유년(丁酉年)이다. 특히 ‘붉은 닭의 해’다.

매년 새해를 상징하는 12지(支) 동물이 희망의 상징으로 등장하지만 올해는 분위기가 사뭇 다르다. 병신년 연말 내내 닭들이 유난히도 수난을 많이 겪었기 때문이다.

새해 정유년에는 모든 닭들이 다시 희망의 새벽을 맞이했으면 한다. 우렁찬 닭의 울음소리가 들리는 2017년이 되기를 기원해 본다.

닭의 해를 이틀 앞 둔 구랍 30일 붉은 닭을 봤다는 소문을 듣고 물어물어 찾아간 곳이 가흥2동 배고개다. ‘붉은닭’을 만났다. 건재했다. 두월리 양계장에도 가봤다.

수만 마리의 병아리들이 “삐약”거리며 모이를 쫓고 있었다. 이상이 없다. 영주에는 닭 마을도 있다. 바로 풍기 금계촌(金鷄村)이다. 인근 봉화에는 지형이 닭이 계란을 품고 있는 형상을 하고 있는 닭실마을이 있다.

▲ 금계촌 전경
▲닭의 기원
조류 중에서 가장 먼저 사람에 의해 가축화된 것이 바로 닭이다. 고기와 알을 얻기 위해 가축으로 기르기 시작한 시기는 약 4천 년 전인 것으로 기록에 나와 있다.

우리나라 닭의 기원은 약 2천 년 전으로 추정되며 중국을 거쳐 들어 온 것으로 알려졌다.
닭은 삼국유사에도 등장한다. 박혁거세의 왕비인 알영 부인은 계룡의 겨드랑이에서 태어났고, 입은 닭의 부리를 닮았다고 전한다.

그리고 금빛 찬란한 황금궤 안에서 나온 김알지는 하얀 닭이 그의 탄생을 알려주었다고 한다. 닭을 숭배하는 풍속은 고구려에서도 찾아볼 수 있는데, 천축국에서는 고구려를 계귀국(鷄貴國)이라 불렀다 한다.

▲ 가흥2동 배고개 마을 ‘붉은 닭’
▲닭의 상징
닭은 흔히 다섯 가지 덕(德)을 지녔다고 한다. 머리에 관(冠)을 쓴 것 같은 벼슬은 문(文)을 뜻하고, 날카로운 발톱은 무(武)를 나타내고, 적(敵)을 보면 물러서지 않는 용(勇)을, 먹이를 보면 ‘꾹꾹’거려 무리를 부르는 인(仁)을, 때를 맞추어 새벽을 알림은 신(信)이라 했다. 그래서 닭은 문무용인신(文武勇仁信)을 겸비한 상서로운 영물로 간주됐다.

또한 수닭의 볏은 벼슬을 상징해 과거급제를 의미하고, 암탉은 알을 많이 낳으므로 자손 번창을 상징한다고 한다. 우리 조상들은 어둠 속에서 새벽을 여는 닭을 빛의 전령이라고 하고, 풍요와 다산의 상징으로 여겨왔다.

▲ 이산면 두월2리 양계장
▲붉은 닭의 해
2017년 정유년은 ‘붉은 닭의 해’이다. 하늘의 정기인 10천간(天干)과 땅의 정기인 12지지(地支)가 만든 60갑자(甲子) 중 정유(丁酉)는 34번째로 십간(十干)의 정(丁)은 불의 기운을 상징하기 때문에 붉은 색을 말하고, 유(酉)는 닭을 뜻함으로 2017년은 ‘붉은 닭의 해’라고 한다. 풍수적 해설에 의하면 닭은 액운을 쫓고 행운을 불러 오는 것으로 알려져 있다.

캄캄한 어둠속에서 여명(黎明)을 알리는 닭은 상서롭고 신통력을 지닌 서조(瑞鳥)이다. 어둠을 가르는 청명한 울음소리로 새벽을 알리고, 빛의 도래를 예고하는 태양의 새(鳥)라고도 한다.

▲ 천하제일 십승지지 금계촌 표석
▲닭 마을 금계촌
닭의 해를 맞아 우리고장 영주에도 ‘닭에서 유래한 마을이 있을까?’ 찾아봤더니 십승지로 이름난 금계촌(金鷄村)이 있었다. 우리나라에서 예로부터 전해오는 피난처 10곳 중 맨 처음으로 꼽는 곳이 바로 풍기읍 ‘금계촌’이다.

금계촌은 풍기읍 금계동과 욱금동, 삼가동을 포함한 지역이다. 뒷산에는 유명한 금계바위가 있고, 산줄기가 동네를 포근히 감싸 안아 마치 금계가 알을 품는 형상 즉 ‘금계포란형’ 명당 마을이다.
금계(金鷄)란 말 그대로 ‘금닭’이다. 바위의 모습이 금빛이면서 마치 닭 벼슬처럼 생겼다고 해서 유래된 이름이다. 일제 강점기 때 광석을 캐기 위해서 폭파한 후로 원형을 잃고 지금의 모습으로 남게 됐다.

전설에 의하면 금계의 눈 부분에 두 개의 보석이 박혀 있었는데 욕심 많은 사람이 이 보석을 빼려고 바위에 올라갔더니 갑자기 천둥벼락이 치면서 바위가 부서지는 바람에 그 사람은 바위에 깔려 죽었다고 한다. 지금도 수정(水晶) 조각들이 반짝이고 있는데 아마도 보석이 아니라 커다란 수정이 박혀 있었던 것으로 추정된다.

마을 원로들은 “금계촌은 정감록촌이라고도 하는데 부계밭과 임실 등에 사는 사람 중 열에 여덟아홉은 정감록을 믿고 찾아 온 사람들이다. 이북 지역에서 온 사람 중에는 평안도가 제일 많고 황해도, 함경도 순”이라며 “이곳 토착주민은 거의 없다”고 말했다

▲ 붉은 색을 띤 금계바위
▲금계촌의 인물과 유적
금계촌에는 아름다운 정자 금선정(錦仙亭)이 있다. 이곳은 금계 선생이 사색을 즐기던 곳으로 기암괴석과 송림이 우거져 영남의 아름다운 누정 중 열손가락 안에 든다.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은 풍기군 서부면 욱금리에서 태어난 조선 중기 명신이다. 퇴계 이황의 수제자로 24세에 문과에 급제하여 관직을 두루 거치며 청백리의 표상이 되었던 목민관이다. 효심과 우애가 크고 민생과 교육에 치중했으며, 학문의 깊이가 탁월한 우리고장의 큰 인물이다. 금계촌에는 퇴계와 금계를 모신 욱양단소가 있다.

▲ 금선정
단소 옆에 금양정사(錦陽精舍)도 있다. 금양정사는 금선정 뒷산 중턱 양지바른 곳에 있다. 금계를 지극히도 사랑했던 황준량은 한적하고 경치가 아름다운 이곳에서 만년에 학문수양과 후진양성을 할 곳으로 마음에 두었던 곳이다. 그러나 그의 소박한 꿈은 끝내 이루지 못하고 47세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금계의 후손 황헌(黃憲)은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했으며 시와 문장에 능했다. 그는 1892년(고종 29) 19세에 별시병과 32등으로 급제했다. 1894년 과거가 폐지됨으로써 조선의 마지막 문과급제자가 됐다. 또 황헌의 증손자가 황재선(영주청년유도회장) 변호사다.

정유년 새해 벽두에 금양정사에 가서 좋은 기운 받아보는 것도 좋을 듯 하다.

▲ 금양정사
▲ 정유년 새아침 붉은 해가 떠오르고 있다.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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