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수면 두전2리 띳밭

▲ 마을 전경
강릉김씨가 개척하여 안동권씨와 세거
문호마다 효도와 우애를 숭상하는 마을

▲ 마을 표석
장수면 띳밭 가는 길
영주시내에서 가흥교를 건너 예천방향으로 향한다. 폴리텍대학 영주캠퍼스 앞을 지나 자동차전용도로를 타고 애고개를 오르면 장수·두전리 방향으로 내리는 표지판이 나타난다.

우측으로 내려서 두전리 방향으로 가다가 소백산찜질방 앞에서 두전2리로 가는 좌측길로 접어든다. 뱅뱅이고개를 넘어 ‘구두머리’를 지나면 두전2리 버스승강장과 학방교(鶴方橋)가 보이고, 옥계천을 따라 100여m 내려가면 열두 띳밭 중 본 마을인 음지마가 나타난다.

지난 4일 두전2리 띳밭에 갔다. 김선유 이장의 주선으로 민영길 노인회장, 김도상 어르신, 윤상록 할머니 그리고 여러 마을 분들을 만나 두전의 역사와 띳밭의 유래를 듣고 왔다.

두전리의 역사
우리고장의 마을역사를 기록한 것은 1625년에 쓴 취사 이여빈의 영주지가 최초이고, 1646년경에 만든 김응조의 영주지와 괴헌고택에서 발견된 영주지에 그 기록이 있다.

▲ 안터골
영주지에 보면 장수면 두전리 지역은 조선 태종 13년(1413년) 행정구역 개편 때 영천군(榮川郡)에 속했다. 조선 중기에 와서 리(里)와 방(坊)으로 구분했는데 두전리에는 두전방(豆田坊, 모전), 가라방(加羅坊, 가래), 반지산방(盤之山坊, 반지뫼), 지곡방(池谷坊, 못골), 별태방(別太坊, 배태), 파지곡방(破之谷坊,파지), 갈산방(葛山坊, 갈미) 등 7개 방이 이었다. 조선 후기(영조 이후)에 와서 리가 면으로 바뀌면서 두전면에는 반구리, 두전리, 갈산리, 성곡리를 두었다. 1914년 일제에 의한 행정구역 개편 때 영주군 장수면 두전리가 되었다가 1995년 영주시 장수면 두전2리가 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

▲ 음지마
열두 띳밭의 형성
띳밭은 조선 때 두전면의 중심지였고, 띳밭(茅田)의 중심은 음지마이다. 기자가 음지마 앞을 지나다가 텃밭을 돌보고 계신 윤상록(85) 할머니를 만났다. “여기가 띳밭입니까?”라고 여쭈니 “여기도 띳밭, 저기도 띳밭, 띳밭은 모두 열두 띳밭”이라고 말했다.‘아, 두전2리를 통틀어 「띳밭」이라 하는 구나’라고 생각하면서 마을회관으로 갔다.

열두 띳밭은 음지마를 중심으로 마을회관이 있는 안터골, 그 안쪽에 작은터골, 팥밭골, 분개골이 있고, 서낭골 위에 원살미 그 위에 작은먼작골과 큰먼작골이 있다. 또 음지마에서 옥계천을 따라 600m 쯤 올라가면 바우모랭이가 있고, 시내로 가는 뱅뱅재에는 구두머리가 있다. 그 외에도 새쟁이, 시느티 등 순수한 우리말로 지은 마을이름들이 더욱 정겹게 느껴진다.

▲ 추억의 학방교
예부터 마을은 농토가 있고 먹을 물(샘)이 있는 곳에 형성됐다. 띳밭에 살았던 선조들은 산따라 물따라 거친 땅을 개척하여 후손들이 먹고 살 수 있는 터전을 마련했다. 그래서 열두 띳밭 마을 앞에는 용목들, 황새들, 분개들, 땀매들, 원살미들 등 선조들이 수백년동안에 걸쳐 일군 땀의 흔적들이 고스란히 남아 있다. 지금 띳밭에는 안터골에 20가구, 음지마에 5가구, 서낭골에 7가구 등 60가구에 160명이 산다.

▲ 솔쉼터
지명 유래
예전에 장수면 화기리 지역에 장수(長壽)하는 노인이 많아 마을이름을 ‘장수원(長壽園)’이라 했다고 한다. 1914년 행정구역 개편 때 장수원의 이름을 따 장수면이라 칭했다. ‘두전’은 콩 두(豆)자에 밭 전(田)을 쓴다. 정의건(70) 노인회 총무는 “두전리에 ‘팥밭골’이라는 지명이 있는 것으로 봐서 예전에 콩밭·팥밭이 많아 콩 두(豆)자 두전리가 된 것 같다”고 말했다.

그러면 띳밭의 유래는 어디에서 왔을까? 김선유 이장은 “띳밭은 띠(茅)에서 유래했다”고 하면서 “예전에 마을에 자손이 귀하다 하여 번근(蕃根)으로 알려진 모초(茅草, 띠풀)를 심은 것이 유래되어 ‘띳밭’이라 불러오다가 조선 후기 무렵 띠 모(茅)자에 밭 전(田)자를 써 모전(茅田)이라 했다”고 말했다.

이 마을 권석규(74)씨는 “마을 주변에 띠가 많아 예전에는 도롱이를 만들어 입기도 하고 지붕을 이기도 했다”면서 “지금도 마을 주변이나 도랑가에 ‘띠’가 많이 있다”고 말했다. 띠(茅)는 억새나 갈대와 비슷하게 생겨 구분하기 어려운데 5-6월에 꽃이 피는 게 특징이다. 김도상(88) 어르신은 “제사를 지낼 때 강신(降神)을 한다. 강신은 초헌하기 전에 신(神)을 내리게 하는 예로 향을 피우고 잔에 술을 따라 모사(茅沙)에 붓는다. 이 때 모사가 바로 ‘띠(茅)’로 묶음을 만든 것”이라고 말했다.

▲ 구두머리
애고개와 뱅뱅이재
영주에서 장수로 넘어가는 고개를 ‘애고개’라 한다. 예전에 읍에서 두전으로 갈 때 서천을 건너 부처모랭이(삼존불)를 돌아 고개를 넘어야 하는데 이 고개를 걸어서 넘기 ‘애먹는다’ 하여 ‘애고개’라 했다고 전해온다.

또 띳밭으로 가기위해서는 ‘뱅뱅고개’를 넘어야 했다. 지금은 포장도로를 쉽게 넘어 가지만 예전에는 산모퉁이를 따라 이리저리 뱅글뱅글 돌아서 간다고 하여 ‘뱅뱅이재’라고 불렀다. 이 마을 출신 민태식(69)씨는 “1960년대 초 띳밭에서 영주중학교까지 5km를 걸어서 통학했다.

지금은 애고개가 넓고 낮지만 예전에는 S자형으로 높고 험했다”고 하면서 “띳밭은 야산 속에 숨은 두메이지만 어른을 공경하고 형제의 우애와 친구의 신의를 숭상하는 선비의 마을”이라고 말했다.

▲ 동제 기록문서
마을의 개척과 세거 내력
띳밭에 사람이 살기 시작한 내력에 대한 정확한 기록은 없다. 구전(口傳)에 의하면 「조선 때 강릉김씨가 마을을 개척하였고, 안동권씨가 집성촌을 이루어 세거해 왔다. 처음 음지마에 정착하였으나 후손이 번성하여 이곳저곳으로 이거하여 열두 띳밭 여러 곳에 분포해 살았다」고 전해진다. 마을 입구 구두머리(龜頭)에 성균관 진사를 지낸 강릉김공(江陵金公)의 묘가 있다. 마을 사람들은 이 묘의 주인인 김 진사가 띳밭 입향조로 추정하고 있으나 묘비의 마모가 심해 글자를 알아볼 수 없어 정확한 연대와 내력은 알 수 없다.

강릉김씨(시조 김주원) 후손 김선유(66)씨에 의하면 “진사 선조는 저의 15대조로 약 400-450년전인 1600년경 낙남하여 와우형(臥牛形) 명당(明堂) 자리인 이곳에 터를 잡고 학문 연구와 후진양성에 힘쓰셨다”며 “입향조께서 마을 남쪽에 소나무를 심었다고 전해지며, 마을 사람들이 해마다 정월대보름날 이곳에서 동제(洞祭)를 올릴 때 초헌관은 늘 강릉김씨가 맡아 잔을 올렸다”고 말했다.

띳밭의 안동권씨(복야공파)는 봉화 닭실 충재(沖齋) 권벌(權벌, 1478-1548)의 후손으로 봉화 닭실에서 이곳으로 이거하여 지금까지 세거하고 있다. 후손 권석규(74)씨는 “저의 13대조께서 이곳에 정착하셨다고 하니 약 400여 년 전(1600년)으로 추정된다”며 “1950-60년대에는 50여 가구가 사는 집성촌이었으나 지금은 십여가구만 살고 있다. 띳밭출신 안동권씨는 전국 각지에 100여 세대 정도 된다”고 말했다.

▲ 마을회관
띳밭마을 사람들
기자가 마을회관에 도착했을 때 민영길 노인회장을 비롯한 어르신 여러분들이 반갑게 맞아주셨다. 잠시 후 이 마을 부인회원 한 분이 검은 비닐봉지를 들고 왔다. 아이스크림 월드콘이다.

민영길(76) 노인회장은 “우리마을은 토지는 넉넉하지 못하나 글을 좋아하고 효도와 우애를 숭상하는 마을”이라며 “대대로 가난하게 살면서도 교육에 힘써 근대사에도 훌륭한 인재를 많이 배출한 마을”이라고 말했다.

서낭골에 사는 권정기(82) 어르신은 “띳밭은 옥계천 물이 풍부하고, 풍수해의 피해가 없는 산간지역으로 벼농사가 발달해 왔다. 지금은 축산과 목장, 수박, 생강 등 특용작물 재배로 소득이 높다”고 말했다.

안터골에 사는 권오기(76) 어르신은 “6·25 전쟁 후 농촌인구가 폭발적으로 늘어나 마을에 사람들이 많이 살았으며, 장수초등학교 학생수가 1천5백명이 넘었다”며 “당시 학교는 책걸상도 없고 마루바닥에서 공부했다”고 말했다.

▲ 띳밭사람들
마을 어르신들은 “우리마을 김선유 이장은 군에서 전역(예비역 소령) 후 14년째 마을을 위해 헌신하고 있다”며 “마을회관 신축, 솔쉼터 조성, 경로효친 실천, 깨끗한 환경조성, 신소득 작목개발 등 공덕이 많다”고 말했다.

백봉흠(50) 새마을지도자는 “신세대 농업경영인 10여 가구가 마을에 들어와 마을이 활기를 띠고 있다”며 “자연을 잘 이용하여 한우사육, 젖소농장, 사슴목장 등 축산이 활성된 마을”이라고 소개했다.

분개에 사는 안성환(76)씨는 “두전2리에는 30여 한우농가와 젖소농장이 있으나, 마을에 피해를 주지 않기 위해 모두 산속에 숨어 있으며, 총 두수(頭數)는 1천두가 넘는다”고 말했다.

윤상록 할머니는 “예전에 옥계천은 하얀 백사장이 있고, 물이 맑아 빨래도 하고 김장도 씻었는데 지금은 잡초가 무성한 늪지대로 변했다”며 아쉬움을 표했다.

▲ 민영길 노인회장
▲ 김선유 이장

 

 

 

 

 

 

▲ 백봉흠 새마을지도자
▲ 정의건 노인회총무

 

 

 

 

 

 

▲ 윤상록 할머니
▲ 김도상 어르신

 

 

 

 

 

 

▲ 안성환 어르신
▲ 권정기 어르신

 

 

 

 

 

 

 

▲ 권석규 어르신
▲ 권오기 어르신

 

 

 

 

 

이원식 시민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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