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김덕우 (영주문화연구회 이사)

<사진설명>
▲소수박물관에 전시되어 있는 영주10경 병풍

소수박물관에서 10폭 병풍을 보았다. ‘사진이 없던 시절에 이런 식으로 풍경을 남겼구나.’ 하며 지나쳤다. 그리고 몇 발짝 지나다가 다시 돌아가 보았다. 그 땐 무엇이 영주의 중요한 공간이었을까 하는 의문 때문이었다.

첫 번째는 영주 향교를 그린 그림이있고, 두 번째는 금성단 … 그리고 끝은 소수서원이었는데. 마지막에 “時丙子新秋節 寫于竹溪山房 凝齋 安潤鴻(병자년 새로운 가을에 죽계산방에서 베끼다. 응재 안윤홍).”라고 적혀있었다.

1936년, 1876년, 1816년…. 병자년을 적어 보았다. 언제 일까? 그리고 ‘베끼다.’라는 말의 의미는 무엇일까? 생각이 꼬리를 물었다. 열 폭의 이 그림은 단지 아름다운 풍경을 그린다는 의미만은 아니었을 것이란 생각이 들었다. 옛 그림들을 만난다는 것은 그 당시 사람들의 정신을 만나는 일이기 때문이다.
열 폭의 그림을 통해 당시 사람들의 소망을 읽어 보고, 또 현재와 비교해 가며 변화한 모습을 살펴보고자 “영주 10경”을 게재한다. <편집자주>

영주향교(榮州鄕校) 대성전(大成展)
첫 그림은 대성전이었다. 영주의 진산(鎭山)이라 일컬어지는 철탄산(鐵呑山) 동편 산록에 있는 영주여자고등학교 본관 뒤편에 있는 ‘영주향교’가 그림의 주인공이다. 나라의 어려움을 이겨내려는 의지일까? 유난히 높게 그린 철탄산은 줄기마다 힘이 있다.

1876년 2월 3일(음), 일본과 병자수호조약을 체결한다. 근대 국제법의 토대 위에서 맺은 최초의 조약이며, 일본의 강압적 위협으로 맺어진 불평등 조약이다. 온 나라는 불안감에 휩싸였을 것이고, 극복 방안으로 조선 정신의 바탕인 유학을 논의했을 것이다.

영주향교는 고려 공민왕 때 군수로 부임한 하륜(河崙)이 철탄산 동편 산록에 공자(孔子)의 위(位)를 모시고, 오성(五聖)·십철(十哲)을 배향하여 고을 선비들의 유학의 근본 도장으로 삼았다.

향교 앞에서부터 구성공원까지 길게 이어졌던 이 마을을 예전에 ‘사례(沙’禮)라고 하였다. ‘사리’ ‘사래’라는 어원으로 볼 때, 영주에서 가장 긴 골이라는 의미였을 것이다. 그림 속에 집들 사이로 길이 보인다. 왼쪽으로 가면 영주초등학교이고, 오른쪽으로 가면 봉화 가는 길이다. 영주 관아의 문루였던 가학루를 영주초등학교를 지으며 현 구성공원으로 옮겼음을 생각해 보면 이곳은 당시 가장 번화했던 곳임을 짐작 할 수 있다.

금성단(錦城壇)
두 번째 그림은 영주의 자존심이었다. 1456년 정축년 사건 이후 역모(逆謀)의 고을로 버려졌던 고을. 정의를 사랑했던 옛 인물은 갔지만, 압각수처럼 다시 정의를 살려낸 충절의 고향을 상징하는 금성단이었다. 그래서 이 그림으로 충절을 다짐했을까?

정축년(丁丑年) 사건은 계유정난(癸酉靖難)을 통해 단종을 밀어내고 왕좌에 오른 세조를 몰아내기 위해 금성대군과 순흥부사 이보흠이 거사를 준비했던 사건이다. 아래 사람의 밀고로 안동부사 한명진 등이 군대를 이끌고 와서 순흥도호부에 불을 지르고 닥치는 대로 백성들을 무참하게 죽였다. 당시 근방 30리 안에 산 사람이 없다고 할 정도로 처참한 지경에 이르렀다고 한다.

폐부된 지 228년만(숙종 9년)에 순흥부가 회복이 되고, 영조 18년(1742)에 이 신단을 설치하였다. 전국에서 모인 유림들은 봄가을로 금성대군과 당시 순흥부사 이보흠, 그리고 정축년에 희생된 의사(義士)들에게 제사를 지낸다. 그림 속에 압각수(鴨脚樹)가 보인다. 이 나무도 충절의 나무이다.

“은행나무가 다시 살아나면 순흥이 회복되고, 순흥이 회복되면 노산군도 복위 된다.”는 말처럼 순흥의 충신들이 죽는 날 함께 죽었던 나무가 숙종7년 밑동부터 살아나기 시작하였고 2년 뒤 순흥부가 회복이 된다. 그래서 압각수(鴨脚樹)란 이름까지 하사(下賜)받고 이제 1,200년의 수령를 자랑한다.

이산서원(伊山書院) 경지당(敬止堂)
세 번째 그림은 이산서원이었다. 퇴계 이황이 소수서원에서 제자를 기르고, 이산서원을 설계하고 만들었다면, 도산서원은 선생이 돌아가신 후 받들어 모신 곳이라고 한다. 그래서 이산서원엔 퇴계 정신이 곳곳에 있다.

그 중 '이산서원 원규'는 서원 운영의 정형화를 제시한 것으로 높이 평가되고 있는데, 이는 그 뒤에 설립된 많은 전국 서원의 전범(典範)이 되어 전해 나갔으며, 퇴계의 유형문화유산인 성학십도(聖學十圖)도 이곳에서 소장하고 있었으며, 정당(正堂)인 경지당(敬止堂)을 비롯, 동재(東齋)인 성정재(誠正齋), 서재(西齋)인 진수재(進修齋), 관물대(觀物臺), 지도문(志道門) 등 이름을 모두 퇴계가 지었다고 한다.

이산서원은 원래 명종 13년(1558년) 휴천1동 구서원마을(남간재 너머)에 창건하고, 선조 5년(1572년)에 묘우(廟宇)를 세워 퇴계선생의 위(位)를 배향하다가 선조 7년에 사액(賜額)되었다. 그 후, 광해군 6년(1614년)에 현재 장소인 내림리로 이건하였으며 고종 8년(1871년) 서원 철폐령에 의해 훼철되었다가 1995년에 강당인 경지당(敬止堂)만 중건되었다.

내성천을 사이에 두고 건너편에 외로이 있는 경지당을 본다. 경지당은 소나무 숲이 가리어 지붕만 드러나고, 산은 그림보다 나지막하게 보인다. 이제 이 경지당은 또 이사를 가야한다. 영주댐 건설로 수몰되기 때문이다. 내성천 바닥의 잡초들이 마음을 더 혼란스럽게 한다.

부석사(浮石寺)
한눈에 봉황산이 우뚝하고, 부석사가 초라하다는 느낌을 지울 수가 없다. 우선 석축이 제대로 묘사되지 않아 생략된 부분이 많은 그림이라는 생각을 했다. 그런데 가운데 가장 큰 건물이 무량수전이라면, 왼쪽의 건물은 무엇일까? 하면서 취원루(聚遠樓)를 생각했다.

1849년 발간한 ‘순흥읍지’에 “무량수전 서쪽에 있는 누각으로 남쪽으로 30리를 볼 수 있다.”는 기록 때문이었다. 부석사는 몇 차례 화재가 있었다고 한다. 한번은 영조 때인 1746년이었고, 또 한 번은 일제 초기였다고 한다. 아마도 1910년대에 불탄 것을 아닐까 짐작해 본다. 아래 사진은 1916년에 무량수전을 해체 수리하는 모습이다.

이 그림은 정선이 1733년(영조 9)에 그린 ‘교남명승첩(嶠南明勝帖)’ 속에 있는 ‘부석사’와 비교가 된다. 봉황산을 금강산의 봉우리처럼 그리며 선계(仙界)로 묘사했지만, 절집의 배치는 오히려 이 그림보다 현재와 닮아 있었다. 전체적으로 4단으로 표현되어 있는데, 맨 위가 조사당, 그 아래에 무량수전이 자리 잡았으며, 안양루 아래쪽에 큰 법당이 있고, 한참 아래쪽에 회랑처럼 생긴 건물이 그려져 있었는데 아마도 최근에 증축한 회전문(廻轉門)인 듯 보였다. 그림 속에 한 인물이 오르고 있다. 이 자리가 사천왕상(四天王像)이 있는 그 어디쯤으로 생각해 본다.

소수서원(紹修書院)
마지막 그림이 소수서원이다. 경렴정(景濂亭)도 보이고, 강학당(講學堂), 문성공묘(文成公墓), 장서각(藏書閣), 직방재(直方齎)와 일신재(日新齎) 그리고 學求齋(학구재)와 至樂齋(지락재)까지 알뜰하게 그려 놓았다. 열 폭 그림 중에 가장 힘을 들인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강학당보다 문성공묘를 더 크고 우뚝하게 그려 놓았다. 무슨 의미일까?

소수서원은 우리나라 대표의 서원이다. 선비정신의 출발지이다. 그리고 ‘소수(紹修)’는 ‘이미 무너진 학문을 다시 이어서 닦는다.’는 의미의 ‘기폐지학 소이수지(旣廢之學 紹而修之)’에서 따온 말이다. 여기에 우리나라 서원의 출발과 조선 선비들이 할 일이 담겨 있다. 또 여기에 고려를 되살리려던 안향의 정신이 집약되어 있다고 할 수 있지 않을까?

안윤홍은 병자년 가을에 죽계산방에서 이런 생각을 했을 런지 모른다.
‘중국이란 대국이 아편전쟁에 패하고, 난징조약을 맺으며 수치스러운 개항을 한다. 하지만 그들은 태평천국운동과 양무운동을 펼치며 나라를 바로 세우려고 했다.’
1936년이든, 1876년이든 어려운 시국이다. 그래서 안윤홍은 이 그림을 그린 것이 아닐까? 선조들의 정신을 되새기며 나라를 지켜나가자고….

하한정(夏寒亭)
하한정은 소고(嘯皐) 박승임(朴承任) 아들 녹(鹿)에게 시켜 지은 정자라고 전해진다. 그 이름은 “넓은 들을 바라보고 긴 강을 앞에 두어 상쾌하고 양명(陽明)하므로 더운 여름에도 항상 청량(淸凉)하다.” 하여 하한정(夏寒亭)이라 지었다고 한다. 그리고 ‘한정마을’이란 마을 이름도 이 정자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하지만 지금 하한정은 없다. 나라를 잃고 한창 어려웠던 일제 초기인 1910년대에 허물어져 버렸다고 전해진다. 그래서 이 병풍 그림이 1936년이 아니라 1876년이라고 추정하게 되었다. 그 후 1938년 이 정자가 있던 아래에 삼락당(三樂堂)을 건립하였다고 한다. 삼락당 앞에는 오랜 향나무가 있다. 이 향나무는 박승임이 말을 매던 나무라고 하니, 500년 가까이 마을을 지켜 온 셈이다.

마을 뒷산이 그림과 너무 똑 같다. ‘산천은 의구(依舊)한데, 인걸은 간 데 없다.’라는 말이 새삼스럽다. 하지만 후손들은 선조의 정신을 지키며 살아간다. 삼락당(三樂堂)은 박승임(朴承任)의 손자인 박종무(朴從茂)의 호이며, 가르침이다.최락(最樂, 선을 행함은 낙으로 한다.), 지락(至樂, 평생의 즐거움은 독서이다.), 역락(亦樂, 만족을 아는 자는 빈천해도 또한 낙이다.)를 실천해오고 있다.

금선정(錦仙亭)
금선정은 조선 정조 5년 군수 이한일(李漢一)이 금선대(錦仙臺) 위에 세운 정자인데, 물가에 병풍처럼 드리운 큰 바위 위에 선녀처럼 앉아 있다. 교통편이 발달하지 않았던 시절엔 이곳은 희방계곡과 함께 영주 최고의 명승(名勝)이었다.

길게 이어진 아름드리 소나무 아래로 제마다의 모양을 뽐내는 바위와 그 사이를 굽이쳐 흐르는 물줄기 따라 불어오는 골바람. 삼가리 저수지가 만들어지기 전에는 이 계곡이 비로사까지 10리가 넘게 이어졌다고 하니 그 장관이 상상이 되지 않는다.

이곳 뒷산 기슭에 금계(錦溪) 황준량(黃俊良)이 독서를 하던 금양정사(錦陽精舍)가 있다. 금계(錦溪)는 여기를 거닐며 수양하였다고 한다. 하지만 그는 스승인 퇴계보다 일찍 타계(他界)했다. 그래서 퇴계는 손수 행장을 썼다.

“죽령의 밑 금계의 위에 돌아가고자 그 곳에 두어 칸 집을 지어 금양정사라 이름하고 책을 쌓아 도를 궁구(窮究)하는 자리로 삼고 독실하고도 학문을 좋아하는 의지로 심신을 침착하게 하여 수양하려 하였는데 이 뜻을 이루지 못하고 갑자기 죽으니 안타깝다. - 중략 - 슬프다. 금계여! 한 번 가면 돌아오기 어려우네. 끝이 났네. 끝이 났네. 슬프고, 슬프도다.”

예부터 ‘누(樓)’와 ‘정(亭)’은 문화를 나누는 곳이었고, 교육의 장소였다. 아마도 옛 선비들은 이곳에서 퇴계와 금계를 기리면서 그들의 학문과 성품을 배우고자 했을 것이다.

구학정(龜鶴亭)
구학정은 백암(柏巖) 김륵(金륵)이 건립하였다. 동으로 구산(龜山)을, 남으로 학가산(鶴駕山)을 바라보는 자리에 있어 구학정(龜鶴亭)이라 했다고 한다. 이 자리를 흔히 서구대(西龜臺)라고 하였다. 예전엔 서천(西川)을 앞에 두고 동귀대와 마주보고 있었다. 하지만 1961년 수해(水害)로 물길을 돌려 아름다웠던 옛 모습은 찾아 볼 수 없다.

위치는 영주2동사무소 뒤쪽이다. 그리고 20여년 전만하여도 구학정(龜鶴亭)과 그 후손들이 건립한 공(公)의 묘우(廟宇)와 종택(宗宅)만은 고색창연(古色蒼然)한 그대로 있었다. 하지만 종택은 없어지고 정자는 삽재 너머 문단리로 이건하였다. 현재 그 자리엔 대순진리회 영주회관이 들어서 있다.

예전엔 구학정 뒷산이 영주예술문화회관이 있는 곳으로 산줄기가 이어져 있었다. 그래서 서천(西川) 물길은 굽이를 돌아 구산(구성공원)에 부딪혀 동구대와 서구대 사이로 흘렀다. 하지만 영주대홍수로 시가지가 물속에 잠겨 산맥(山脈)을 잘라 수로(水路)를 돌리고 말았다.
서구대엔 신라 소지왕과 벽화낭자의 사랑이야기가 담긴 무신탑(無信塔)이 있었다고 삼국유사에 전해 온다.

반구정(伴鷗亭, 返舊亭)
반구정엔 두 개의 현판이 있다. ‘반구정(伴鷗亭)’이고 또 하나는 ‘반구정(返舊亭)’이다. 원래는 ‘옛날로 돌아가자’는 ‘返舊’였다. 하지만 ‘갈매기와 짝하자’는 ‘伴鷗’로 바꾸었다고 한다. 사복재(思復齋) 권정(權定)은 고려말 절신(節臣)이었다.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정신으로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여 반구정(返舊亭)과 봉송대(奉松臺)를 세우고 은둔(隱遁) 하였다고 한다. 봉송(奉松)이란, 송도(松都) 즉 개성을 받든다는 것이다. 그런데 후손들이 화가 미칠까 두려워 바꾸었다고 한다. 그리고 봉송대에서 구성공원 아래로 난 길을 따라 반구정 쪽으로 가다 보면 암벽에 새긴 불사이군(不事二君)이란 글을 볼 수 있다.

병풍그림에서 동구대 아래로 강물이 흐르는 옛 모습을 볼 수 있다. 그런데 동구대 위에 봉송대가 보이지 않고, 반구정 옆에 보이는 집이 초가이다. 그 모습은 아래의 사진(1930년 촬영)에서도 서천을 넘는 다리(영교)와 함께 확인할 수 있다. 그리고 현재의 사진(2014년 영주상공회의소 옥상에서 촬영)에는 봉송 앞으로 철로가 있다.

희방폭포(喜方瀑布)
10경 중에 유일하게 산수(山水)를 지정한 것이다. 힘차게 떨어지는 물줄기가 하늘을 뚫고 내리는 듯하다. 선비들은 이 한결같은 물줄기를 보며 무엇을 생각했을까? 당당함이었을까, 두려움의 극복이었을까?

선비들의 사랑을 받았던 이곳은 1933년 대구일보사가 선정한 영남팔경 중 하나가 되어 그 명성을 굳건히 한다. 그때 함께 선정된 곳은 진남교반, 문경새재, 주왕산, 금오산, 청량산, 보경사 청하골12폭포, 빙계계곡 등이다.

희방폭포 위에는 신라 선덕여왕 창건한 희방사가 있다. 두운대사(杜雲大師)에 대한 호랑이의 보은(報恩)이 담긴 연기설화(緣起說話)가 유명하다. 하지만 안타깝게도 옛 모습을 볼 수가 없다. 6.25전쟁이 일어나기 직전에 불타버렸기 때문이다. 그런데 더 안타까운 것은 그 때 우리나라 최고의 보물이 함께 타버렸다는 것이다. 희방사에는 세조 때 만든 훈민정음(訓民正音) 언해본(諺解本) - 월인석보(月印釋譜) 판목(板木)이 보관되어 왔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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