글. 김태환 (영주향토사연구소장)

▲ 400년 이어온 영주 선비들의 모임 부용계(芙蓉契)
영주 부용계(芙蓉契)는 일명 ‘사마계(司馬契)’라고도 하는데 500여년 전 영주 사마소(司馬所)의 사마회(司馬會)에서 연원을 알아볼 수 있다. 영주 사마소(司馬所)는 영주지역 사마시(司馬試 생원, 진사시) 출신의 젊은 학자들이 상호간의 친목과 학문·정치 토론 및 교육활동 등으로 향촌의 교화와 지방행정의 발전을 위해 설립되었다.

사마소는 연산군 무렵에 지방 원로들로 구성되었던 지방 자치 기구인 향소(鄕所), 혹은 유향소(留鄕所)에 맞서 조직된 사설 기관으로 그 세력이 점점 커지면서 많은 폐단을 빚어오다 1573년(선조 6) 서애 유성룡(柳成龍)의 건의로 혁파되었다.

영주 사마소는 혁파되고 난후 그 곳에 사계서당(泗溪書堂) 현판이 달렸는데 이 사계서당은 지금의 남간서당(南澗書堂)의 전신이다. 하지만 영주의 사마소(司馬所)가 언제 설립되고 사마계가 언제 창계(創契)한지는 알 수 없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 1723~1801)의 ‘부용계회첩서(芙蓉契會帖序)’에는 “향사중에 사마시에 합격한 자들로 구성된 사마회(司馬會)가 있는데 이들이 군치 서쪽 부용대(芙蓉臺)에서 한번 회합을 한다.”고 기록하고 있다. 이는 부용계(芙蓉契)가 사마회(司馬會)에서 출발했다는것을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이다. 아마 이 영주 사마회(司馬會)가 부용대(芙蓉臺)에서 개최됨으로 그 대(臺)의 이름을 가지고와 계(契)의 명칭을 부용계(芙蓉契)로 했던것 같다.

▲ 사수(泗水)를 앞에 두고 부용대(芙蓉臺)와 붕래정(朋來亭)을 세우다
황암(篁巖) 김진하(金鎭河 1786〜1865)는 ‘부용대속회첩기(芙蓉臺續會帖記)’에서 부용대가 위치한 곳이 ‘망궐리(望闕里)이고 앞의 물이 사수(泗水)’라 했으니 이는 중국의 공자(孔子)가 태어난 궐리(闕里)와 사수(泗水)의 지명과 같으니 이 지명들을 통해 영주 선비들은 공자의 학문과 사상을 이어 받고자 했다.

이 사수(泗水)와 궐리(闕里)라는 지명에는 ‘추로지향(鄒魯之鄕 공자와 맹자의 고향) 영주’를 꿈꾸고 이를 실천하려 했던 영주 선비들의 의지가 강하게 담겨 있다. 부용대(芙蓉臺)와 붕래정(朋來亭)은 영주 부용계의 터전이었다. 먼저 부용대는 영주 서쪽 5리 고청산(高靑山 지금의 서천 인공폭포 뒷산) 남쪽 기슭에 있었던 대(臺)이다. 또 부용대 동쪽에는 붕래정(朋來亭)이 있었는데 일명 북정자(北亭子)라 부르기도 했다.

퇴계(退溪) 선생은 영주의 사마(司馬)들이 회합하는 정자에 이름이 없었는데 그 정자 이름을 붕래정(朋來亭)이라 하고 서쪽 대(臺)를 부용대(芙蓉臺)라고 이름을 지어주고 시회(詩會)를 주최하였으니 그 유서의 깊고 넓음이 남다르다고 하였다.

▲ 유상곡수(流觴曲水)의 풍류로 창계(創계)하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의 부용계(芙蓉契)의 창계(創계)에 대하여 “1573년(선조 6) 선조(宣祖) 신축년(1601, 선조 34)에 이르러 중수(重修)해서 계(계)를 만들었다.”고 하였다.

결국 부용계(芙蓉契)는 1509년(중종 4)에 사마소(司馬所)에 그 뿌리를 두고 1555년(명종 34) 퇴계(退溪) 선생이 고을의 여러 선배들과 명사들과 함께 이곳 부용대에서 시회(詩會)를 개최하는 등 모임을 주도해 왔다. 그후 1573년(선조 6) 조종의 금지로 폐하였다가 1601년(선조 34)에 이르러 중수(重修)해 계(契)가 만들어 졌다는 것을 알 수 있다.

부용계(芙蓉契)에는 추로지향(鄒魯之鄕) 영주를 꿈꾸었던 영주 선비들의 애향, 애민, 그리고 풍류 정신이 녹아 있다. 영주 부용계는 중국 회계산(會稽山) 난정(蘭亭)의 풍류를 가져왔다. 일찍이 중국 동진(東晉)의 왕희지(王羲之)는 영화(永和) 9년 계축(癸丑 353년)에 회계산(會稽山) 난정(蘭亭)에서 유상곡수(流觴曲水 : 흐르는 물에 술잔을 띄워 보내면 그 술잔을 받은 사람마다 시를 지어 화답하는 놀이)와 일영일상(一詠一觴 : 때로는 술을 마시고 때로는 시가를 읊으며 세상을 즐긴다는 말)하며 풍류를 즐겼다.

영주의 부용계(芙蓉契)도 이 회계산 난정의 풍류를 되살려 지역의 향풍(鄕風)을 바로 잡고 어른을 공경하며 선비의 기상을 드높이고자 하였다. 중국의 회계산에 난정이 있어 그 풍류를 즐겼다면 이곳 영주에는 고청산(高靑山)에 붕래정(朋來亭)과 부용대(芙蓉臺)가 있어 옛 풍류를 이어 왔다.

▲ 부용계(芙蓉契) 선비정신으로 다시 일어나다
그후 부용계가 어떤 형태로 어느 시기까지 진행되었는지 알수없으나 다만 130여년후 정범조(丁範祖)의 ‘부용계회첩서(芙蓉契會帖序)’에 정범조가 풍기 군수(豊基郡守)로 부용계(芙蓉契)에 참석했다고 하니 그는 1774년(영조 50)~1775년(영조 51)간 풍기군수로 재임하였으니 이 시기에 부용계(芙蓉契)의 회합이 있었다고 볼 수 있다.

또한 다시 정범조 이후 약 80년후인 1853년(철종 4)에 다시 계(契)가 개최되는데 이는 황암(篁巖) 김진하(金鎭河)의 ‘부용대속회첩기(芙蓉臺續會帖記)’와 성암(星庵) 박종후(朴宗후)의 ‘부용대속회서(芙蓉臺續會序)’에 잘 나타나 있다. 이 회합후 부용계는 문헌상에서 보이지 않다가 약 120년후 1970년「崇禎 元年 丙子 八月 初六日 芙蓉契題錄」이 부용계의 후손 집에서 발견되면서 세상에 다시 나타났다.

이 서류에는 1636년(인조 14) 음력 8월 6일 영주 고을에 사는 선비들 중 사마시(司馬試)에 합격한 진사(進士) 27인과 생원(生員) 28인 도합 55명이 부용대에 모여 회원간의 친목을 다지기 위하여 ‘부용계(芙蓉契)’의 중수(重修) 회합을 가졌다는 기록이다.

이 문서가 발견되면서 관련 문중 후손들이 옛 조상들의 유덕을 기리기 위하여 다시 계(契)를 속회(續會)하여 이어오다가, 1995년 구성공원(龜城公園) 가학루(駕鶴樓) 옆에 '부용계기념비(芙蓉契紀念碑)'를 세우고 매년 음력 8월 6일에 추모 행사를 지내오고 있다. 부용계는 1601년(선조 34)에 창계(創契)하여 수차에 걸쳐 속계(續契)를 거듭해왔는데 올해로 창계(創契) 한지 415년이 되었다.

▲ 영주선비의 뿌리 부용계(芙蓉契) 선비정신을 실천하다
해좌(海左) 정범조(丁範祖)는 ‘부용계회첩서(芙蓉契會帖序)’에서 “부용계첩(芙蓉계帖)’을 보니 입의(立議)와 조례(條例) 및 계인(계人)의 성명이 개략적으로 기록되어 있는 것을 보았다.”고 하였다. 그 내용을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먼저 ①신약((信約)을 강(講)하고, ②풍속(風俗)을 권면하고, ③재상(재喪)을 구휼(救恤)하고, ④동몽(童蒙)을 가르치며, ⑤또 군정(郡政)의 득실을 논하였으니 ⑥연회(宴會)로써 향속(鄕俗)을 두텁게하고 ⑦준조(樽俎)로써 교화를 펴는 등 7가지이다.

이렇듯 영주 부용계(芙蓉契)는 지난 수 백년간 태평한 시대를 맞이하여 서로 친목과 학문·정치 토론 및 교육활동 등으로 향촌의 교화와 지방행정의 발전에 크게 기여하였다. 또한 조선시대 임진왜란(壬辰倭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 이인좌(李麟佐)의 난(亂) 등 국가의 위란때 마다 의병(義兵)을 조직하여 위란(危亂)으로부터 나라를 구하고 절의(節義)를 지키는 등 선비의 고장 영주의 위상을 드높였다.

이런 부용계(芙蓉契)의 활동은 근 현대 그 후손들에게 이어져 구한말 소백산 등지에서 의병항쟁(義兵抗爭)의 불길로 올랐으며 ‘일제 식민통치하에서는 독립운동(獨立運動)을 주도적으로 이끌었으며’ 해방후 한국전쟁(韓國戰爭)과 조국 근대화에 앞장서 왔으며 선비의 고장 영주의 자존심을 지키며 영주 발전의 구심체로 부용계(芙蓉契)의 정신을 이어 오고 있다. 이밖에도 많은 부용계원(芙蓉契員)들이 대과(大科)를 거쳐 국가 발전에 크게 이바지 하였으며 향촌사회의 구심으로 수 백년간 그 역활을 감내해 왔다.

이 시대 다시 부용계(芙蓉契)를 생각한다
영주 부용계(芙蓉契)는 영주 사마회(司馬會)에 그 뿌리를 두고 지난 400여년 전에 추로지향(鄒魯之鄕)을 꿈꾸며 창계(創契)하였다. 부용계원들은 부용계(芙蓉契)의 터전이 되었던 부용대(芙蓉臺)가 위치한 곳의 물을 사수(泗水)라하고 마을을 궐리(闕里)라 했으니 공자(孔子)의 고향인 중국 사수(泗水)와 궐리(闕里)를 이곳으로 옮겨 놓고 영주를 공자(孔子)의 고향인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삼아 학문을 숭상하는 유학의 본거지로 삼고자 하였다.

또한 부용계는 중국 동진(東晉) 왕희지(王羲之)의 회계산(會稽山) 난정(蘭亭)의 풍류를 되살려 선비들의 유상곡수(流觴曲水)와 일영일상(一詠一觴)하던 멋과 풍류를 즐길 줄 알았다. 특히 이곳 부용대는 퇴계(退溪) 선생이 대(臺)와 정자(亭子)의 이름을 짓고 시(詩)를 읊으며 거닐던 곳으로 이후 남계(南溪) 금축(琴軸)과 유연당(悠然堂) 김대현(金大賢)이 서로 앞뒤를 이었으니 추로지향(鄒魯之鄕) 영주의 아름다운 발자취로 수 백년간 이어져왔으니 부용계야 말로 선비의 고장 영주의 자랑이었다.

이제는 퇴계 선생이 직접 써준 ‘부용대(芙蓉臺)’ 그 글씨와 대(臺)와 정자(亭子)는 사라지고 없지만 선인들이 추구하던 부용계(芙蓉契) 정신은 그 후손들에 의해 영구히 이어져 선비의 고장 영주를 추로지향(鄒魯之鄕)으로 만들어 가고 있다. 우리는 앞으로 이 부용계(芙蓉契)의 정신이 영주 선비 정신으로 나가 한국의 시대정신으로 계승, 발전할 수 있도록 최선의 노력을 다해야 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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