6.25 53주년 기념일에 만난 미망인 민차희씨

"우리 마을에서 12명의 젊은이가 차출되어 갔는데 2명만 살아오고 모두 전사했어요. 그 전사자중에 우리남편이 끼어 있었습니다."

지난 25일 시민회관에서 있은 영주시재향군인회가 주관한 6.25전쟁 제53주년 기념식장에서 전몰군경 미망인회 포상을 받은 민차희(75)씨를 만났다.

"그 당시 제가 22살이였으니 그 양반은 23살이였어요. 나라가 위급하여 부르는데 백성된 도리로 어찌할 수 없잖아요. 첫돌 지난 아들을 바라보면서 못내 아쉬워하던 그이의 얼굴모습이 지금도 아른거립니다."

눈물로 지냈던 그 많은 세월에도 아직 눈물이 남았던지 민씨의 눈망울에는 벌써 이슬이 맺히면서 하얀 소복으로 단장한 옷고름에 눈물을 찍어낸다.

그녀는 16살에 결혼을 했다. 아이가 없어 걱정하던 차에 조금 늦게 아들을 얻자 온 집안은 축하분위기에 들떠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잠시 뿐이었다. 1950년 6.25일 북한 공산정권의 김일성이 스탈린의 사주와 모택동의 지원 하에 기습적으로 38도선을 돌파 남침한 것이다.

"서울이 북한기습 3일만에 함락되었지요. 그럴 수밖에요. 북한은 소련제 전차와 최신예 장비로 중무장하여 치밀한 사전계획에 의한 전쟁을 도발하였으니까요. 그러니까 6.25전쟁은 우연한 사건이 절대 아닙니다."

그 당시 우리 남한의 군사력은 열악하기가 그지 없었다. 2차대전 당시 미군이 사용하던 노후화 된 무기였고 전차나 대전차가 전무한 상태였으며 한국군은 겨우 국경이나 경비하고 내부 치안이나 유지할 수 있는 경 장비뿐이므로 그야말로 맨주먹이나 다름없었다.

낙동강을 마지막으로 최후 방어선을 구축했다. 더 물러설 곳도 없다. 국군과 유엔군은 적의 공격을 결사적으로 방어하고 재정비하여 필사적으로 반격을 위한 준비를 갖추는 한편 인천에서는 맥아더 장군의 인천상륙작전을 통해 적의 후방을 차단하여 전세를 역전시키는 계기를 만들었다.

"이제 이겼다 생각했지요. 우리 군은 38도선을 넘어 계속 북진을 했답니다. 그러나 이게 웬일입니까? 생각지도 못한 일이 벌어졌습니다. 1백만 명의 중공군이 개미떼처럼 밀고 내려와 국군과 유엔군이 후퇴하지 않을 수 없게 되었는데 이때 저의 남편이 나라에 부름을 받은 것입니다."

그녀의 남편은 강원도 철원전투에 참가하게 되었는데 8사단 21연대에 배치받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났는데도 소식이 없었다.

" 애를 태우고 있던 어느 날 기다리던 남편은 오지 않고 전사통지서가 날아 왔습니다. 설마 살아있겠지 하고 생각하며 5년이나 기다렸는데 이 무슨 청천병력입니까"

 그녀는 전사통지서를 받아들고는 "아이는 무슨 영문인지도 모르고 "엄마 울지마" 하다가 제가 계속 울기만 하니까 어린 자식도 엄마 마음을 아는지 함께 부등켜 안고 실컷 울었다"며 당시 일을 회상했다.

그로부터 그녀는 시집가는 것과 도적질하는 것 빼고는 안 해본 것이 없었다고 한다. 방물  장사를 시작으로 그의 한 많은 인생여정이 펼쳐진 것이다. 보따리에 옷감을 싸 머리에 이고 이 동네 저 동네를 다니면서 입에 풀칠을 겨우 면하게 됐다.

"아들이 자라 고등학교를 졸업하자마자 월남 군에 지원 입대했습니다. 공산군을 무찔러 아버지원수를 갚겠다는 것이였습니다. 저는 말리지 않았지요. 그런데 이상하게도 머리털 하나 상하지 않게 잘 싸우고 돌아왔어요. 아마 하늘나라에 있는 남편이 지켜 주었나 봅니다."

현재 관사골 영광여중 앞에 혼자 외롭게 살고 있는 민 씨는 "어서 속히 통일되어 남과 북이 자유롭게 왕래하는 날이 오기만을 손꼽아 기다린다"고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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