학술대회 발표문 요약

우리 영주지역은 전통문화의 요람이자 선비정신이 살아 숨쉬는 고장이다. 순흥지역의 어숙묘등 고대분묘는 이러한 지역민의 자긍심의 뿌리를 더욱 튼튼히 하고 있다.


소수서원과 부석사 등 유명문화재에 대한 학술 연구나 발표들은 여러 차례 있어 왔지만 우리지역의 고대문화를 새롭게 깨우치고 정립하는 학술대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이에 본지는 주최측으로부터 미리 자료를 받아 각 교수진들의 연구물을 요약해 게재한다.

이번 학술대회는 20일 오후1시 30분부터 6시까지 동양대학교 인문사회과학관 세미나실에서 열리며  '경북북부지역 유적조사의 성과와 과제'란 주제의 임세권 교수(안동대)의 기조발제가 이루어지고 김현숙 박사(경북대)의 '고대 시기 영주, 순흥 지역의 역사변천과 재지세력의 동향',강종훈 교수(대구가톨릭대)의 '신라 김씨 족단의 발상지로서의 영주', 이한상 교수(동양대)의 '분묘자료로 본 5-6세기 영주의 위상', 강현숙 교수 (동국대)의 '영주지역 벽화고분 연구시론' 등의 주제발표가 이루어진다.

 종합토론으로는 이강승 교수(충남대), 송기호 교수(서울대), 김용성 연구원(영남대), 안재호 교수(동국대), 권오영 교수(한신대), 이해련 연구사(부산박물관), 이재현 연구원(부산대) 등이 참여할 예정이다.

▲경북 북부지역 유적조사의 성과와 과제.....임세권(안동대 교수)

  조사 현황
경북북부지역에서의 유적조사는 2단계로 구분된다. 먼저 1960-70년대의 경우 불교미술자료를 중심으로 조사와 연구가 진행되었으며 학술적인 성격이 강한 반면 80년대 이후의 조사의 경우 지역개발에 따른 구제발굴의 성격이 강하였다.


 지역의 중요성에 비한다면 조사의 절대적인 부족과 그에 따라 문화적 공백지대로 비추어질 수도 있다. 그러나 한국역사에서 차지하는 이 지역의 위상은 결코 작지 않다.

그간 이 지역의 문화유적은 주민들의 무관심과 행정당국의 소극적인 행정에 밀려 크게 훼손되고 있으며, 그에는 학술조사인력의 절대적인 부족도 중요한 원인이 될 수 있다.

  조사의 방향과 과제
 앞으로는 구제조사 뿐만 아니라 순수학술조사를 통하여 경북 북부지역의 역사적 문화적 정체성을 밝혀내야 할 것이다.

 가장 시급한 일은 유적에 대한 정밀한 지표조사이다. 현재 문화재청의 사업으로 진행되고 있는 문화유적지도의 제작은 나름대로 상당한 의미가 있지만, 한정된 예산과 기간으로 정밀성에는 문제가 있을 수 있다. 이러한 조사는 해당지역에 연구기관과 인력이 상주하여 장기간에 걸쳐 하지 않으면 실효가 없기 때문에 지역의 대학과 자치단체가 협조하여 장기적으로 계획을 세우고 실시하여야 한다.

 그간 연구를 주도한 안동대학교 뿐만 아니라 최근 영주의 동양대학교와 안동의 국학진흥원이 설립되어 연구인력이 확보되는 추세에 있으므로 앞으로의 유적조사가 보다 정밀한 학술적 차원에서 이루어질 수 있으리라는 기대를 걸 수 있게 해준다.

▲고대 시기 榮州·順興 지역의 역사변천과 在地勢力의 동향....김현숙(경북대 영남문화연구원 연구원)

  고구려의 지배를 받은 순흥
  이 지역은 400년을 전후하여 481년경까지 고구려의 지배를 받았다. 당시 고구려의 급벌산군이었던 순흥은 인접해 있는 풍기, 부석, 봉화, 예안 등을 영현으로 두고 관할했다. 5세기 중반 경까지는 고구려로부터 신라로 물자와 사람, 문화를 전해주는 매개지로서의 역할을 했다.


  고구려군이 물러간 이후 6세기대에는 한반도 중부지역으로의 진출을 도모하는 신라의 전진기지로서 비중있는 역할을 담당하기도 했다. 진흥왕이 단양을 지나 한강유역으로 진출하게 되는 6세기 중반 경까지 50년 가까운 기간 동안 죽령이 고구려와 신라의 국경선으로 기능할 때 순흥을 비롯한 일대는 최전선이자 최후 방어선이었다.

  신라의 전초기지가 된 영주
  이 지역은 이른 시기에 일시적으로 백제의 영향권 아래 들어간 때를 제외하고는 줄곧 신라 영역으로 남아 있으면서 고구려의 남하를 막는 보루이자 전초기지로서의 기능을 수행했다. 그리고 이 지역민들은 신라가 경북 북부지역에 남아 있던 고구려 세력을 완전히 축출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을 것이다. 따라서 신라 중앙정부측에서도 영주에 대해 지대한 관심을 가지고 있었다.

  아마도 이 지역이 신라사에서 담당하는 역할에 상응하는 시혜도 베풀었을 것이다. 다른 지역과 달리 영주지역의 경우에는 재지세력의 존재를 보여주는 사료가 상대적으로 많이 남아 있는데, 그 이유도 이런 점에서 찾을 수 있을 것이다.

** 고구려군의 죽령이남 군현지배설.(5세기대 : 영주와 순흥이 신라와 고구려의 경계)
    강종훈, 이한상, 강현숙 교수(죽령이 오랫동안 양국의 경계)와는 차이를 보임

▲신라 김씨 족단의 발상지로서의 영주.....강종훈(대구가톨릭대 교수)

  영주지역과 신라왕실의 인연
  파사왕대 이후 영주지역에 대한 기록은 다른 지역에 비하여 상대적으로 많다. 이러한 관심과 인연은 곧 삼국통일전쟁이 막바지로 치닫던 676년 2월에 신라 화엄종의 중심 사찰인 부석사가 이곳에 창건된 배경이 되기도 하였다.


 소지왕은 몇 회에 걸쳐 영주지역을 방문한 것으로 기록되어 있는데 그것은 '벽화'라는 여인에 대한 관심이나 군사적인 측면 뿐만 아니라 영주지역과 신라왕실의 인연 때문일 것이다.

지금의 영주시 중심부에도 신라 왕과 관련한 기록들이 전하는데, {신증동국여지승람}에 의하면, 군의 서쪽 2리에 '市肆基'라는 유적이 남아 있다고 하면서 이곳은 신라 왕이 오랫동안 머물다가 돌아간 곳이라는 설명을 붙어 있다.

  영주에 설치된 나을신궁
  나을은 영주의 고지명인 날이, 내령군과 같은 말이며, 신궁은 김씨족단의 시조인 태조성한을 제사하기 위한 시설이다.

  소지왕대에 신궁을 짓게 된 것은 아마도 당시 점증하던 고구려로부터의 군사적 압박을 김씨 왕실의 시조에 대한 새로운 제사 체계의 편성을 통해 극복하고자 한 것이 중요한 이유가 아니었을까 한다. 더욱이 그 시조의 탄생지는 경주가 아니라 접경 지역이라고 할 수 있는 영주 지역이었으므로, 이곳에 신궁을 설치함으로써 국가 수호의 굳은 의지를 내외에 표방하면서 김씨 족단 지배층의 결속력을 제고시키려 했던 것이 아닐까 싶다.

** 나을신궁을 경주 나정으로 보지 않고 영주로 보는 새로운 견해

▲분묘자료로 본 5∼6세기대 영주의 위상 ... 이한상(동양대 교수)

  순흥 읍내리분묘군의 분석 결과

1. 벽화묘의 연대는 6세기 후반대 이후로 보아야 함.(470년대, 530년대설 문제 있음)
   이 분묘군에서는 횡구식석실묘가 먼저 만들어지고 이어서 횡혈식석실묘로 대체되었다. 이중 2기의 횡구식석실묘는 당시 신라의 지방에서 폭넓게 유행하던 묘제이고 내부에서 금귀걸이 등 경주산 장신구가 출토되고 있어 신라적인 문화양상을 보여준다.


  가장 먼저 축조된 14호묘는 5세기 중엽, 나중에 축조된 5호묘는 5세기말에서 6세기초로 편년할 수 있다. 특히 이 무덤은 추가장이 이루어졌기 때문에 6세기전반이 하한연대가 될 것이다.

  이보다 늦은 시기에 축조된 횡혈식 석실묘는 6세기 후반 이후에 축조된 것으로 보아야 한다.

2. 영주, 순흥의 정치적 귀속문제 : 고구려 지배설 문제 있음.(신라의 변경지대)
  4기의 횡혈식석실묘는 구조로 보아 충효동분묘군 등 경주의 석실묘와 매우 유사하다. 다만 벽화라는 소재는 비신라적이어서 기존의 견해처럼 고구려의 문화전통과 연결지을 수는 있지만 무덤의 주인공까지 고구려인으로 특정짓기는 어려울 것 같다.

  위의 편년관처럼 이미 5세기 중엽 경에는 신라의 문물이 이입되고 있고, 기록에도 5세기 전반경 영주지역은 신라에서 차지하는 위상이 매우 높기 때문에 영주에 인접한 순흥을 고구려군이 지배했다고 보기는 어렵다.

3. 5∼6세기대 영주의 위상
  읍내리에 분포하는 횡구식석실묘의 규모나 금제 장신구로 보면 5∼6세기대 영주지역은 신라의 입장에서 보면 매우 중요하게 인식한 곳이었다. 그것은 이 지역이 죽령을 경계로 고구려와 접경하고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이 지역세력의 협조가 신라의 국경유지에 반드시 필요했던 것 같다.

▲영주지역 벽화고분 연구시론.......... 姜賢淑(동국대 교수)

  영주지역 벽화분의 구조적인 특징
  첫째 무덤방이 횡장방형이고 널길이 왼쪽에 치우쳐 있다.
  둘째 목관없이 시신을 무덤 속에 직접 안치한 무덤이며 여러 사람을 함께 매장하는 장례방식을 보인다.


  이러한 점은 통일기 신라의 무덤과 동일하다. 물론 어숙묘에 보이는 장막(帳幕)흔적이나 읍내리벽화분의 석상(石床)은 고구려에서도 관찰되는 시설이기도 하다.

  전체적으로 보면 영주지역 벽화분의 구조나 장속은 고구려보다는 통일기 신라와 특징을 더 많이 공유하고 있어 이 무덤의 주인공은 신라였을 개연성을 보여준다.

  벽화로 본 무덤의 주인공 : 고구려 출신으로 신라인이 되다.
  묘실벽화는 영주지역이나 고구려 모두 생활풍속도계열 벽화분이며, 화면 처리나 무덤 내부 전면을 화면으로 사용하였다는 점에서 고구려와 영주지역의 두 벽화분은 공통된다. 그러나 영주지역 벽화분은 화면구성이나 화제의 위치에서 고구려 생활풍속도계열 벽화분의 전형에서 벗어나 있어 영주가 고구려 영역 하에 있었던 시기에 축조되지 않았을 것으로 추정된다.

  따라서 두 무덤은 신라가 영주지역으로 진출한 후에 축조되었으며, 그 시기는 읍내리 벽화분은 539년, 순흥 어숙묘는 595년 경으로 비정된다.
  결국 영주지역 벽화분은 고구려계 신라사람의 무덤으로 추정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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