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모두가 기적이 아니고는 살기 힘들다고 했어요”

"아마 저만큼 전투를 많이 한 사람도 그리 많지 않을 겁니다. 그 많았던 전투 중 휴전 협정을 1주일 남겨 둔 상태에서 부상당했던 그때 상황을 그대로 글로 표현했을 뿐입니다."

6월 호국 보훈의 달을 맞이해 국가보훈처가 전 국민을 대상으로 실시한 보훈문예물 현상공모에서 우수상을 수상한 강문규씨(75.가흥1동)의 말이다.

그는 국가 유공자의 숭고한 위국 헌신 정신과 충정을 기리기 위한 뜻으로 실시된 이번 공모전에서 '참전수기부분'에 응모 "생사를 건 전우애"란 글로 이번 영광을 안게 된 것이다.

강 씨는 강원도 영월에서 태어났다. 그의 호탕하고 남자다운 기질은 이미 어릴 때부터 동네에서도 정평이 났다. 불의와 타협할 줄 모르고 언제나 정의 편에서 말하고 행동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거의 영주시 부석면 북지리에서 보내게 된다. 6.25사변이 끝난 51년 11월, 그는 육군으로 징집돼 제주도 훈련소에서 집중훈련을 받은 뒤 강원도 인제에 있는 전공대로 가게 된다.

"전공대란 전차 공격대란 말인데 가 보니 전차는 단 한 대도 보이질 않더군요. 편성만 돼 있지 거의 운영은 안하고 있었습니다. 물자가 열악한 그때 상황을 말해주는 한 부분이죠."

얼마 있지 않아 8사단 21연대 50수색중대에 편성된 강 씨는 드디어 본격적인 전투에 배치된다.

"우리 중대는 주로 적을 교란하는 임무였지요. 또한 전방을 수색하고 적진을 소란하게 하기도 했고요. 53년 휴전협정이 될 때까지 치열한 교전이 하루도 거르는 날 없이 매일 계속 되었습니다."

그는 50여 년도 지난 당시의 전투상황이 아직도 생생한 듯 계속 말을 이어갔다.

"휴전이 53년 7월27일이였으니까 꼭 일주일 뒤인 7월20 일에 부상당했어요. 그러니까 강원도 금화지구 전투 때였습니다. 적과(중공군) 대치하여 한참 교전이 이루어지고 있는데 수류탄이 날라 왔어요. 순간적으로 떨어진 수류탄을 집어 던지려는 순간 "꽝"하는 엄청난 소리와 함께 천지가 까마득하게 느껴짐과 동시에 온 전신이 피투성이가 되어버렸습니다."

그는 샘물처럼 솟아오르는 피를 바라보며 "이젠 죽었구나"하고 산 아래 도로까지 필사적으로 몸을 굴려 내려갔다고 한다. 그의 몸은 피범벅으로 이미 만신창이가 되어 버렸고 정신마저 가물가물해 도저히 혼자 힘으로 살 수 있다는 것은 불가능했다.

그의 머리에는 희미하게나마 개미 떼처럼 새까맣게 기어오르던 중공군을 향해 발사하던 기관총, 총구가 벌겋게 달아 총알이 나가지 않자 수통에 물로 식혀가며 쏘고 또 쏘았다. 이젠 수통의 물마저 떨어져 M1소총으로 마지막 젖 먹던 힘까지 쏟아 부었던 일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

죽을 고비를 몇 번이나 넘겨 용케도 살았는데.... 그는 중대장과 소대원들의 모습을 떠올리며 조용히 눈을 감았다. 그런데 갑자기 귓가에 사람의 소리가 났고 얼굴도 모르는 병사 한 명에 의해 그의 생명은 연장받게 된다.

"저를 업고 가는데 얼마나 무거웠겠습니까. 축 늘어진 몸이 너무나 무거워 저를 업은 병사의 몸이 땀으로 목욕을 했으니까요.

"병원에 실려와서 살펴보니 왼팔 상박에 신경이 절단되었고 발등이 묵사발이 되었어요.기적이 찾아온 거였어요. 모두가 기적이 아니고는 살아 남기 힘든 상황이였다고 했거든요."

그가 실려온 곳은 춘천 이동야전 육군병원이였는데 학교를 빌려서 하는 임시병원이라 시설과 약품은 태반이 부족한 상태였다.

그러나 그는 그곳 병원에서 죽은 줄로만 알았던 소대장을 만나 얼싸안고 눈물을 흘린 뒤 후송열차에 실려 마산 수도육군병원에 도착하게 됐다.

그는 한명돌(70)씨와의 사이에 3남1여를 두고 있고, 자녀들 중에는 시청 공무원과 시내 모 은행 차장 등으로 있기도 하다.

또 그는 전국에서는 유일하게 보훈회관에 유공자 경로회를 만들어 불구로 인해 일반 경로당에서 소외당할 우려가 있는 사람들을 이곳에서 모여 지낼 수 있도록 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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